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65화 (65/165)

“이쪽으로 가시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거닐던 나는, 꽤 색다른 느낌의 사옥에 흥미를 느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천화나 세진하고는 느낌이 다르네.’

이곳은 세 번째로 불리는 백일 길드의 모회사이자, 국내 굴지의 기업인 백일 그룹의 사옥.

뜬금없이 협력에 관한 의사를 보여온 덕분에, 특별히 시간을 내어 직접 찾아왔다.

원래라면 세진 길드와 협력 중이니, 도의적으로 거절하는 게 맞지만….

그건 ‘백일 길드’로 접근해왔을 때 이야기.

어쨌든 나는 엄연히 서울시청 소속이고, 계약상 다른 기업과 협력하면 안 된다는 조항도 없었다.

무엇보다….

세진 길드와의 관계에선 우리가 압도적인 ‘갑’이다.

딱히 갑질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명분이 있는데도 애써 거절할 이유도 없겠지.

“사옥이 되게 잘 꾸며져 있네요.”

“저희가 복지에 꽤 많이 투자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업무 만족도도 굉장히 높은 편이죠.”

사옥을 안내하던 직원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지나다니는 직원들을 눈여겨보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제약이나 금융 쪽으로 강한 기업이라 좀 딱딱하고 빡빡한 느낌이었는데, 근무 중인 직원들의 낯빛을 보아하니, 내 생각보다 근무 환경이 괜찮은 것 같았다.

“여깁니다.”

이윽고 도착한 어느 사무실.

문 옆에 명패를 슬쩍 확인해보니, ‘백유진’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내게 연락을 취해온 사람이었다.

똑똑─

직원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벌컥─

문이 열린 순간, 신비로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 생긋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고급스러운 블라우스에 단정한 스커트.

마치 깨끗한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특이한 붉은색 눈동자.

백일 그룹 회장의 손녀, 백유진이었다.

*

“음료도 괜찮으시죠?”

“네, 좋습니다.”

다른 직원을 시킬 법도 한데, 백유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손수 마실 걸 내왔다.

애초에 그녀 말고 다른 직원이 없긴 하지만….

직급과 개인 사무실을 보면, 아무래도 집안의 힘으로 이름만 올려놓은 낙하산인 것 같았다.

‘백일 그룹이라….’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백일 그룹은 대대로 백 씨 가문에게 세습됐는데,

막대한 재력과는 별개로, 특유의 새빨간 눈동자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우선…, 일 이야기부터 좀 해볼까요?”

백유진은 잡다한 이야기를 모두 미뤄두고 시원스레 본론에 대해서 꺼내왔다.

“일단 저희 백일 그룹에서 팀 서울시청에 정식으로 투자하고 싶어요. 투자 규모는 세진에서 제안한 것보다 비슷하거나, 더 많은 정도로.”

은근히 백일 그룹을 강조하는 그녀.

아무래도 백일 길드와 분리된 관계라는 걸 강조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백일 그룹 소속으로 앉아있다 이거지?’

백유진은 그룹뿐만이 아니라, 길드에도 이름을 올려놓은 상황이다.

물론 특별히 활동하는 건 아니고 단순히 이름만 올린 수준이긴 하나….

어쨌든 백일 길드와 연관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미 백일 그룹에선 길드를 운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팀에서 이 투자를 받아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백유진의 능력이 조금 의심스러웠던 나는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같은 재벌집 따님인 이혜리는 오랫동안 실무에 관여한 경험을 이용하여 내게 필요한 걸 제공해주었다.

인력, 공간, 자금, 팀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스스로의 힘으로 내게 지원해 준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세진을 1등으로 올리고 미래를 약속했으니, 정당한 거래.

현재 우리 팀이 지원이 부족하여 허덕이는 상황도 아니기에, 백유진은 조금 더 필요성을 내보여야 했다.

“혹시 세진 길드와의 관계가 걱정되셔서 그런 건가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물어오는 그녀.

어차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예. 사실 세진 길드와 관계가 돈독한 상황이라, 굳이 백일 길드와는 엮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자.

백유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이내 시원스럽게 대답해왔다.

“좋아요. 이렇게 된 거…, 쓸데없는 수작은 안 부릴게요.”

까탈스러운 외모와 다르게 꽤 호쾌한 성격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도지혁 씨한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좀 얻어먹고 싶어요.”

곱상하게 눈웃음을 치며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그녀.

“그렇게까지 표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사실인걸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자신의 계획을 숨김없이 모두 까발려왔다.

“저는 도지혁 씨가 중립 된 위치를 고수했으면 좋겠어요. 그 어느 쪽의 소속도 아닌, 모두의 프로듀서로요.”

여기서 굳이 팀 서울시청을 칭하지 않은 건, 말 그대로 내 능력만 필요하다는 뜻.

“물론 저희 쪽에 오신다면 좋겠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겠죠.”

“예.”

“그래서 저는 도지혁 씨가 저희를 이용해서, 완전한 ‘갑’의 위치에 서셨으면 좋겠어요.”

백유진은 느슨해진 세진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자신들을 이용하라고 말해왔다.

말 그대로 두 대형 길드 위에 앉아, 내게 맞는 판을 짜라는 뜻이었다.

‘흐음….’

이 세상에 이득 없는 거래는 존재할 수 없다.

백일 그룹을 이용하는 대가로, 아마 백일 길드를 도와달라고 요청하겠지.

한창 상위권을 노리고 있는 마당에 블랙 로즈가 퀸즈를 꺾는 걸 똑똑히 봤을 테니, 아마 내 도움이 절실할 거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솔직히 조건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다.

백유진의 말대로만 된다면, 내가 극한의 이득을 뽑아먹을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기에.

백일 길드는 헌터 출신인 강무진이 바닥부터 손수 키워 올린 길드로, 타 길드보다 압도적인 노하우와 실전 데이터를 지니고 있다.

체계와 효율 그리고 돈으로만 팀을 쌓아올린 세진이나 천화와는 다른 ‘진짜들’의 길드라고 불리는 곳이니, 분명 내가 배울만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은 여유가 없다.

이제 팀 서울시청이 막 비상하는 시점.

블랙 로즈야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았다 치더라도, 한창 노를 저어야 할 타이밍에 다른 배까지 조종할 여유는 없다.

“어떤 말씀이신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다른 팀까지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운영하고 계시는 팀 때문에 그런가요?”

“맞습니다.”

백유진은 내 대답에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더니, 이럼 어떠냐는 말을 꺼내왔다.

“이번 투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길드 자체를 한층 더 성장시키는 거예요. 저희 단장님이 실전엔 강하지만 운영은 조금 부족하거든요. 프로듀싱보단 시간이 덜 들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특정 팀을 맡아 프로듀싱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팀 운영 체계를 손봐달라는 말이었다.

운영 체계를 점검하는 것도 시간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찰싹 달라붙어 일일이 패턴을 연구해야 하는 프로듀싱보단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쓸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거기에 직접적으로 팀 순위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니, 세진 쪽에 할 말도 생긴다.

그야말로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세진과 백일 사이를 저울질하며 이득을 계산하고 있던 그때.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

백유진이 또 다른 제안을 슬쩍 들이밀어 왔다.

“아카데미에 다니시면서 헌터 데뷔를 준비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금방 그만두게 됐지만요.”

“그때 유망주로 꽤 잘나가셨다고 들었는데…, 부상 때문에 그만두셨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쉽진 않으신가요?”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듯 은근히 눈을 빛내는 그녀.

나는 그녀의 질문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전엔 아쉬웠는데, 지금은 별생각 없네요.”

“정말요?”

“프로듀서로 이렇게 성공했는데, 뭐가 아깝겠습니까?”

내가 과연 헌터로 데뷔했다면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난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헌터로서의 잠재력을 읽는 나지만, 안타깝게도 내 잠재력은 읽을 수가 없다.

아마 적당히 A급 정도에서 그치고 ‘설주희의 지인D’ 정도로 마지막 장에서 죽지 않았을까.

“아쉽네요.”

백유진은 정말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좀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그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순간 멈칫한 나는 조심스레 되물어보았고,

“…실례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유진은 내 반응에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더니, 갑자기 재는 체를 하며 슬쩍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 오늘 여기까지 오신 김에 좋은 곳에서 대접을 좀 해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를 보란 듯이 꼬며 은근히 제안을 들이미는 그녀.

숨길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명백한 유혹이었지만….

“예. 괜찮습니다.”

이번만 순순히 당해주기로 했다.

*

“주희야. 밥 먹어야지.”

“……응.”

홍유라는 맞은편의 설주희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그녀가 밥도 거르고 온종일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사실 홍유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싸워서 졌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하필 도지혁의 전략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한시라도 빨리 복귀해 1등을 되찾아도 모자랄 판에, 메인 딜러는 집안에 틀어박히고 말았고, 서포터는 연애에 눈이 멀어 팀 활동을 등한시하고 있다.

‘…도지혁….’

도지혁을 원망할 수도, 그렇다고 팀원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다.

“…집에서…30분….”

그때, 설주희가 수저까지 내려놓고 무언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희야?”

홍유라는 살짝 걱정스러움을 담아 그녀를 불러보았고,

휙─

퍼뜩 고개를 든 설주희는 퀭한 눈으로 홍유라를 가만히 응시하며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2시에 퇴근해서 레드나이트. 1시 50분에 피아벅스. 3시 10분에 인생세컷….”

“주희야? 그게 무슨….”

“여섯시에….”

마치 누군가의 일정을 계산하는 듯한 집요한 말투.

그런 설주희의 모습에 살짝 섬뜩함을 느낀 홍유라는 다급히 그녀를 다그쳤다.

“설주희. 대체 뭐라는 거야!”

그러자.

“!”

설주희가 깜짝 놀라며 순간 입을 꾹 다물더니….

다시 휴대폰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근처…모텔….”

“주희야….”

홍유라는 설주희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눈치챘고,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당장 병원부터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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