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70화 (70/165)

‘…프, 프로듀서님이 왜…?’

방한나는 생각지 못한 도지혁의 등장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당연히 죄다 만취한 채로 잠들었으리라 생각해서 홀로 수영을 즐기고 있던 건데, 하필 도지혁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혼자 수영하고 있었어?”

“어, 어쩌다 보니까, 잠이 안 와서….”

도지혁의 물음에 부끄러운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방한나는, 자연스레 물가에 자리를 잡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을 꺼내보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괜찮아. 사실 약을 좀 챙겨왔거든. 이미 다 깼어.”

“아, 다행이네요…!”

“근데…. 너무한 거 아냐?”

“네…?”

“너도 나 엄청 먹였잖아. 병도 주고 약도 주네?”

“그, 그건….”

방한나는 장난스럽게 웃는 도지혁의 모습에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녀도 도지혁에게 술을 퍼부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기에.

심지어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속셈으로 가장 도수 높은 술을 골라 먹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으으….”

안절부절 못하는 방한나의 모습에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린 도지혁은, 장난이었다는 말로 그녀를 달래주며 수영장에 슬쩍 발을 담갔다.

“날이 어두워서 그런가, 물이 좀 차네…. 넌 안 추워?”

“저는 적응돼서 괜찮아요…!”

“얼마나 있었는데?”

“어…. 한 시간 정도…?”

“진짜? 꽤 오래 있었구나. 언제까지 할 거야?”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려구요…! 언제 또 이런 곳에 올 수 있을지 몰라서….”

못내 아쉬운 듯, 괜히 손을 첨벙거리는 방한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지혁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또 올 수 있을 거야.”

도지혁은 지금의 시간이, 팀 서울시청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었기에.

물론 퀸즈를 이끌던 시절에 비하면, 여러모로 달리는 게 사실이지만….

그는 항상 퀸즈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은근한 강박이 시달려왔고,

덕분에 맘 편히 쉰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일에 몰두해있었다.

그랬던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은 사실상 요양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럴까요…?”

도지혁은 확신이 서지 않는 듯 되물어오는 방한나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물속에 잠긴 발을 천천히 흔들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까 보니까, 수영 좀 하는 거 같던데…. 따로 배운 거야?”

“따로 배우진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좋아했어요…!”

“오…. 정말? 그럼, 나 수영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제, 제가요…?”

“싫어? 뭐, 싫으면 괜찮….”

“시, 싫다는 건 아닌데요…!”

화들짝 놀란 방한나가 다급히 손을 내젓던 그 순간.

“그럼 가르쳐 주는 거지?”

“…네?”

도지혁은 기습적으로 티셔츠를 벗어버렸고,

“…!”

바로 눈앞에서 도지혁의 탄탄한 속살과 마주한 방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숨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프, 프로듀서님의 맨살…!’

내내 품어온 소원을, 말 그대로 얼떨결에 이루고 만 것이다.

“으…. 차갑다….”

이윽고 조심스레 수영장으로 들어선 도지혁은, 움츠러든 몸을 움직이며 여전히 얼어붙어 있던 방한나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이제 들어왔으니까, 무조건 가르쳐줘야 해.”

“어, 어어…. 그, 제가 누굴 가르칠 실력은 아닌데에….”

도지혁의 엄포에 금세 불안한 표정을 짓는 방한나.

생생한 그녀의 반응에 묘한 재미를 느낀 도지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 그냥 너랑 조금 더 있고 싶어서 들어온 거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마.”

특별한 의미 없이 던진 한 마디.

그저 방한나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던진 말이었다.

‘…프, 프로듀서님이…, 나하고…?’

그러나 방한나에겐 전혀 다르게 들리고 말았다.

지금껏 이렇게 직접 마음을 표현해온 적이 있던가.

‘나, 나랑 있고 싶다고…?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어렴풋이 술기운이 남아있던 방한나는 비대해진 상상력을 갈아 넣으며 도지혁의 말에 온갖 의미를 부여했고,

‘치, 침착하자…. 침착하라고 방한나!!!’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애써 의연한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 깜짝 놀랐어요…!”

누가 보더라도 부자연스러운 행동.

‘귀엽네.’

그녀가 놀림을 받아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한 도지혁은, 흐뭇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근데…, 나 정말 수영할 줄 몰라서, 조금 배워보고 싶어.”

“…정말로요…?”

사실 도지혁은 정말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동안 딱히 배울 기회도 시간도, 이렇다 할 관심도 없었기에.

“괜찮으면, 조금 가르쳐 줄래?”

마침 팀원들도 자리를 비웠겠다, 도지혁은 이참에 수영이나 배우며 시간을 때우자고 생각했고,

‘…이건 기회야…. 프로듀서님께, 제대로 인상을 남기는 거야…!’

방한나는 홀로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그렇게 시작된 방한나의 수영 교실.

“뭐부터 하면 좋을까?”

“어…. 보통은 킥부터 연습해야 하는데….”

“그 둥둥 떠다니는 판 잡고 헤엄치는 거?”

“맞아요…! 근데 그건 여기 없는 거 같아서….”

방한나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킥판을 대체할 물건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잡으세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두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잡고 끌어드릴게요…!”

무려 손을 다잡고 도지혁을 가르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도지혁은 방한나가 무의식적으로 던진 역공에 살짝 주춤거리고 말았고,

방한나는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자, 어서 잡으세요!”

이렇게 나온다면 도지혁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빠뜨리면 안 된다.”

“저만 믿으세요…!”

결국, 손을 마주 잡게 된 두 사람.

“천천히, 빠르게 팍! 팍! 하고 차는 거예요…!”

“천천히 빠르게는 어떻게 하는 건데?”

“…자. 어서 해보세요!”

도지혁은 천천히 물에 떠오르며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고,

“천천히…! 조금 더 빠르게요…!”

방한나는 수영장을 휘저으며 그를 끌어주었는데….

“어푸…. 너무 빠른, 푸후…! 빠른데?!”

“…….”

손을 꽈악 쥐어오며, 온전히 자신에게 의지해오는 도지혁의 모습에 어딘가 간질간질한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버리면….’

세상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도지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내, 내가 무슨 생각을…!’

방한나는 천성이 그러질 못했다.

“…조,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이내 못된 생각을 모두 날려버리고 말았고,

잘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정성스레 수영을 가르쳐주었다.

*

단합회도 모두 끝이 나고, 어느덧 찾아온 여행 당일.

약속 시간보다 공항에 먼저 도착해있던 나는, 지난 단합회에서 찍은 사진들의 반응을 살피며 임아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꽤 반응이 좋네.’

그러던 그때,

“지혁아…!”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왔다.

임아린의 목소리였다.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고,

마치 강아지처럼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쪼르르 달려오는 임아린의 모습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는데….

‘…와….’

평소보다 더더욱 예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많이 기다렸지…!”

하나로 모아 예쁘게 묶어 내린 은색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

꽃무늬가 촘촘히 박힌 검은색 원피스에 은근히 드러난 각선미를 강조해주는 낮은 힐까지.

사랑스러움과 성숙함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예쁘네.”

“으, 응…? 갑자기…?”

임아린은 뜬금없는 칭찬에 살짝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수줍은 말투로 조심스레 되물어왔다.

“지, 진짜 예뻐…?”

“진짜 다시 반할 뻔했어.”

그녀는 직접적인 칭찬에 쑥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은근슬쩍 팔을 얽혀왔고,

“느, 늦겠다…! 어서 가자…!”

다짜고짜 얼버무리며 나를 잡아당겼다.

‘진짜 너무 귀엽네.’

누구 여자친구인지 몰라도, 아마 남자친구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벌써 막 설레!”

“제주도를 그렇게 다녔는데도 설레?”

“응! 아예 나중엔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

“그것도 나쁘진 않지. 예쁜 집 짓고…, 마당도 만들고.”

“맞아! 귤도 키우고!”

우리는 시간에 맞춰 수속을 밟고 탑승 게이트로 넘어가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탑승 과정에서 승무원들이 임아린을 알아보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들킨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어서,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 손님 여러분,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좌석 벨트를…… ]

그렇게 드디어 도착한 제주도.

“사람이 꽤 많네….”

“그러게. 오늘 임아린 제주도 왔다고 다 소문나는 거 아냐?”

“앗…. 그럼 어떡하지…?”

“나쁜 짓 하러 온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안 할 거야?”

“…어?”

“…난 할 거 같은데?”

“…몰라.”

“헤헷….”

짐을 찾고 빌린 차를 공항에서 수령한 우리는, 곧바로 제주도에 올 때마다 꼭 들르는 로컬 맛집으로 차를 몰았다.

“우움…. 너무 맛있어…!”

“우리 여기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지?”

“아마…. 한라산 게이트 토벌하고…?”

“한라산 게이트도 거의 2년전 아냐?”

“앗, 맞아…! 우와…. 그럼 벌써 2년이나 된 거야…?”

“꽤 오랜만에 오긴 했네.”

이번 여행은 무려 2박 3일짜리 여행이다.

월요일 오후에는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자마자 출근길에 오를 예정인데….

2박 3일동안 딱히 정해진 일정은 없었다.

미리 정해놓은 거라곤, 점심을 먹고 장을 봐서 펜션으로 가는 게 전부.

평범한 여행이었다면, 평소에 가보지 못했던 곳이나 가보고 싶은 곳을 쭉 돌았겠지만….

오늘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일부러 일정을 짜지 않았다.

“사고 싶은 거 있어?”

“마실 거! 마실 거 많이 사자…!”

“술도 살까?”

“…술 필요해…?”

“어?”

“…나, 나는…. 안 마시고 싶은데….”

“…그럼, 오늘은 사지 말자.”

우리는 평소엔 잘 먹지 않던 간식거리와 인스턴트 음식들을 왕창 집으며 한 번에 2박 3일짜리 장을 보았다.

제주도까지 놀러 와서 살만한 양은 아니었으나….

그 누구도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여기가 마지막 편의점인가…?”

“아마?”

“아! 그러면 저기 잠깐 들르자…!”

“편의점? 왜?”

“어? 그…. 마, 마실 걸 안 사서…!”

“마실 거? 우리 엄청 많이 샀….”

“아, 아무튼 세워줘…!”

임아린은 필요한 걸 금방 사오겠다는 말과 함께 홀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바다 예쁘네.’

그사이 나는 별생각 없이 차창 밖으로 드리워진 풍경을 감상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덜컥─

“사, 사왔어…!”

이윽고 임아린은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채로 돌아왔고,

부스럭─ 부스럭─

“어, 어서 가자…!”

마치 내게 물건을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허겁지겁 봉투를 뒷좌석으로 치워버렸다.

“뭐 사왔어?”

나는 백미러에 비친 불투명한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어…. 그, 그냥, 소화제 같은 거…!”

임아린은 묘하게 필사적인 말투로 해명해왔고,

“소화제…?”

뜬금없는 상비약의 등장에 작은 의문을 품은 순간.

부스럭─

불안하게 내던져진 봉투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내용물이 살짝 드러나고 말았다.

[ 0.01…… ]

흰색 상자에 쓰인 의미심장한 숫자.

‘저건….’

나는 임아린이 무엇을 바리바리 사왔는지, 왜 자꾸 부끄럽다는 듯 말을 돌렸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아으….”

얼굴을 감싸며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모르는 체하며, 조용히 차를 몰아 숙소로 향했다.

“…….”

그렇게 드디어 도착한 숙소.

“…숙소 좋네.”

“…그, 그러게….”

“잘…, 예약한 거 같아.”

“…으, 응…. 고마워….”

우리가 독채로 빌린 펜션은 이혜리의 말대로 다른 숙소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러 명이 지낼 수 있도록 설계한 듯, 꽤 여러 가지 방이 존재했는데….

우리는 수많은 방을 놔두고, 자연스럽게 같은 방으로 들어섰다.

“…짐은 여기다 둘게.”

“으, 응…!”

그리고는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말을 꺼냈다.

“먼저 씻어.”

“머, 먼저 씻어…!”

아무래도 내내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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