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76화 (76/165)

정신이 두둥실 떠오르는 묘한 감각.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 어딘데….”

꿈속의 나는 웬 깊은 산 속을 홀로 헤집고 있었는데….

곳곳에 자라난 낯선 식물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평범한 산은 아닌 것 같았다.

‘…게이트인가?’

식물들 말고도 꿈속 배경이 게이트라는 걸 추측할 수 있는 요소는 많았다.

고작 산을 오르는데, 온갖 아이템으로 치장할 일은 흔치 않기에.

꿈속의 나는, 척 봐도 희귀해 보이는 아이템들을 두르고 있었다.

바람의 가호가 깃든 귀걸이부터 피 묻은 황금 아뮬렛, 투신의 장갑까지.

모두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S랭크 아이템이었다.

‘저걸 다 얻은 건가?’

마치 잘 나가는 헌터 같은 차림새를 한 꿈속의 나는 계속해서 산속을 헤맸고,

이내 어느 한 장소에 다다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찾았다.”

흐드러진 소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커다란 폭포수.

폭포가 만들어낸 웅덩이는 물속이 훤히 내비칠 정도로 투명했는데, 발목까지밖에 안 올 정도로 얕음과 동시에 매우 넓어서,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여긴 왜 온 거지…?’

꿈속의 나는 물장구라도 치러온 건지, 거침없이 물속으로 발을 내디디며 폭포수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흐음….”

떨어지는 폭포 너머를 유심히 살피더니, 폭포수 위를 흘끔 쳐다보곤 다짜고짜 물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타앗-!

‘어어?’

나는 그대로 절벽에 부딪힐 줄 알았으나, 다행히 공간이 존재한 덕분에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툭- 툭-

꿈속의 나는, 가볍게 물을 털어내고 굴 안쪽을 천천히 둘러보며 발길을 옮겼는데….

이윽고 동굴 끝에 다다르자, 묘한 구조물 하나가 반겨주었다.

‘저게 뭐지?’

울퉁불퉁 거친 벽면에 한가운데만 사각형으로 매끈히 파인 게, 마치 그 부분만 일부러 갈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보자….”

꿈속의 나는 그 구조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손가락을 들어 올려 매끈한 벽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그러자 손길이 닿는 곳마다 흔적이 남으며 밝게 빛이 나기 시작했고,

이내 정체불명의 그림을 그려낸 나는, 슬쩍 손을 떼어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해를 그린 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의문을 품고,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살피던 그 순간.

쿠구구구구궁……

동굴 내부에 진동이 울려 퍼지더니,

쩌저저저적-

매끈한 벽면이 마치 코인 라커처럼 좌우로 열리며, 작은 공간이 드러났는데….

‘…!’

그 공간 내부를 확인한 나는,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벽 안쪽에 들어있던 건 바로 회중시계.

섬세한 공예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색 회중시계였다.

‘이건….’

나는 이 회중시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분명 알고 있지만, 새까맣게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꿈속의 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황금색 회중시계를 손에 넣었고,

번쩍-

“핫…!”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우리 집 안방이었다.

*

“…으음….”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사무실로 출근한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게이트를 찾기 위해 사례를 뒤지고 있었다.

‘파란색…. 파란색….’

보통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 간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번 꿈은 너무나 선명히 남아있었고,

나는 꿈에서 보았던 황금색 회중시계를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가며 정보를 찾고 있었다.

황금색 회중시계는, 원작 소설 ‘최강고수’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의문의 아이템.

그렇기에 별 볼 일 없는 아이템일 확률이 높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후우….”

하지만 단편적인 정보로 특정 게이트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정보는 오직 낯선 생김새의 풀들과 폭포뿐.

그중에서도 ‘푸른색 꽃’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찾고 있는데, 당장 국내 게이트 중에서 푸른색 꽃이 발견된 사례만 해도 벌써 네자릿수가 넘었다.

“쉽지 않네….”

그렇게 묘한 집념을 품은 채로 한참 동안 정보를 뒤지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 벌써 출근하셨어요?”

한규리가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어요.”

“뭐, 바쁜 일 있으세요?”

“아뇨. 딱히 바쁜 건 아닌데….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어서요.”

“신경 쓰이는 일이요?”

한규리는 들고 온 짐을 자리에 놓곤 곧장 내 자리로 다가왔고,

“무슨 일인데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괴수는 몰라도, 식물 쪽은 좀 약해서 영 찾기가 쉽지 않네요.”

그런데.

“아…! 그런 거였으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그녀가 뜻밖에 말을 꺼내왔다.

“저, 게이트 식물 전공했잖아요.”

“…네?”

무려 한규리의 대학 전공이 그쪽과 관련돼있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어떤 걸 찾으시는 건데요?”

“어…. 이름은 잘 모르고, 그냥 푸른색 꽃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푸른색 꽃이라…. 꽃잎은 몇 개 달린 지 아세요?”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음…. 잠깐 컴퓨터 좀 써도 되죠?”

“아, 네.”

이윽고 내 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과제로 몇 번 해봤다며 해외 사이트를 켜곤 능숙하게 정보를 물어왔다.

“일단 푸른색은 확실하죠?”

“네.”

“모양이 어떻게 생긴지는 기억하세요?”

“휴대폰에 그려둔 게 있어요.”

그녀는 내가 얼핏 그려둔 그림을 유심히 확인하더니, 이내 감을 잡았다는 듯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거 아니에요?”

“!”

순식간에 꿈속에서 보았던 꽃을 정확히 찾아내 버렸다.

“이건 우리나라에선 거의 보기 힘든 꽃인데…. 어디서 보셨어요?”

알고 보니 내가 찾던 식물은 ‘이종 꽃기린’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게이트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식물.

정보가 적은 국내에선 찾기 어려운 게 당연하였다.

‘해외라니…. 겨우 이것 때문에 해외까지 나가야 하나?’

괜히 일이 커진 탓에, 계획에도 없던 해외 출장까지 고려해가며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그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게 있는지 찾아볼까요?”

“가능할까요?”

“아마 발견된 게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한규리가 국내에서 발견된 사례를 찾아주었고,

“딱 세 곳 있네요?”

나는 모니터에 떠오른 게이트 목록을 확인하곤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천 자월도.

경산 저수지.

그리고….

지리산.

……

[ 지리산 H-992 ]

……

‘폭포’ 근처에서 ‘의문의 구조물’이 발견됐다던 그 게이트였다.

*

설주희와 임아린이 크게 다툰 이후.

중간에 껴있던 홍유라는 깊은 근심에 빠지고 말았다.

그토록 아껴왔던 팀원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싸운 것이다.

유독 팀원들을 아끼고 먼저 생각했던 홍유라로선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물론 엄연히 따지자면 홍유라도 설주희의 편이었다.

어쨌든 임아린은 약속을 깼고, 그것도 모자라 결혼 선언까지 해왔기에.

암시로 인한 혐오감과 내재돼있던 사랑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홍유라로선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임아린이나 도지혁을 탓해도 괜찮으냐?

그건 또 아니다.

두 사람에겐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결혼을 하건, 임신을 하건,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할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홍유라는 무력함을 느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끝없이 되뇌었고,

마침내 그녀에게도 굴레가 찾아오고 말았다.

빠져나가려 발버둥칠수록 더더욱 깊게 잠겨버리는, 질척질척한 감정의 굴레가….

‘…왜 이렇게 됐을까….’

그러나 홍유라는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설주희와는 다르게, 어두운 감정들이 익숙했기에.

다만, 끊임없이 원인을 찾아 헤매며 기나긴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

그러다 문득, 홍유라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이질적이라는 것을.

도지혁이 나간 순간부터 팀이 이상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는 주축이었던 도지혁이 빠져나가며 생긴 문제도 있으나,

정확히는 팀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유라는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도지혁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체계를 바꾸는 수뇌부.

어딘가 이상한 행보를 보이는 단장 구석일.

그리고 길드 내부에 돌아다니던 도지혁에 관한 소문까지.

하나같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이상해….’

물론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정말로 천화 길드의 수뇌부가 의도적으로 도지혁을 축출해냈다면,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누군가의 뜻으로 이뤄졌다는 말이기에.

누군가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

아무리 우스울지라도, 그녀에겐 조그만 계기가 필요했다.

절망밖에 없는, 끔찍한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한번 알아봐야겠어….’

홍유라는 잠시 미뤄두었던 천화 길드의 조사를 재개하기로 마음먹었고,

자신의 감정을 모두 덮어버린 채로, 다시금 활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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