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탓일까.
“…저, 정말…? 잘됐다…!”
도지혁은 왠지 모르게 임아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 바로 할 수 있대? 바로 받을 수 있는 거야…?”
그러나 임아린은 마치 제 일인 것처럼 매우 기뻐하고 있었고,
도지혁은 이내 자신이 착각했으리라 생각하며 차분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바로는 아니고, 지금 한창 막바지 테스트 중이라, 아마 그거 다 끝나고 할 수 있을 거 같아. 대충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원작 소설 ‘최강고수’에서 세 번째 사건이 벌어지는 건 지금으로부터 약 4개월 후.
이미 두 번째 사건으로 원작과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으나, 도지혁은 많아 봐야 주 단위로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원작에서도 워낙 스케일이 큰 침공이니, 오히려 미뤄지면 미뤄졌지, 더 작은 규모로 쳐들어오진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세달이면 충분하겠지.’
도지혁은 최대한 빨리 자신의 다리를 고쳐, 직접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마왕군의 침공을 막고, 해피 엔딩을 맞이하겠다는 목표를.
물론 주인공인 설주희와 관계가 틀어진 상황이라 함께 싸울 순 없겠지만….
도지혁은 자신의 위치에서 세계 멸망과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정말 다행이다…!”
임아린에겐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아린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길이 없던 도지혁은, 수저를 내려놓곤 임아린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다정히 말했다.
“이제 나 때문에 마음고생 안 해도 돼.”
도지혁은 그녀가 여전히 과거의 일에 얽매인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과거의 실수에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자신의 헌터 데뷔를 가로막은 것에 크나큰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유독 잘해주었다고.
도지혁은 임아린이 내비친 사랑 속에 미안함이 섞인 게 싫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오로지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비로소 서로의 마음에 얹힌 과거의 굴레를 깨부수고자 했다.
“내가 헌터로 데뷔하지 못한 건 분명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그 덕분에 프로듀서로 성공하게 됐고, 덕분에 너랑 이렇게 앉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지혁아….”
“그러니까, 이제 다른 생각은 하지 마. 알았지?”
“…응….”
도지혁은 임아린의 대답에 생긋 웃어 보이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
무슨 생각인지, 임아린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
이혜리의 집.
“흐응…. 많이도 해먹었네….”
서재에 앉아 비서로부터 정기 보고를 받던 이혜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태블릿을 넘겼다.
“작은 건도 자잘하게 여러 번 나눈 것이, 아무래도 꽤 공을 들인 모양입니다.”
“다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참 쓸데없는 곳에 힘을 빼네요.”
그녀가 보고 있던 건 어느 기업이 저지른 비리에 관한 보고서.
무려 천화 그룹에 관한 문서였다.
“이거, 보도자료는 얼마나 준비됐죠?”
“2차 보도까지는 모두 준비가 되었고, 그 이후는 아직 정리하고 있습니다.”
“3차에 다 쏟아붓도록 하세요. 길어지면 괜히 시간만 주는 꼴이니까.”
“알겠습니다.”
간단히 지시를 내린 이혜리는 다음으로 도지혁에 관한 자료를 확인해보았는데….
“으음?”
보고서 속 사진을 확인하곤, 살짝 의아한 반응과 함께 비서를 흘끔 쳐다보았다.
“지혁이가 백유진을 만났어요?”
“예. 길드 쪽엔 따로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서울시청 쪽으로 연락이 간 것 같습니다.”
“백유진이라….”
이미 사교 모임으로 그녀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던 이혜리는, 그녀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가 영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기에.
무엇보다, 항상 연기하는 듯한 특유의 가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일 길드 이름으로 불렀을 리는 없고…. 아마 그룹 이름으로 불렀겠죠?”
“예. 굳이 그룹 사옥에서 만난 걸 보면, 백일 길드와 선을 그었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명분을 만들어주겠다. 이건가…?”
이혜리는 백유진의 속셈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팀 서울시청 소속이라는 도지혁의 중립적인 신분을 노리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무언가 제안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딱히 그녀의 행동에 태클을 걸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도지혁은 아직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지혁이가 넘어갔을까요?”
“어…. 그것이….”
비서는 이혜리의 말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
그러자 이혜리가 의아한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비서는 면목이 없다는 듯 태블릿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음 장을…, 보시면 알 것 같습니다.”
다음 장.
그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침을 꼴깍- 삼킨 이혜리는, 조심스레 손을 옮겨 보고서를 넘겨보았다.
스윽-
그리고.
“하….”
너무나 선명히 찍힌 노골적인 사진에 무심코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이른 새벽, 거의 끌어안다시피 서로를 부축하며 차 속으로 들어가는 사진 속 두 사람.
누가 봐도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간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혜리는 조용히 보고서를 휙휙 넘기며 도지혁이 곱게 집으로 들어갔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곤, 태블릿을 툭- 내려놓으며 물었다.
“김 비서. 남자친구가 몰래 다른 여자랑 놀아났다는 걸 알면 어떨 거 같아요?”
“자르거나, 패서 고치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이혜리는 그녀의 살벌한 대답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슬쩍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자료는 임아린한테 보내세요. 지금은 그쪽이 여자친구니까…. 알아서 잘 대처할 거예요.”
“익명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아뇨, 제 이름으로 보내세요. 아군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되잖아요?”
“알겠습니다.”
*
얼마 후.
곧이어 시작된 팀 서울시청의 두 번째 게이트 토벌 준비.
우리는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도전할 게이트에 대해 교육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게이트는 가평에 위치한 B급 게이트. 메마른 협곡으로 이뤄진 곳이야. 이런 지형의 특징이 뭐가 있지?”
“엄폐물이 적습니다!”
원래라면 훨씬 더 이르게 시작됐어야 했으나, 첫 번째 목표였던 ‘어그로 끌기’를 매우 성공적으로 이룬 덕분에 살짝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맞아. 몸을 숨기기가 어려워서, 관악산 때처럼 은밀히 기동하는 게 불가능해. 한나가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 지형에선 어떻게 전개하는 게….”
그런데.
“서원아…. 어서 일어나…!”
“…으, 으응…?”
‘또 졸았구나.’
진서원이 교육 내내 조는 탓에 영 진도를 못 나가고 있었다.
“서원아. 많이 졸리면, 좀 쉬었다 할까?”
“…괜찮아요.”
내 물음에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대답해오는 그녀.
아무래도 조금 쉬었다가 해야 할 것 같다.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쉬었다가 하자. 나래는 서원이 좀 데려가서 커피 좀 먹여 줄래?”
“아, 네.”
“…쓴 거 싫은데….”
“언니가 시럽 타줄게.”
“그럼, 20분 뒤에 다시 모이자.”
““네!””
그렇게 세 사람을 뒤로한 채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재빨리 메시저를 확인해보았다.
[ ㄱ아린이♥ : 여기는 어때? 바다도 보이고, 방도 엄청 좋아! https://nove……]
바로 조만간 있을 임아린과의 여행 때문이었다.
백유진과의 만남 이후.
임아린은 전보다 더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마 더는 거리낄 이유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녀는 내게 다음 토벌 휴가를 낀 주말에 맞춰 제주도 여행을 제안해왔고,
나는 슬슬 때가 됐음을 직감하며 순순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나 : 방 예쁘네. 그럼 숙소는 여기로 예약할게. ]
그렇게 답장을 보내두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프로듀서님! 마침 잘 오셨어요!”
무슨 일인지, 한규리가 나를 찾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이번 토벌 끝나면, 단합회라도 하는 게 어떤가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요!”
“…단합회요?”
한규리는 자신의 모니터를 보여주며 간단하게 정리한 단합회에 대해 설명해왔다.
“저희 이번 토벌 날짜가 딱 목요일이잖아요! 그래서 목, 금으로 1박 2일 단합회 같은 걸 하면 좋지 않을까 해요!”
아무래도 게이트가 가평에 위치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인 것 같았다.
“음….”
“혹시 일정이라도 있으세요…?”
임아린과 제주도로 떠나는 건 그 다음 날인 토요일.
일정 자체엔 큰 문제가 없었다.
“아뇨. 따로 일정은 없는데…. 설마, 금요일에 출근하기 싫어서 급하게 짠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레 거짓말을 하는 한규리.
공무원인 그녀와 김준형에겐 토벌 휴가가 적용되지 않기에, 일부러 금요일에 맞춰 일정을 짠 게 확실했다.
“애들은 알아요?”
“점심시간에 물어보려고요.”
“그럼 그냥 제가 조금 이따가 물어볼게요.”
“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한규리는 이미 멤버들의 허락을 받은 것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 후보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나는, 묘하게 고급스러운 후보군에 살짝 의문을 품었다.
‘예산을 꽤 크게 잡은 거 같은데….’
이제 막 발걸음을 뗀 팀 서울시청의 모든 활동은 100% 외부 지원으로 운영된다.
단합회를 가는 것도 모두 돈인데, 대체 어느 예산을 건드리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근데 이거, 예산은 어디에서 당겨옵니까?”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슬쩍 질문을 내던졌고,
“그게, 이번에 세진에서 단합회 신청받고 있더라고요.”
그녀는 세진 길드에서 진행하는 부서별 단합회에 슬쩍 끼어드는 거라고 설명해왔는데….
“저희도 보내준대요?”
“사실 그거 때문에 준형 씨가 단장님 뵈러 갔어요. 아까 물어보니까, 단장님이 직접 호출하셨더라고요.”
“…이혜리요?”
예상치 못한 이혜리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뭐 협의할 게 있으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글쎄요….”
그렇게 의문을 품으며 한규리와 짧게 담소를 나누던 그때.
벌컥-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이혜리를 만나러 갔던 김준형이 돌아와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 단합회 간다!”
“와아!”
설마 했던 단합회 참가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이혜리가 별말 안 했어?”
“뭐? 이혜리 단장님이 네 친구냐?”
“친구 맞는데.”
“어허! 우리 단장님이 겨우 푼돈에 딴지 걸 분으로 보이느냐?! 무엄하다!”
“와! 단장님 최고!”
김준형과 한규리는 일을 쉴 생각에 그저 기쁘기만 한 듯 싱글벙글 축배를 들었고,
‘굳이 불러놓고 그냥 보냈다고…?’
나는 이혜리가 곱게 내줬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바비큐도 해야겠죠?”
“고기는 누가 굽는데요?”
“준형이가 고기는 또 잘 굽죠.”
“그래, 기분이다…! 고기는 제가 구울 테니, 한우로 준비합시다!”
그렇게 도란도란 단합회에 대해 떠들길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튼 애들한테 물어보고 알려 드릴게요.”
“네! 꼭! 긍정적인 대답을 받으셔야 해요!”
어느덧 휴식 시간이 끝나, 다시 강의실로 돌아가려는 찰나.
“아, 맞다. 지혁아!”
한규리와 시시덕거리던 김준형이 나를 붙잡더니, 마치 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무심한 한마디를 덧붙여왔다.
“우리 단합회 할 때, 단장님도 잠깐 들르신다 하더라.”
“…뭐?”
그럼 그렇지, 이혜리가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