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64화 (64/165)

“…아린아….”

맥없이 울려 퍼지는 도지혁의 목소리.

임아린은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더더욱 몸을 웅크리더니, 마치 겁에 질린 사람처럼 벌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보, 보지 마…. 제발….”

그녀는 도지혁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기에.

화장은커녕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이런 추한 꼴로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아린아….”

하지만.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응?”

도지혁은 그녀의 속마음까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씌어있던 암시가 문제를 일으켰으리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괜찮….”

그리고 그녀를 달래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은 순간.

탁─!

갑자기 임아린이 벌떡 일어나 손을 거칠게 쳐내더니, 다짜고짜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린아?”

등골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한 그녀의 얼굴.

도지혁은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고,

“…!”

그녀는 일순간 당혹스럽단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주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

도지혁은 임아린에게 걸린 암시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다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하는 그녀의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었기에.

그럼 왜 여태 잠잠하던 암시가 갑자기 문제를 일으킨 걸까?

‘…설마, 서원이랑 외출한 거 때문에…?’

도지혁은 차분히 머리를 굴리며 임아린에게 다가섰다.

그리곤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녀를 감싸 안아주었고,

“…흣…, 흐윽….”

서럽게 눈물을 흘려대던 임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 폭─ 하고 안겨왔다.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아, 아니…, 흣, 아니야…. 내가 미안해….”

이러나저러나 일단 진정부터 시키는 게 급선무.

도지혁은 그녀가 더 이상 발작하지 않는 걸 확인한 뒤, 꽈악 끌어안으며 천천히 그녀를 달래주었다.

“…….”

그렇게 서로의 고동을 느끼며 껴안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임아린의 울음이 멎은 걸 확인한 도지혁은, 그녀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슬쩍 말을 꺼내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더니, 나지막이 사과를 건네왔다.

“…미안….”

사과까지 하는 걸 보면,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으리라.

“아린아.”

도지혁은 임아린을 슬며시 떼어내고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임아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외려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가슴팍에 얼굴을 숨겨버렸다.

“임아린. 나 봐.”

도지혁은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강제로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왜 그랬어?”

하지만 임아린은 불만 가득한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다는 의미였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보다 못한 도지혁은 짐짓 으름장을 늘어놓으며 대답을 촉구했다.

그러자 임아린이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내리깔더니….

“…아, 아니….”

결국, 꼬리를 내리곤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게….”

임아린은 연신 눈치를 살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왔다.

그리고….

“…어?”

도지혁은 살짝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고 말았다.

“아, 안 믿으려고 했는데, 사진까지 보내와서….”

진서원과 성인용품 매장에서 쇼핑하던 걸, 한 팔로워가 SNS로 제보했다는 것이다.

‘…미친….’

위기감을 느끼고 꼴깍 침을 삼킨 도지혁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재빨리 말을 꺼냈다.

“사정이 있었어.”

도지혁은 혹시 모를 오해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 차근차근 진서원과의 일을 설명했다.

그녀가 한정판 장난감을 원했고, 어쩔 수 없이 동행해주었을 뿐이라고.

진서원의 SNS에 모든 흔적이 남아있으니, 얼마든지 봐도 좋다며 자신의 결백을 해명했다.

“…진짜…?”

“진짜로.”

물론 차마 쇼핑 이후에 벌어진 작은 해프닝까지는 말할 수 없었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다행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임아린은 모든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내가 조심성이 없었어. 미안해.”

“아, 아냐…! 나도 갑자기 이상한 짓해서 정말 미안해….”

도지혁은 뉘우치는 임아린의 모습에 마음을 놓은 한편, 살짝 우려를 품고 말았다.

‘이거 괜찮으려나….’

임아린은 여전히 암시에 걸린 상황이다.

설주희와 홍유라의 행동 방식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암시를, 단순히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무식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큰 문제가 없어서 잘 체감하지 못했으나,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지금껏 임아린이 멀쩡해 보였던 건, 그저 억지로 참고 있던 덕분이라는 사실이.

즉, 또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임아린이 또 발작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암시를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그때, 임아린이 은근슬쩍 도지혁의 품에 찰싹 달라붙곤 애정을 갈구하듯 은근히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반사적으로 그녀를 쓰다듬는 도지혁.

어느새 그의 머릿속엔 더더욱 주의해야겠다는, 웬만해선 여성과 멀리하는 게 좋겠다는 인식을 피어나갔고,

세상 행복한 얼굴로 품속에 얼굴을 숨겼던 임아린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치 성공적으로 계획을 이뤄, 기뻐하는 것처럼.

*

팀 서울시청의 합숙소.

“…언니.”

“응?”

방한나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데이트 후기를 공유하던 진서원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거 해본 적 있어?”

“뭘 해봐?”

뜬금없는 진서원의 물음에 의문이 든 방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진서원이 대뜸 ‘관계’를 입에 올려버렸고,

“가, 갑자기?!”

“…해봤어?”

당황한 방한나는 진서원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해, 해봤다고 해야 하나? 하,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여기서 만약 안 해봤다고 했다가는, 진서원이 무시할지도 모른다.

연상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고 싶었던 방한나는 냅다 거짓말을 치고 말았는데….

“다, 당연히 해봤지!”

“…진짜?”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진서원은 드물게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여왔다.

“그,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방한나는 뜬금없이 엄한 곳에 흥미를 보이는 진서원의 모습에 살짝 걱정스러워지고 말았다.

무려 한정판 ‘장난감’을 사겠다며, 도지혁을 데리고 간 진서원이다.

괜히 잘못 설명했다가는, 또 어떤 정신 나간 사고를 칠지 모른다.

“혹시…. 해보고 싶어졌어?”

“……아니.”

묘하게 늦은 진서원의 대답.

‘거짓말이구나.’

그녀로 떠보며 위험한 낌새를 느낀 방한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아예 직접 교육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 언니가 좀 가르쳐 줄까?”

“…언니가?”

“원래 이런 건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방한나와 진서원의 나이 차이는 단 1살.

그러나 이미 그녀를 친언니에 가까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던 진서원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방한나는 마침내 교육을 빙자한 경쟁자 제거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일단…. 누구랑 해도 되는지부터 알려 줄게.”

“…누구?”

“상대가 너랑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귀기로 한 경우에만 하는 거야.”

“…왜?”

“왜냐니! 넌 아무 남자나 만나서 하고 싶어?”

“…아니.”

“그러니까, 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하고만 하는 거야. 결혼하면 부부가 되는 거고, 사귀면 부부가 될 수 있잖아. …물론 헤어질 수도 있지만.”

“…그럼, 사귀는 건 어떻게 해?”

그때, 진서원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왔다.

방한나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시점이 찾아온 것이다.

“그야…. 서로 사랑한다고, 사귀자고 했을 때 사귀는 거겠지?”

“…사귀자고 하면?”

“그렇지. 그냥 사랑한다 했다고 다 사귀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사귀자.’라는 의사를 제대로 주고받았을 때만 해도 괜찮은 거야. 이해했어?”

“…사귀자고…. 응. 이해했어.”

방한나는 결코 도지혁이 진서원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물론 순수한 진서원을 속이는 것 같아서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서원아…. 연애는 실전이야…!’

어쨌든 교육은 제대로 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

얼마 후.

드디어 휴가를 끝마치고 출근한 팀 서울시청.

“얘들아. 그동안 푹 쉬었으니까, 오늘은 좀 열심히 하자.”

““네!””

오랜만에 훈련장에 나타난 세 사람은 함께 워밍업을 하며 신체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규리 씨.”

“네?”

“제 또래 여자애들은 보통 어떤 선물을 좋아할까요?”

“갑자기 선물이요?”

“규리 씨. 딱 보면 모르세요? 쟤 썸녀 줄 선물이잖아요.”

“아…!”

그 사이 틈을 타, 나는 다른 팀원들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받아보았는데….

“글쎄요…. 그분은 돈도 많을 테니까…. 오히려 마음이 담긴 선물이 더 좋지 않을까요?”

“마음이 담긴 선물이요?”

“예를 들면, 직접 쓴 편지 같은 거요. 이게 은근히 또 감동이거든요.”

“편지….”

“아니면, 그건 어때? 직접 만든 소품이나, 뭐 그런 거.”

“오…. 준형 씨, 보기보다 센스 있네요?”

“…그거 무슨 의미입니까?”

‘직접 만든 선물이라…. 디퓨저나 향수 같은 걸 선물할까?’

최근 임아린 발작 사건 이후, 나는 전보다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그녀에게 확신을 줄수록, 그녀도 더더욱 안정적인 모습을 보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아, 맞다. 서원이 SNS 팠는데, 들으셨어요?”

“어? 진짜요?”

“서원이가?”

“공식으로 쓸지 안 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관리해야 할 거 같아.”

때마침 진서원의 SNS가 떠오른 나는, 선물에 대한 화제를 꺾어, 한규리와 김준형에게도 진서원의 계정을 알려주었다.

“우와…. 완전 데이트 코스로 다니셨네요?”

“저는 따라만 다녔습니다.”

“쯧쯧…. 썸녀한테도 그렇게 말해보시지?”

“이미 다 보고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워밍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짧게 SNS 관리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띠링─

한규리의 업무용 휴대폰에 알람이 울렸다.

아무래도 업무 관련하여 메일이 온 것 같았다.

“아, 잠시만요.”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녀는 곧바로 노트북을 이용하여 메일을 확인하였는데….

“으응?”

“뭐 스팸이라도 왔어요?”

“어…. 조금 깜짝 놀라서요.”

무슨 일인지, 메일을 보고 살짝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여왔고,

“어디서 왔길래….”

나는 슬쩍 몸을 숙여 메일이 온 곳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으응?”

한규리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뭐야, 어딘데?”

뒤이어 김준형도 호기심이 솟아오른 듯, 슬쩍 어깨를 집어넣으며 모니터를 확인해봤지만,

“…엥?”

그도 의아한 반응을 보인 건 마찬가지였다.

“백일 그룹…. 맞죠?”

“…맞는 거 같은데요?”

“백일 길드도 아니고, 백일 그룹…?”

메일을 보내온 곳은 바로 백일 그룹.

또 다른 대형 길드인 ‘백일 길드’의 모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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