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73화 (73/165)

임아린과 함께한 2박 3일간의 여행은 꽤 순식간에 흘러갔다.

사실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뒹굴기만 했으니, 짧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리라.

첫날 숙소에 들어간 이후, 우리는 체크아웃 전까지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숙소에 구비돼 있었고, 애초에 제주도 자체를 즐기러 온 여행이 아니었기에,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차가 좀 막히네…. 안 답답해?”

“괜찮아…! 오히려 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좋은데?”

그렇게 공항으로 돌아와, 주차해뒀던 차를 끌고 돌아가는 길.

라디오를 틀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임아린이 선뜻 말을 건네왔다.

“있잖아.”

“응?”

“우리…. 서로 집이 너무 떨어져 있는 거 같지 않아…?”

“집?”

“응! 동네도 떨어져 있고, 서로 만나고 싶을 때 만나기도 어렵잖아…!”

나는 핸들을 툭툭 두들기며 그녀의 말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서로의 집이 그렇게 머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리 멀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엄연히 관할 지역은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서울 안에 있고, 물리적으로도 그렇게 멀지는 않기에.

그러나 매일같이 출퇴근하기엔 번거로운 거리인 건 확실하다.

“조금 그렇긴 하지?”

조수석을 슬쩍 돌아보며 그녀의 말에 긍정한 찰나.

임아린이 묘하게 눈을 번뜩이며 슬쩍 제안을 들이밀어 왔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아예 같이 살면 어떨까…?”

“…어?”

무려 동거 제안이었다.

‘…같이 살자고…?’

생각지 못한 동거 제안에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자, 임아린이 잽싸게 동거의 장점을 주르륵 늘어놓기 시작했다.

“같이 살면 매일 볼 수 있고, 같이 잘 수도 있고, 항상 같이 있을 수 있잖아…! 그리고 생활비도 아끼고….”

마치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단단히 준비해온 느낌이었다.

‘동거는 좀 곤란한데….’

까놓고 말해서, 임아린과의 동거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다만.

그녀와 함께 살게 됐을 때, 과연 내가 절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임아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마력의 보정을 받아서 그런지 꽤 훌륭한 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이번 여행으로 밝혀졌다.

아무리 다른 일정이 없었다고 해도, 겨우 2박 3일짜리 여행에서 무려 두 자릿수를 기록했는데….

만약 같이 살기라도 하면 어찌 되겠는가?

분명 몇 개월 안에 꼼짝없이 식장을 거닐고 있으리라.

“그리고 또….”

“…아린아.”

“응…?”

“그, 다 좋은데. 동거는 아직 조금 이르지 않을까?”

“…이르다고…?”

“응.”

나는 그녀가 오해를 품기 전에 재빨리 동거를 미뤄야 할 이유들을 늘어놓았다.

“어제도 말했지만…,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우리 둘만의 시간을 조금 더 즐겼으면 좋겠어.”

내가 내뱉은 말이지만, 정말 결혼하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혁아….”

그러나.

“생각해보니까, 그게 맞는 거 같아…!”

임아린은 금세 태도를 바꿔 내 의견에 동조해주었고,

자연스럽게 동거에 관한 이야기는 묻히고 말았다.

이게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간 건지, 아니면 그녀가 나를 봐준 건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

다음날.

“수고들 하십니다.”

오랜만에 사무실로 출근하자, 김준형과 한규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어, 왔어?”

“오셨어요?”

“다들 일찍 왔네요? 자, 이거 선물.”

“와! 설마 일부러 챙겨 주신 거예요?!”

“그냥 공항에서 지나가다 보이길래 샀어요. 간식 괜찮죠?”

“완전 괜찮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오…. 설마 초콜릿은 아니겠지?”

“제주도에서 사올 게 뭐 있겠냐.”

“어라? 제 건 초콜릿이 아니라 다른 건데요?”

“뭐야, 내 거만 초콜릿이야!?”

“공무원한테 비싼 거 주면 잡혀가잖아.”

“나만 공무원이야!? 규리 씨도 공무원이라고!”

그렇게 선물 증정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김준형이 다가와 파티션에 슬쩍 기대어 은근히 물어왔다.

“그래서, 제수씨랑 좋은 시간 보내고 왔냐?”

실실 웃는 낯짝에 능글맞음이 묻어나는 게, 임아린과의 관계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언제 봤다고 제수씨야? …앞으로 형수님이라 불러라.”

“크으…! 해냈구나 도지혁…!”

“결국, 사귀기로 하신 거예요?”

김준형의 반응에 흥미가 돋은 듯, 슬쩍 끼어드는 한규리.

그녀도 은근슬쩍 다가와 임아린과의 여행에 대해 물어왔다.

“어쩐지 프로듀서님 얼굴이 홀쭉하다 싶었는데…. 역시였네요!”

“…정말요?”

“어. 누가 보면,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어.”

“그래서 어땠어요?!”

두 사람은 오랜만의 가십거리에 눈을 밝히며 꼬치꼬치 캐물어 왔고,

“나중에 술 한잔 사면서 말해 줄 테니까, 오늘은 가서 일이나 하세요. 규리 씨, 백일 그룹 미팅 건 좀 확인해 줄래요?”

“아, 네!”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적당히 얼버무리곤 업무를 시작하였다.

‘오후에 강무진이랑 만나고…. 바로 퇴근하면 애들이랑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그렇게 오늘의 일정을 살피곤 다음 게이트에 관한 계획을 세우던 도중.

“…….”

문득 임아린이 걸렸던 ‘암시’에 관해 의문이 들었다.

적어도 어젯밤까지는 임아린의 암시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직접 확인을 받은 사항이니, 확실한데….

이 말인즉슨 임아린의 암시가 완전히 치료됐을 확률이 크단 뜻이며,

정말로 ‘물리치료’가 먹혀들었단 이야기가 되고.

똑같은 암시에 걸린 설주희나 홍유라와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곤란한데….’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갖는 건 썩 내키지 않는다.

물론 일부 좋아하는 남성이 있을 순 있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진짜면 어쩌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것도 사실.

당장 몇 개월 후면 세 번째 사건이 터진다.

세 번째 사건에선 서해에 발발한 초대형 게이트로부터 어마어마한 군세가 쳐들어오게 되는데,

여기선 폭발적인 힘을 지닌 홍유라와 설주희를 반드시 활용해야 하며, 그녀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반드시 그녀들의 암시를 깨부숴야 한다는 뜻이다.

‘제발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업무를 이어가길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점심 드시러 가실까요?”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한규리가 먼저 말을 꺼내왔고,

“저는 백일 쪽 사람들이랑 만나서 먹기로 해서, 먼저 식사하세요.”

“그래? 규리 씨, 그럼 먼저 갈까요?”

“프로듀서님은 거기서 바로 퇴근하시는 거죠?”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홀로 사무실을 지키던 나는, 시간에 맞춰 백일 그룹의 백유진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

“어서 와요.”

“오랜만에 뵙네요.”

약속 장소에 자신의 차를 세워놓고 백유진의 차로 갈아탄 도지혁은. 나란히 탄 그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근황을 나누었다.

“여자친구 분이 생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소식이 좀 빠르네요?”

“직원 중에 공항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소문이 사실인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도지혁은 자신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백유진과는 순수한 비즈니스 관계였기에, 살짝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흐응…. 딱히 뭐라 하진 않을게요. 겨우 그런 걸로 꼬투리 잡고 싶진 않거든요.”

“감사합니다.”

가벼운 흥미 정도로 그쳤던 백유진은 도지혁의 연애 소식을 시원스레 받아들였는데….

물론 가벼운 흥미가 아니라, ‘깊은 관계’를 맺은 상황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백유진은 현재 백 씨 가문에서도 유독 피를 진하게 받은 편이다.

특유의 하얀 머리와 붉은 눈동자가 그를 증명하고 있으며,

만약 도지혁이 큰 선을 넘었다면, 분명 그는 백유진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을 것이고,

그녀는 아마 백일그룹 전체를 이용하여 그를 ‘소유’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사라진 시간의, 의미 없는 예일 뿐.

현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 그대로 ‘소멸한 시간’의 가정일 뿐이다.

“강무진 단장님은 어떤 분이죠?”

“만나보신 적 있으시지 않은가요?”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이니까, 거의 8년 전이거든요.”

“그래요? 저희 단장님은 보기보단 호쾌하신 편이세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시니, 처음부터 직구로 던지시는 게 나을 거예요.”

도지혁은 백유진의 이야기를 듣곤 곰곰이 전략을 세우며 차창 밖을 흘끔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높은 하늘에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게, 마치 태풍이라도 몰려올 것 같은 날씨였다.

“도착했네요.”

이윽고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어느 고급 한식당.

도지혁과 백유진은 마중 나온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 내부로 들어섰고,

드르륵─

비밀스럽게 마련된 안쪽 방에서, 마침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오랜만이군.”

백일 길드의 수장, 강무진이다.

뒤로 넘긴 성성한 백발과 멋들어진 수염을 지닌 그는 중년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자랑했는데,

현역 시절 전장을 휩쓸었던 실력자답게, 여전히 어마어마한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앉지.”

그렇게 강무진과 짧게 안부를 나눈 도지혁은 슬쩍 자리를 잡았고,

천화 길드와 세진 길드를 넘어, 마침내 백일 길드까지 마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

도지혁이 한창 백일 길드와 협상에 들어갔을 무렵.

설주희의 집.

임아린의 여행이 끝난 이후, 오랜만에 퀸즈의 모든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세 사람이 모인 거실엔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내리깔려 있었고,

“…….”

정색에 가까운 표정을 띤 홍유라나 설주희와는 다르게, 오직 임아린 만이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린아.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홍유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자.

임아린이 그녀의 바람을 부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내젓더니, 이내 쐐기를 박아버렸다.

“나…. 지혁이랑 결혼할 거야.”

무려 도지혁과의 결혼 발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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