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배부터 좀 채우고 이야기하지.”
이윽고 시작된 강무진과의 식사.
‘꽤 괜찮네.’
그저 비밀스럽게 만나겠다는 이유로 굳이 외곽으로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음식 맛이 매우 괜찮았다.
‘나중에 우리 애들도 데리고 와야겠다.’
그렇게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랬을 즈음.
강무진이 먼저 말을 꺼내왔다.
“요즘 자네 팀이 아주 잘 나가던데…. 일할 맛 좀 나겠구만?”
“사실…, 여러 가지로 질러놓은 게 많아서 아직 본전도 못 찾긴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꽤 베팅을 크게 했나 보군. 뭐, 시장이라도 구워삶았나?”
“시장뿐이겠습니까?”
강무진은 흐흐 웃으며 회 한 점을 낼름 삼키곤, 반주로 가볍게 입을 적시며 질문을 던져왔다.
“천화 그룹에서 자네를 잘랐다는 게 사실인가?”
호쾌한 성격을 지닌 사내답게, 참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음?”
“정황상 저도 천화 그룹 쪽에서 뭔가 한 것 같다고 생각하곤 있는데…, 그쪽 하곤 연이 없어서, 영 알 수가 없습니다.”
“구석일은?”
“뭐라도 받아먹은 사람처럼 굴던 걸 보면, 뻔하지 않겠습니까?”
구석일은 천화 그룹에서 직접 선출하여 세운 단장이다.
천화 그룹과 깊숙이 연결된 건 당연지사.
유독 내게 단호히 굴던 구석일의 언행을 생각해보면, 천화 그룹에서 지시를 받은 게 분명했다.
뭐…. 결국은 다 망한 것 같지만.
“흠…. 그렇단 말이지.”
강무진은 무언갈 생각하는 듯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내 쪽을 흘끔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나랑 일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어떻게, 한자리 마련해보면 되겠나?”
“마침 저희도 여성 팀을 키울 계획이었거든요.”
내내 조용히 있다가 은근슬쩍 한마디를 보태는 백유진.
나는 두 사람의 권유를 부드럽게 쳐내며 은근슬쩍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음…. 급한 일이라도 있나? 아직 시간도 많은데, 좀 천천히 이야기하지.”
“맞아요.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조금 느긋하게 협의하죠?”
강무진과 백유진이 슬쩍 대화를 피해버렸고,
‘…이 사람들이….’
뻔히 내다보이는 짓을 하는 두 사람에 행동에 내심 헛웃음을 흘린 나는, 내가 우위에 섰다는 점을 이용하여 강제로 밀고 들어갔다.
“오기 전에 백유진 씨가 보내주신 자료를 좀 훑고 왔습니다. 사실…, 이미 체계가 다 잡힌 거 같아 보였는데, 제가 딱히 손댈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으흠….”
강무진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이내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내 이야길 받아주었다.
“우리 길드 시스템이 다른 곳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사실일세.”
“혹시 그 다른 곳이, 세진이나 천화 같은 곳입니까?”
“솔직히 그런 곳하고 비교하긴 싫지만…, 어쨌든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길드이니, 별수 있는가?”
나는 강무진의 말에 잠자코 수긍했다.
아무리 말도 많고 탈도 많아도, 세진과 천화는 명실상부 1티어 길드.
게이트가 발달한 타 국가들의 대장급 길드와 비교해봐도, 전혀 꿀리지 않는 게 사실이다.
“뭐….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체계 개선과 강의를 좀 해줬으면 좋겠네.”
“강의…. 말입니까?”
“자네는 바쁜 몸이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가 만든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는 인력들을 만들어주면 좋겠어.”
나는 강무진의 제안에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시스템을 세우고 강의까지 하라고?’
솔직히 시스템을 구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수많은 석, 박사들이 만들어온 세진과 천화의 시스템을 갈래 하나까지 모두 흡수해왔기에.
구상만 잘 제작해서 제출하면 길드 내부에서 알아서 뚝딱뚝딱 만들어낼 테니, 실질적으로 크게 할 일도 없다.
그런데….
강의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 강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게 너무나 많은데, 그걸 언제 한단 말인가?
“너무 부려 먹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만큼 확실하게 보수할 테니,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말게. 그리고…. 백일 쪽에서 만든 신약도 얻어가지 않는가?”
강무진은 호쾌한 성격과는 달리 굉장히 계산적인 면을 보여왔다.
그도 어쨌든 대형 길드를 이끄는 단장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이러나저러나 백일 길드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조만간 벌어질 세 번째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선, 반드시 백일 길드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평범한 소형 파티에서 시작된 백일 길드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던 건, 모두 단장인 강무진의 인품 덕.
그가 사람을 이끌고, 이끌려온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사람을 연결하는, 정말 낭만으로 굴러간다 해도 손색이 없는 길드고,
소수 정예로 이끄는 천화나 엄격한 아카데미 시스템을 차용해온 세진과는 다르게, 백일은 모든 구간에서 매우 압도적인 헌터의 숫자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 백일의 도움을 받는다면….
우왕좌왕하다 허무하게 뚫려버린 원작과는 다르게, 분명 세 번째 침공을 막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좋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해보겠습니다.”
잠시 머리를 굴리며 방법을 떠올리던 나는 미래를 보며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대신에…. 조건 하나만 더 붙여 주십시오.”
“…으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
홍유라는 임아린의 폭탄 발언에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결혼이라니.
심지어 도지혁과 결혼이라니!
분명 단단히 벼르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급소를 맞아버린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이마를 부여잡고 잠시 충격에 빠져있던 홍유라는, 겨우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아린아.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그게….”
아랫배에 슬며시 두 손을 얹은 임아린.
“……!”
내내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설주희는 임아린의 행동에 반응하여 움찔거렸고,
임아린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세상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충격적인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에 지혁이랑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 지혁이도 조금 생각이 있는 거 같더라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많은 게 잘려나갔을 뿐.
“그래서…. 아, 아이를 먼저 가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임아린의 발언은 마치 도지혁이 아이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처럼 너무나 오해하기 쉽게 들렸고,
두 사람은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
“…아이?”
“임아린. 너 미쳤어?”
드물게 정색하며 거친 말을 내뱉는 홍유라.
순간 욱해버린 그녀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도지혁을 향한 분노인지.
아니면 눈앞에서 뻔뻔스럽게 입을 놀리는 임아린을 향한 분노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치만….”
임아린은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내뱉었다.
“지혁이는 인기가 많잖아…? 항상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제 눈을 돌릴지 모르니까….”
그리고는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맞은편의 설주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제대로 지키고 있을게…!”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소름 끼치는 한이 맺힌 미소였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결국, 보다 못한 홍유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임아린에게 따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왜 화내?”
임아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유라, 너는 왜 화내는 거야…?”
마치 화낼 자격도 없는데, 왜 화를 내느냐고 묻는 듯한 뉘앙스.
“…뭐, 뭐…?”
순간 말문이 막힌 홍유라는 애꿎은 미간만 찡그리고 말았고,
임아린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긋나긋하게 쐐기를 박았다.
“넌 지혁이가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화내는 거야? 혹시 내가 지혁이랑 결혼하는 게 싫어…?”
“그건 당연히…!”
홍유라는 차마 입안에 맴도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도지혁을 욕했다가는, 절대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았기에.
자신이 공들여 지켜온 남자를 눈앞에서 빼앗긴단 사실에 위기 본능이 작동한 것이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가 없다.
‘홍유라’는 ‘도지혁’을 싫어한다.
이 사실은 이미 세상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홍유라는 이를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했어?”
그때, 내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설주희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그 새끼랑, 했어?”
“…어, 어…?”
그러자 임아린이 금세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화악─ 붉히더니, 안타까운 몸짓으로 제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하, 하긴 했는데….”
그 순간.
“하….”
설주희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하, 하하…. 했어…? 하핫….”
그리고는 갑자기 어깨를 들썩여가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했다고? 흐, 그 새끼랑…. 침대에서? 응? 큭큭…. 했어…?”
“주희야…?”
“…설주희. 너….”
임아린과 홍유라는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괜찮….”
걱정스러운 표정을 띤 임아린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며 설주희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갑자기 설주희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스윽─
슬며시 고개를 들곤, 흘러내린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임아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좋았어?”
“주희야. 일단 진정….”
“좋았냐고 씨발년아!!!!!!!”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드는 설주희.
“설주희!”
설주희의 돌발행동에 화들짝 놀란 홍유라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막아섰고,
“…….”
임아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설주희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씨발년이, 뭐? 결혼? 놔봐. 놓으라고 홍유라 개 같은 년아!!!”
“설주희!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진정해!”
“약속했잖아. 같은 날에, 같이 하기로 약속했잖아, 씨발년아!!!”
눈이 돌아간 설주희는 악을 써가며 임아린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임아린의 감정은 차갑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주희야…. 너도 지혁이가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네가 지혁이 내보냈잖아.”
임아린은 명백한 사실을 들먹이며 설주희를 상대했다.
“너 때문에 지혁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아니, 정확히는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놔, 빨리 안 놔? 저 좆 같은 배신자년 죽여야 하니까 놓으라고!!!”
“…배신자는 내가 아니라 너잖아. 설주희.”
머리가 뜨거워진 설주희와 반대로 차갑게 식어버린 임아린은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며 기 싸움을 벌였고,
“임아린! 입 다물고 당장 나가!”
“…연락할게….”
홍유라의 제지 끝에, 임아린이 집을 나서며 간신히 폭력 사태까지는 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결성 10년 차, 퀸즈의 첫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