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66화 (66/165)
  •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은근히 풍겨오는 고급 일식당.

    “한잔 더 괜찮으시죠?”

    협의를 멈추고 함께 자리를 옮긴 나는, 백유진으로부터 접대를 받고 있었다.

    쪼르르륵─

    서로의 잔에 채워지는 맑은 술.

    잔을 거두어 입안에 흘려내자, 기분 좋은 알싸함이 입안에 남아있던 희미한 비릿함을 닦아주었다.

    “…후우….”

    슬슬 치고 올라오는 취기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슬쩍 잔을 내려놓은 나는, 맞은편에 앉아 술을 홀짝이는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하나도 안 취한 거 같네.’

    원래 잘 드러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취하지 않은 건지.

    대충 한 병은 넘게 마신 거 같은데, 백유진은 조금도 취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의 물도 안 마시던 거 같은데….’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다르게 술이 센 것 같았다.

    “벌써 취하신 건 아니죠?”

    그때, 백유진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살짝 취기가 오르네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너스레를 떨자, 그녀도 쿡쿡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실 저도 오랜만에 마시는 거라 그런지, 조금 힘들어요.”

    “아직 멀쩡해 보이시는데요?”

    “정말이에요. 저희 집안사람들이 보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 걸요?”

    그녀는 집안 대대로 술에 매우 강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다던 집안 이야기를 꺼내왔다.

    “저희 백 씨 집안 어른 중에, 위스키 한 병으로 남편을 얻은 분이 계셨다고 해요.”

    “술로요?”

    “둘이서 밤새 한 병을 다 비우고…, 뭐. 그렇고 그랬다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듣기만 해도 속이 다 메슥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분도 저처럼 흰머리에 붉은 눈을 타고났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저는 그분 피를 덜 받았나 봐요.”

    긴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흰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문득 그녀가 읊어 준 이야기 속 남성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괜히 눈에 힘을 준 나는, 술 대신 시원한 물을 홀짝이며 슬쩍 운을 띄웠다.

    “그래서…, 아까 하시려던 말씀은 언제 해주시는 거죠?”

    그러자.

    백유진이 눈을 흘기며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자못 새초롬한 표정을 짓곤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대답해왔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어머, 제가 김칫국부터 마신 건가요?”

    살짝 놀란 체를 하던 그녀는 내리깐 시선을 옮겨 슬쩍 눈을 마주쳐왔고,

    나는 대놓고 대답을 유도하는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무심코 미소를 흘리며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닐 수도 있죠.”

    그러자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백유진.

    그녀는 오랜만에 물 잔을 들어 입을 살짝 축이곤, 마침내 본론에 대해 말을 꺼내왔다.

    “저희 그룹이 제약으로 유명한 건 아시죠?”

    “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백일 그룹의 주력 사업인 백일 제약은 오래전부터 남성용 피임약으로 큰돈을 벌어왔다.

    현재는 게이트에서 나온 부속물들로 여러 가지 아이템과 신약을 개발하고 있으며, 나도 한때는 백일 제약의 진통제를 애용했었다.

    “이번에 저희 쪽에서 개발한 신약이 있는데…, 아마 지혁 씨한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어떤 약이죠?”

    그녀는 팔짱을 꼬더니, 우아하게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혹시 애벌레가 어떤 식으로 나비가 되는지 아시나요?”

    “애벌레요?”

    “예전에 어떤 학자가 연구한 건데, 애벌레는 자신의 몸을 녹여서 번데기가 되고,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몸을 재구성해서 나비가 된다고 해요. 신기하죠?”

    백유진은 자신들이 개발하고 있는 약이 그런 약이라고 이야기해왔다.

    요컨대, 인체의 한 부분을 다시 재구성하는 약이란 뜻이었다.

    ‘…인체의 한 부위를 재구성….’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간다.

    테이블 밑의 다리를 흘끔 쳐다본 나는, 잔잔히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꺼내보았다.

    “뼈나 근육을 아예 녹여버린다는 건데…. 너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하죠. 그래서 부작용을 줄이려고 엄청난 연구비를 쏟았고요.”

    “그렇다는 건….”

    “부작용은 약 9%. 시중에 파는 약하고 비슷한 수준이에요.”

    부작용이 9%.

    절대적으로 안전한 수치는 아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내 다리를 제대로 고칠 수 있다고…?’

    아카데미 시절, 임아린과의 훈련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던 내 다리는,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금방 고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상태로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라, 앞으로 전투는 피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고,

    하필 신체 능력으로 부족한 능력을 커버하던 나에겐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물론 아예 포기하진 못해서 꾸준히 재활과 훈련을 반복한 덕분에 지금은 짤막한 전투 정도는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다시 부상을 입으면 그땐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실전에선 영 힘을 못 쓰고 있는 상황이다.

    “다리까지 나으면, 정말 헌터 데뷔도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저희 길드가 남성 팀 전문인 건 아시죠?”

    “헌터라니…. 저는 프로듀싱만 해도 충분합니다.”

    “S랭크까지 이겨놓고 아쉽지도 않으세요?”

    최효민과의 대련을 에둘러 언급하는 그녀.

    이미지를 위해 세진에서 숨겨온 내용이었는데, 아무래도 소문은 막을 수 없던 모양이다.

    “운이 좋아서 이긴 걸로 착각했다간 큰코다칩니다.”

    “신중하시네요?”

    백유진은 후후 웃으며 내 술잔을 채워왔고,

    나는 병을 건네받아 그녀의 잔을 채워주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으음….”

    백유진이 살짝 고민하는 척 대답을 질질 끌더니,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잔과 함께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원래는 깔끔하게 딱 거래만 하려고 했는데…. 막상 직접 뵈니까 또 다른 욕심이 생기네요.”

    코 끝에 스치는 은은한 향기.

    무슨 향수라도 뿌린 건지, 백유진의 체취는 둔한 감각을 뚫고 뇌리에 꽂혀왔다.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하는 건가요?”

    백유진은 은근슬쩍 몸을 붙이곤 흘끔 올려다보며 나를 유혹해왔다.

    평소라면 단호하게 끊어냈겠지만….

    원만한 관계를 위해 조금 받아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스윽─

    자연스레 그녀의 얇은 허리에 손을 두른 나는, 찰랑거리는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오늘만 봐 드리죠.”

    “오늘만이요?”

    “아닐 수도 있고요.”

    백유진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슬쩍 술잔을 들이밀어 왔고,

    쨍─

    우리는 조금 더 진중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다음날.

    “으…. 머리야….”

    꼭두새벽까지 백유진과 술을 마시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짧은 숙면을 취하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뭔 술을 그렇게 잘 마셔….’

    백유진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술고래였다.

    술이 강한 게 집안 내력이라고 하더니, 정말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운전 못 하겠는데….”

    이대로 가다간 본의 아니게 음주운전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진지하게 오전 반차를 낼지 고민하며 미리 사둔 숙취 해소제를 까고 있었는데….

    우우웅─ 우우웅─

    한창 충전 중이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이른 아침에 누구지?’

    나는 별생각 없이 병을 내려놓곤 휴대폰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

    화면에 떠오른 그 이름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 ㄱ아린이♥ ]

    아린이었다.

    ‘버, 벌써 일어났나?’

    백일 그룹 관계자와의 술자리는 이미 사전 보고를 마친 후.

    혹시 몰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증샷과 함께 메시지를 남겨놓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남겨둔 메시지를 보고 깨자마자 전화한 모양이었다.

    꿀꺽─

    괜히 거짓말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살짝 긴장한 나는, 짧게 심호흡을 내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지혁아…! 혹시 지금 출근했어?! ]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묘하게 다급한 임아린의 목소리.

    마치 어느 건물 복도에서 전화하는 것처럼 살짝 울리는 느낌이었다.

    “아직 안 했지. 안 그래도,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전에 쉴까 하던 참이야.”

    [ 아, 그렇구나…! 그래, 힘들면 쉬어야지…! ]

    임아린은 정말 다행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내게 공감을 해주었다.

    그런데.

    [ 마침 잘 됐다. 그럼 문 좀 열어 줄래…? ]

    “…어?”

    뒤이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 너 주려고 해장국을 조금 끓여왔거든…! ]

    “…뭐라고?”

    그 순간.

    띵동─ 띵동─

    집안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 띵동─ 띵동─ ]

    공교롭게도, 스피커 너머에서 똑같은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

    화들짝 놀란 나는 다급히 현관으로 나가보았다.

    삑─ 삐리릭─

    그리고는 재빨리 잠금을 풀어, 현관문을 열어보니….

    벌컥─

    여느 때처럼 사랑스럽게 치장한 그녀가 문틈으로 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를 건네왔다.

    “지혁아…!”

    정말로 우리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아, 아린아….”

    “속은 좀 괜찮아…? 밥은 먹을 수 있겠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부를 물어오는 그녀.

    해장국을 끓여왔다는 게 빈말이 아닌 듯, 한 손에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는데….

    “…그건 뭐야?”

    “아. 이거? 해장국이야…!”

    “…해장국…?”

    “응! 네가 새벽에 메시지 보내 준 거 확인하고, 바로 끓여왔어…!”

    “…어?”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으며 또다시 나를 놀래키고 말았다.

    내가 집에 도착하여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새벽 5시.

    지금이 아침 7시 20분이니….

    즉, 새벽까지 메시지를 기다린 뒤에 아침을 준비해왔다는 말이다.

    “내, 내가 너무 부담스러운 짓을 했나…?”

    그때, 임아린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정말로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했던 건지, 내 미묘한 반응을 보고 겨우 알아챈 느낌이었다.

    “아, 아냐! 부담스럽긴. 이렇게 챙겨주면 나야 좋지!”

    “그, 그런가…?”

    얼마 전 그녀가 보여온 발작을 떠올린 나는, 괜히 기죽을까 싶어 더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이렇게 챙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네가 무리한 건 아닐까 하고 걱정돼서 그렇지.”

    “히힛. 나는 괜찮아…!”

    “…그래. 얼른 들어가서 먹자.”

    그렇게 적당히 얼버무리며 그녀를 집안으로 들인 뒤.

    임아린이 잠시 손을 씻으러 간 사이, 준비해온 아침 식사를 차리던 나는, 조용히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니…. 이건 또 왜 이렇게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하나같이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밖에 없어서 그런지, 없던 식욕도 생겨났다.

    “지혁아…!”

    그때, 손을 씻고 돌아온 임아린이 슬쩍 질문을 건네왔다.

    “혹시 향수 새로 샀어…?”

    뜬금없는 향수에 관한 질문이었다.

    “응? 향수? 안 샀는데?”

    “아…. 그래…?”

    “갑자기 왜?”

    “아니, 그냥…. 빨래 바구니에서 웬 좋은 향기가 나서.”

    “빨래 바구니…?”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어젯밤의 기억.

    ‘무슨 향수 쓰세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좋죠?’

    ‘진짜요? 되게 잘 만들었네.’

    ‘가까이 대고 맡으면, 복숭아 향기도 나요.’

    ‘그래요? 그럼….’

    아무래도 백유진을 접대하던 과정에서 묻은 향수가 아직도 남아있던 모양이다.

    “…잘 모르겠네.”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슬쩍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러자.

    “꼭 여자 향수 같았는데…. 어제 여자랑 술 마셨어…?”

    임아린이 대뜸 날카로운 질문을 날려왔다.

    주룩-

    조금 낮아진 톤에 맞춰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임아린은 명백히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치, 침착하자….’

    여기서 당황하여 거짓말을 하는 건 하수.

    사실대로 말하되, 애매하게 뭉뚱그려 말해야만 한다.

    “내가 말 안 했나? 거기 이사가 여자였는데…. 아. 그 사람 중간에 향수 뿌리더니, 그거 묻었나 보다.”

    “…그래…?”

    임아린은 의미심장한 대답과 함께 가만히 시선을 보내왔다.

    분명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담한 눈빛이었으나,

    그런 메마른 눈빛이 외려 더더욱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다 차렸다. 이제 먹을까?”

    나는 괜히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화제를 돌렸고,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임아린은 이내 의심을 거둔 듯, 다시 웃음을 되찾은 모습을 보여왔다.

    “그래서 어제 무슨 이야기 했어? 백일에서 뭐래?”

    “음….”

    나는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자, 일부러 아무것도 아닌 척 수저를 옮기며 제안받은 이야기를 꺼냈다.

    “백일 제약에서 신약이 개발됐는데, 그 약으로 내 다리 고칠 수 있을 거 같대.”

    그 순간.

    “…어?”

    기분 탓인지, 임아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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