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아래에 굴러다니는 빈 갑들.
임아린과 나는 오랫동안 참아온 걸 모두 풀어내듯 사온 도구들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고,
결국, ‘안전한 날’이라는 주장에 늦은 밤까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서로를 탐했다.
그런데….
뜨겁게 달아올랐던 흥분도 살짝 가라앉자, 슬슬 불안감이 뒤늦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아무리 안전한 날이라고 해도, 100%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임아린이 알아서 계산했을 테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녀를 책임지지 않을 생각은 없지만….
이러다 덜컥 임신이라도 해버리면, 나중에 벌어질 마왕의 침공을 막아설 전력이 빠지게 된다.
특히 임아린은 주요 전력 중의 하나.
조금 늦긴 했으나,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는 게 맞으리라.
“…기분 이상하다….”
“뭐가?”
그때, 품에 안겨 나란히 누워있던 그녀가 말을 꺼내왔다.
“그냥…. 이렇게 같이 누워있는 게 거짓말 같아서…. …꼭, 꿈꾸고 있는 거 같아….”
묘하게 아련한 손길로 몸을 쓰다듬어오는 그녀.
눈빛이 나른한 게, 어딘가 몽롱하게 보이기도 했다.
“다행이네. 꿈이 아니라서.”
그녀의 배에서 슬쩍 손을 떼어낸 나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꿈이면 아깝잖아?”
그러자 그녀가 핏─ 하고 웃으며 찰싹 껴안아왔고,
나는 은근슬쩍 허리를 뒤로 빼곤 그녀를 다정히 안아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최근엔 꽤 멀쩡한 거 같네.’
강렬한 사랑스러움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임아린은 설주희나 홍유라와 같이 나에게 혐오감을 품는 암시가 걸려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억누르고 있는 건지, 여행에 와선 단 한 번도 혐오감을 내비치거나 발작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압도적인 행복감이 암시를 흐리게 만들기라도 한 걸까?
‘…역시 이런 건 제대로 확인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임아린을 슬쩍 떼어내고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그…. 네 암시에 관한 이야기인데.”
바로 그때.
“……어?”
기분 탓인지, 그녀가 순간 허를 찔렸다는 반응을 보여왔고,
“…괘, 괜찮지…! 뭔데…?”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주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다른 게 아니라…, 지금은 좀 괜찮은가 해서.”
언젠가 임아린이 발작을 일으키던 날.
그녀는 항상 내게 혐오를 품고 있으며, 매번 억지로 누르는 거라고 설명했었다.
그렇기에 괜히 엄한 걸 연상치 못하도록, 여러모로 행동을 주의해왔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리드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동안 쌓아온 경험들을 십분 활용하고 말았고,
그중엔 암시에 걸린 그녀라면 꽤 기분이 나빴을 포인트가 많았다.
“…아….”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듯 슬쩍 시선을 내리까는 임아린.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가 싶어 살짝 긴장한 채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으음….”
임아린은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듯, 한참을 고민하더니….
“잘 모르겠는데…?”
뜻밖에 의견을 꺼내왔다.
“그냥 행복하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
“…막 이상한 생각은 안 들어?”
“이상한 생각…?”
그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로 내게 되물어왔고,
‘이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상태를 확인하고자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 그녀의 생각을 유도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너랑 한 게 진짜 첫 경험이거든. 그래서 나름 만족하게 해주려고 공부를 좀 해왔는데…. 혹시 오해하진 않았을까 해서.”
그러자.
“잘 모르겠는…. 앗…!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나쁜 생각이 안 드는 느낌이야…!”
정말 암시가 벗겨지기라도 한 건지, 꽤 희망적인 말을 건네왔다.
“정말…? 이제 괜찮아?”
“응…!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나쁜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이제는 안 그래…!”
그녀는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나를 보면 안 좋은 감정이 솟았다는 설명을 덧붙여왔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멎어버렸고,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즉….
정말로 암시가 벗겨졌다는 말이다.
“…사, 사실…. 아까 잠깐 정신 잃었을 때…. 진짜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거든…?”
“어?”
“너무 행복해져서…, 가, 갑자기 없어진 게 아닐까…?”
임아린은 낯뜨거운 고백을 내뱉으며 은근슬쩍 내 하반신에 손을 뻗어왔고,
“그, 그런가?”
갑작스러운 도발에 화들짝 놀란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제지하며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암시에 걸린 임아린은 그동안 억지로 감정을 눌러왔다.
그런데 그 암시가 관계 도중에 대뜸 자취를 감추었고,
이것이 일시적인 상황인지, 아예 뿌리가 뽑힌 건진 모르는 상황이다.
‘이게 물리 치료도 되는 거였어…?’
그렇게 뜬금없는 희소식에 얼떨떨해하길 잠시.
“…이, 있잖아….”
스윽─
어느새 내 다리를 옭아맨 임아린이 은근슬쩍 유혹해오기 시작했다.
“호, 혹시 모르니까아…. 조금만, 더 해볼까…?”
나는 관계를 요구해오는 그녀의 몸짓에 반응하여 금세 흥분하고 말았으나.
“!”
동시에 덮쳐오는 묘한 섬뜩함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설득을 시도했다.
“자, 잠시만, 아린아! 우리 고무도 없는데,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했는데…?”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아니면, 차라리 내가 가서 좀 사올까? 너도 제대로 못 쉬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그렇게 많이 했는데, 차라리 지금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것도 맞긴 맞는데, 그래도….”
“호, 혹시…. 나랑 하기 싫어진 거야…? 내가 너무 못해서…. 멋대로 기절이나 하고….”
“아, 아냐! 그게 아니라…!”
임아린은 이성적인 논리와 감정적인 호소를 적절히 섞어가며 나를 압박해왔고,
동시에 은근슬쩍 분위기를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냥, 조금만 더 사랑해주면 안 돼…?”
“…아린아. 꼭 그걸 해야만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역시…, 나랑 하기 싫은 거구나…. 재미가 없어서….”
“아, 아니야! 이것 봐! 내가 하기 싫은데 반응하겠어?!”
“…따, 딱딱하긴 하네에….”
“자, 잠시만. 너무 세게 잡진…. 앗.”
결국,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고 만 것이다.
“…헤헷….”
임아린은 끝내 몸 위로 올라타며 원하는 걸 얻어내고 말았고,
‘밖에…. 밖에 하면 돼…!’
나는 필사적으로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굳은 다짐을 삼켰다.
언젠가 인터넷에 떠돌던, 어느 유부남의 피임 방법 후기와 두 아이의 사진을 어렴풋이 떠올린 채로….
*
임아린과 도지혁이 한창 2차전에 돌입했을 무렵.
같은 시각, 팀 서울시청의 숙소.
[ 좋아해요. 이 세상 어디든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성준 씨 사랑해요! ]
[ 은아 씨…! ]
방한나와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던 진서원은, 때마침 흘러나오는 일일드라마의 고백씬에 문득 의문을 품었다.
“…언니.”
“응?”
“…사귈 때, 고백은 어떻게 해?”
“고백…?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음…. 글쎄….”
방한나는 갑작스러운 진서원의 물음에도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정성스레 대답을 들려주었는데….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를 이야기하겠지? 저 드라마에서도 ‘이만큼 사랑해요!’라고 말하잖아. 그게 좋으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느낌?”
“…그래?”
하필 그 대답이 진서원의 가슴속 무언가를 자극하고 말았다.
‘…오빠는…. 내가 좋다고 했는데….’
지난 단합회의 밤.
당시 진서원은 분명 만취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지혁과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자신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당연히 좋아한다고 대답한 것을.
─솔직히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어. 물론 아니었어도 좋아했겠지만. 내가 우리 팀 에이스를 어떻게 싫어하겠어?
덕분에 모든 걸 이룰 수 있었다며, 무려 ‘에이스’라고 치켜세워 준 것을.
─그래, 그럼. 오빠라고 불러
심지어 오빠라는 특별한 호칭도 흔쾌히 받아주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팀원들하고 너무 가까워지는 건 피하고 있거든.
스스로의 규칙도 깨트렸음을 강조하며,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밝히기도 했다.
─너만 특별히 허락해 준 거야. 지금 이야기한 건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그렇기에 이건 사랑 고백.
‘…오빠가 나를 사랑해…?’
진서원은 처음으로 이성의 감정과 마주하였고,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도 오빠 좋아하는데….’
그녀는 도지혁이 마냥 좋았다.
그에게 신뢰를 받는 것도 좋았고,
그에게 귀여움을 받는 것도 좋았으며,
그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좋았다.
하다못해, 꾸짖음을 당한 순간에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마저도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받아들였기에.
외려 자신을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커다란 감정은 진서원의 가슴 속에서 끝없이 자라왔고,
어느 순간 그 어느 감정보다 커다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오빠를…?’
마침내 진서원은 자신의 감정과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첫사랑이었다.
*
같은 시간.
“자. 어서 좀 먹어.”
“…….”
배달 음식으로 한껏 상을 차린 홍유라는, 막 잠에서 깨어난 설주희를 붙든 채로 겨우겨우 밥을 먹이고 있었다.
‘…지금쯤 아린이는….’
홍유라는 벌써 몇 시간 째 메신저를 확인하지 않는 임아린의 행동에,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설주희 못지않게 욕구가 강한 그녀였기에, 침대 위에서 뒹구는 도지혁과 임아린의 모습을 상상하며 강렬한 회의감과 박탈감 그리고 도지혁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러고 있는데…. 누구는….’
바로 그때.
띠링─
식탁에 놓여있던 설주희의 휴대폰에 짧은 알림이 울렸다.
[ @Im아린 님이 사진을 공유… ]
반나절 만에 임아린의 SNS가 갱신된 것이다.
“!”
설주희는 다급히 휴대폰을 들어 임아린의 SNS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메말라 있던 그녀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맺히기 시작했다.
“…….”
임아린이 올린 건, 다름 아닌 보글보글 거품이 가득한 월풀욕조의 사진.
[ ♥正正正正♥ ]
그리고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
“…아린이야?”
홍유라도 흘끔 고개를 돌려 설주희의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는데….
“……!”
왠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더니, 일순간 악귀 같은 표정으로 변하며 분노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꾸드드드드득──
얇은 종이를 구기듯 가볍게 구겨지는 홍유라의 숟가락.
마치 임아린이 올린 의미심장한 글의 의미를 알아챈 것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