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이어진 단합회.
각자의 시간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세상에….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고기에, 랍스터에…. 저건 트러플인가?”
“그냥 고기만 먹긴 좀 아까울 거 같아서, 살짝 힘 좀 써봤어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양하게 챙겼으니까, 맘껏 먹어요.”
당초 예정돼있던 바비큐는 이혜리가 준비한 케이터링과 합쳐져 꽤 호화로운 메뉴로 바뀌어버렸고,
“우와…. 나래 언니! 이것 좀 봐요! 서원이랑 와인이랑 나이가 같아요…!”
“서원이가 스무 살이니까…. 그럼 엄청 비싼 거 아닌가…?”
“어. 그런 건가…?”
널찍한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 함께 축배를 들었다.
““짠!””
“잘 먹겠습니다!”
“감사히 잘 먹을게요! 단장님!”
“뭐부터 먹을까…!”
“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뭘 먹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고기. 맛있어.”
그렇게 모두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이.
“…….”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혜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안 먹어?”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내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왔고,
“…먹어야지.”
지조를 지키기로 했던 나는,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마음먹으며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서, 서원아…! 술은 천천히 마셔야지…!”
“…왜?”
“얘 취한 거 같은데….”
점점 무르익는 단합회의 밤.
“우리 도 프로듀서! 한잔해야지!”
어느새 술기운이 오른 듯, 김준형이 불그스름한 얼굴로 다가와 내게 술을 권해왔다.
“자, 빨리. 술잔 딱 대!”
좋은 날이기도 하니, 웬만하면 순순히 받아주려고 했는데….
“이거 보드카잖아.”
하필 50도가 넘는 보드카를 들고 와서 깽판을 부리기 시작했다.
“보드카는 술 아니야?! 지금 이혜리 단장님께서 직접 준비해주신 술이 싫다 이거야!? 어!?”
“어머. 그런 거야?”
장난스레 한마디를 덧붙이며 은근슬쩍 거드는 이혜리.
하지 말라는 의미로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던 그때, 기회를 엿보던 김준형이 멋대로 내 잔에 보드카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한잔만 해!”
“야, 잠깐…. 아, 그만 부어…!”
“어어! 흘린다! 가만히 있어!”
김준형과의 대작은 짧고 강렬했다.
와인으로 가볍게 예열해둔 입안은 순식간에 강렬한 알코올로 뒤덮여 얼얼해지고 말았고,
“후우….”
“크으…. 이게 술이지!”
나는 적당히 받아주고 뺄 요량으로 단숨에 해치워버렸다.
그런데….
“으…. 맛없어.”
“자. 나랑도 한잔해야지?”
“…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혜리도 자연스레 대작에 참여해왔다.
“왜. 내 건 받아주기 싫어?”
“와, 진짜 나빴다 도지혁…! 먹을 거 다 먹고, 입 싹 닦겠다 이거야?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아니, 내가 싫은 건 아닌데. 적어도 도수라도 좀 낮은 걸로….”
“난 위스키가 좋아.”
이혜리는 나름 신경을 쓴 듯, 짧은 샷 잔에 40도짜리 위스키를 부어 건네주었다.
차라리 큰 잔에 얼음이라도 섞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푸하….”
이혜리와 동시에 술잔을 비우고, 뜨거워진 입안을 식히고자 물을 마시려는 찰나.
“프로듀서님! 저도 낄게요!”
“…네?”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어느새 기다리고 있던 한규리가 대뜸 술병을 들이밀어 왔다.
“자아 자아. 와인은 괜찮으시죠?”
“아니, 일단 물 좀….”
“여기.”
“아, 고맙…. 이거 술이잖아, 미친 새끼야!”
보드카 병을 들고 깔깔거리는 김준형과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리는 이혜리.
그 와중에 한규리는 가득 채운 와인잔을 내게 들이밀어 왔다.
“일단 이거부터 드시죠?”
“저, 규리 씨. 무슨 와인을 이렇게 무식하게….”
“네? 제가 무식하다고요?”
“…취했어요?”
“우우우우! 도지혁! 나빴다!”
“이건 좀 논란이 있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프로듀서님! 저도 마실 거니까, 어서 쭉 마시세요!”
“그래! 빨리 마셔야 차례가 돌지!”
좌규리. 우준형.
이혜리는 두 사람을 대동한 채로 간교한 미소를 지으며 찰랑거리는 와인 잔을 건네왔다.
“마셔야겠지?”
“너….”
나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한규리와 김준형은 이미 이혜리와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셋이 모여 나를 상대하겠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
“그래! 오늘 다 죽어보자!”
냉큼 잔을 받아 든 나는, 보란 듯이 와인을 입가로 가져갔고,
“후우…. 오늘 다 죽었어. 술 가져와!”
본격적으로 술 대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
그날 밤.
“으으….”
연락을 핑계로 술판에서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온 나는, 미리 챙겨둔 백일 제약의 용한 숙취 해소제를 삼키며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미친 인간들…. 진짜 다 미쳤어….”
한규리와 김준형을 대동한 이혜리는 죽음의 삼각 로테이션을 선보이며 내게 고도수 알코올 공격을 시도해왔는데,
나중엔 멤버들까지 끼어들며 그야말로 개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난 모르겠다….’
웬만하면 팀원들을 챙기겠지만, 오늘은 내 한 몸조차 가누기도 힘든 수준.
조금만 더 마시면 필름이 끊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다.
“으….”
그렇게 푹신한 침대에 발랑 누워, 멍하니 약효가 퍼지는 걸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벌컥─
갑자기 누군가 방안에 들어왔다.
“…자요?”
누군가 했더니, 진서원이었다.
당연히 그녀가 밖으로 불러내러 왔다고 생각한 나는, 애써 발음을 신경 쓰며 말을 건넸다.
“아직 안 자는데…. 혹시 밖에서 나 찾아?”
그런데.
“…다 들어갔어요.”
진서원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마침내 지옥의 술자리가 끝났음을 알려왔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나는 둔해진 몸을 채찍질하며 천천히 일으키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대 근처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응시해왔고,
스윽─
그대로 가까이 다가와, 침대 끝에 슬쩍 걸터앉으며 알 수 없는 말을 꺼내왔다.
“…재워줘요.”
“…어?”
둔해진 감각 덕에 반 박자 느린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길 잠시.
풀썩─
진서원은 어느새 몸을 뉘곤, 마치 어서 재워달라는 듯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나는 그녀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애초에 제정신인 건지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술 많이 취했어?”
진서원도 꽤 취하긴 한 것 같았다.
뽀얗던 얼굴은 이미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지 오래였으며, 말려 올라간 티셔츠 사이로 아랫배가 살짝 드러난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뇨.”
그러나 진서원은 절대 취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멀쩡한 상태임을 강조해왔다.
원래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법.
평소 그녀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술기운이 올라 어리광을 부리러 온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친한 언니가 죽었다는 이유로 인류 최악의 흉악범이 될 뻔한 진서원이다.
그만큼 정에 약한 아이인데, 그동안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겠는가?
그녀의 상태를 참작하며 뭉쳐놓은 이불을 붙잡은 나는, 오늘만큼은 그녀의 바람을 이뤄주고자 이불을 펴주며 당부했다.
“오늘은 재워줄 테니까, 다음부턴 언니들이랑 자. 알았지?”
“…….”
하지만 진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륵─
진서원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몸을 뉘인 나는, 머리맡에 설치된 버튼을 조작하여 전등을 끈 직후에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남녀.
프로듀서와 멤버.
진서원과 나.
‘…이거 오해받는 거 아냐?’
마냥 진서원을 아이처럼 생각해서 인지하지 못했는데, 제3자가 보기엔 매우 의심스러운 그림이었다.
‘…잠들면 나가야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뺄 순 없기에 풀썩 몸을 눕혀버린 나는, 슬슬 취기가 사라지는 걸 느끼며 넌지시 말을 던져보았다.
“서원아. 오늘 재밌었어?”
“…네.”
“재밌었으면 다행이네. 지금처럼만 열심히 하면, 아마 오늘 같은 기회가 많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들을 들려주었다.
‘천마’라는 변수는 몇 번이고 조심해도 부족했기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팀원들이랑 내가 있으니까, 언제든지 의지하고.”
“…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인생에 비관하는 걸 막고자 여러 가지 보험들을 욱여넣었다.
‘…또 무슨 말을 해줄까.’
그렇게 재미없는 말들로 진서원의 혼을 쏙 빼며 자연스레 졸음을 불러일으키던 그때.
문득 진서원이 고개를 돌리며 슬쩍 눈을 마주쳐왔다.
“…저기.”
어스름한 그림자 속 조용히 번뜩이는 갈색 눈동자.
평소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담담한 눈빛이 아닌, 묘하게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프로듀서님은, 저 좋아해요?”
“…응?”
뜬금없는 물음에 살짝 당황했던 나는, 이내 차분함을 되찾으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좋아하느냐.
당연히 Love의 의미는 아닐 테고….
아마 Like의 의미를 뜻하겠지.
그런 의미라면, 매우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조금 깨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말도 잘 듣고 귀여운데, 심지어 능력까지 출중한 아이를 대체 누가 싫어하겠는가?
“난 또 뭐라고…. 당연히 좋아하지.”
나는 이참에 호감도를 팍팍 올려놓고자, 조금 과장을 보태어 대답했다.
“솔직히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어. 물론 아니었어도 좋아했겠지만. 내가 우리 팀 에이스를 어떻게 싫어하겠어?”
은근히 선을 그으면서도 확실히 호감을 표출한, 아주 적절한 대답이었다.
“…….”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진서원은,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눕곤 묘하게 흥미진진한 말투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럼.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오빠?”
진서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기대의 시선을 보내왔고,
“음….”
나는 대답을 재는 척, 어디까지 선을 미뤄줘도 괜찮을지 가늠해보았다.
‘오빠라….’
사실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다.
나야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엔 개인적인 감정이 섞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괜한 일로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되는 건 정말 최악의 케이스다.
하지만….
상대는 진서원.
가족도 모두 잃고,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상경한 아이다.
다행히 팀에 잘 녹아들어 딱히 외로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술에 힘까지 빌려 가족의 일종인 ‘오빠’라는 호칭까지 요청해오는 걸 보면, 조금 더 긴밀한 관계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김나래나 방한나면 몰라도….
진서원에게는 조금 더 관대해져도 괜찮으리라.
“그래, 그럼. 오빠라고 불러.”
“…진짜요?”
흔쾌히 떨어진 허락이 믿기 어려운 듯, 조심스레 되물어오는 그녀.
나는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슥─ 넘겨주며 확신과 함께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오빠라고 부르고 싶으면, 오빠라고 불러도 돼. 그 대신…. 단둘이 있을 때만 오빠라고 불러.”
“…왜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팀원들하고 너무 가까워지는 건 피하고 있거든.”
“…그럼 저는요?”
“너만 특별히 허락해 준 거야. 지금 이야기한 건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네.”
“자, 약속.”
“…약속.”
진서원은 둘만의 비밀에 생긴 것이 썩 기쁜 듯 드물게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여왔고,
“이제 잘까?”
“…응…. …오빠….”
그녀는 드물게 부끄러워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곤 금세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스으─ 스으─
‘…잠들었나?’
그렇게 진서원이 푹 잠들기만 기다리길 얼마나 기다렸을까.
스으윽…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온 나는,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섰다.
“후….”
아직은 선선한 밤 공기를 음미하며 숙소 내부를 천천히 거닐고 있던 그때.
첨벙─ 첨벙─
수영장 쪽에서 물 첨벙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누가 수영하고 있나?’
나는 별생각 없이 수영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고,
촤아악─
물속에서 빠져나와, 머리카락을 넘기는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한나야?”
“어…! 프로듀서님…!”
방한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