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아…. 실제로 보니까 엄청 큼직큼직해요…!”
“그러게. 역시 사진하고 직접 보는 건 다르구나….”
진서원은 줄줄이 앞서 걷고 있는 방한나와 김나래의 대화를 듣곤 주변을 훑어보았다.
까마득히 높게 솟아오른 바위산들과 은은히 깔린 운무.
주변엔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있었는데, 흔히 무협 배경에서 볼 수 있는 지형과 매우 유사했다.
‘전에 갔던 곳이랑 비슷하네.’
이런 지형이 낯선 두 사람과는 달리, 이미 도원향에서 훈련한 경험이 있던 진서원은 특별한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선선한 날씨가 꽤 시원하다고 느끼는 정도였다.
[ 얘들아. 곧 있으면 안전지대도 끝날 꺼야. ]
그때, 바깥에서 지휘를 내리고 있던 도지혁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슬슬 안전지대가 끝날 테니,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알겠습니다! 다들, 2번 대형으로 움직일게요!”
리더 겸 현장 지휘를 맡고 있던 방한나가 지시를 내리자, 곧바로 앞서 걷고 있던 김나래가 뒤로 빠지며 자연스레 방한나를 앞세웠다.
탱커를 가장 앞세우며 전진하는 형태의 방어적인 대형이었다.
“서원이는 하나도 긴장 안 한 거 같네?”
나란히 걷고 있던 김나래의 물음에 슬쩍 시선을 돌린 진서원은,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김나래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언니는 긴장돼요?”
“으음….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안절부절 못하던 방한나 정도는 아니지만, 김나래도 확실히 긴장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도 정식으로 토벌전에 나선 건 처음이기에.
다만, 연장자이니 동생들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애써 침착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앗…!”
바로 그때.
“전방 80M 괴수 발견!”
앞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방한나가 괴수 출현을 알려왔다.
“블루 드레이크 다섯 마리! 작전대로, 우두머리만 쓰러뜨릴게요!”
드레이크 종류 중에서도 가장 약한 C급 괴수인 블루 드레이크는 보통 B급 게이트에서 종종 출현하는 괴수인데,
일반적으로 네다섯 마리 정도로 무리를 이루고 다니며,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를 먼저 쓰러뜨리면 전의를 잃고 도망치는 특징이 있다.
“나래 언니!”
“응! 맡겨줘!”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깨닫고 지팡이를 꼬옥 움켜쥔 김나래는, 긴장을 털어내고자 짧게 심호흡을 내쉬곤 마력을 끌어올리며 불의 정령을 소환하였다.
화르르륵───!
그리고는 수없이 연습해온 대로, 무리의 중심에 선 우두머리를 노리며 정령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랏…!”
후우우웅……
정령은 정확히 우두머리를 바라보며 마치 활을 쏘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화르르르르륵──────!!! 퍼엉─!
이내 불꽃을 쏘아내어, 우두머리의 몸통을 맞춰버렸다.
키에에에에에엑───!
기습에 놀란 우두머리는 크게 울부짖으며 다급히 다른 드레이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엑…!
하지만 시야가 좁은 일반 블루 드레이크들은 적을 찾지 못하여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털썩─!
크아아아앙……!
그새 충격을 견디지 못한 우두머리가 쓰러져버리자, 다른 블루 드레이크들이 우두머리를 버린 채 멀리 도망쳐버렸다.
“흩어졌어요!”
방한나의 브리핑을 받은 도지혁은 김나래의 활약을 기쁘게 칭찬했다.
[ 나래 아주 잘했어. 첫 시도인데, 떨지도 않고…. 대단한데? ]
“가, 감사합니다…!”
[ 아마 다른 무리랑 합류했을 테니까, 최대한 피해서 빠르게 전진하자. ]
“넵…!”
그렇게 계속해서 방어적인 대형으로 쭉쭉 전진하는 사이.
기념비적인 첫 전투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진서원은, 주변을 경계하며 힘차게 걷고 있는 방한나와 지팡이를 끌어안곤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김나래를 조용히 번갈아 보았다.
“…….”
좋은 활약을 보인 두 사람이 내심 부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진서원은 자신이 품고 있던 감정이 ‘부러움’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천마신공의 연료가 될 ‘감정’을 착실히 모아갔다.
모든 능력이 그렇지만, 천마신공은 특히 압도적인 파괴력과 힘을 중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무지막지한 능력은 사용자에 따라 무한히 강해질 수 있으며,
힘에 대한 갈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더욱 빠르고 크게 성장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파괴적인 힘에 대한 갈망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우러나오기 마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그 감정을 지닌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질이 달라진다.
즉….
선천적으로 선한 기질을 타고난 방한나가 다뤘으면 겨우 A 급 정도 밖에 안 됐을 능력이고,
하얀 도화지와 같은 진서원에겐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저기, 비석.”
“어!”
“입구다…!”
그렇게 몇 번의 전투를 거치며 드디어 다다른 게이트의 끝.
작은 비석과 함께, 거대한 바위들로 세워진 높은 벽이 나타났다.
악명 높은 관악산 보스의 출현지였다.
“잠깐 쉬고 갈게요!”
방한나는 주변에 다른 괴수가 없는 걸 확인하곤, 예정대로 근처에 자리를 잡아 짧게 휴식을 취하며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였다.
“으아…. 제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여기, 물 좀 마실래?”
“아, 네! 감사합니다!”
“서원이는?”
“…괜찮아요.”
방한나와 김나래는 겨우 D급으로 평가받던 자신들이, 무려 B급 게이트의 보스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게 썩 낯설었다.
걱정과는 달리 이렇다 할 큰 문제도 없었고, 너무나 부드럽게 진행돼서 외려 게이트를 잘못 들어온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는데….
사실 정석대로 길을 따라왔다면, 이렇게 쉴 여유도, 토벌 자체가 쉽게 느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지혁은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데이터와 공식적으로 연구된 논문까지 찾아가며 최단기 토벌 루트를 구상했다.
요컨대, 필드에 깔린 괴수들과 지형의 특징을 이용하여 최대한 전투를 피하는 꼼수를 썼단 것이다.
[ 얘들아. 쉬는 동안, 작전부터 다시 짚고 가자. ]
“아, 네…!”
도지혁이 구상한 작전은 꽤 단순했다.
방한나가 공격을 버텨내고,
김나래가 주의를 끌면,
진서원이 단숨에 기습하여 승부를 보는 것이다.
단순한 게 최고라는 논리로 짜여진 이 무식한 작전은, 방한나의 방어력과 진서원의 공격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맞춤형 전술.
이른바 ‘원턴킬’ 전술이다.
[ 슬슬 들어갈까? 다들 준비됐어? ]
“넵…!”
“준비됐어요!”
“…네.”
[ 그럼, 바로 들어가자. ]
도지혁의 지시에 따라 휴식을 마치고 나선 세 사람은,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살짝 긴장감을 유지하며 석벽 내부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무슨 터널 같다….”
“그러게요….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거대한 석벽은 거의 100M에 다다를 정도로 두꺼웠는데, 내부엔 정체불명의 글자들이 마구잡이로 쓰여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 왔다…!”
이윽고 다다른 석벽의 끝.
“다들 준비됐죠?”
“응!”
“…응.”
“그럼, 갑니다!”
멤버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방패를 치켜든 방한나는, 도지혁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환한 빛이 쏟아지는 너머로 뛰어들었다.
‘도장 두 개…!’
그 순간.
“!!!”
온몸을 덮쳐오는 무지막지한 중압감.
그르르르릉……
방한나는 높이 솟아오른 석벽의 중심에 웅크린 거대한 괴수를 발견하곤 무심코 침을 꼴깍 삼켰다.
철그럭……철그럭……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빛 강철 갑주를 두른 거대한 곰 형상의 괴수.
관악산의 왕, B급 괴수 강철 곰이었다.
“…나래 언니…! 부탁할게요…!”
“응…!”
방한나는 김나래에게 나지막이 지시를 내리곤, 무리에서 떨어져 조심스레 강철 곰에게 다가갔다.
‘크, 크다아….’
강철 곰의 키는 거의 20M에 육박한다.
그 거대한 몸집을 단신으로 막아내야 하는 방한나로선 중압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소, 소원권을 위해서라면…!’
이미 소원권에 눈이 먼 방한나는 두려움마저 꿀꺽 삼켜낼 수 있었고,
멀리 떨어진 김나래에게 신호를 보내곤, 김나래가 강철 곰을 깨우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화르르륵───! 퍼엉─!
그르르르릉……!
단단한 갑주 덕에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강철 곰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 할 수 있다…!”
방한나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강철 곰의 공격 패턴을 떠올리며 방패를 콱 움켜쥐었다.
크와아아아아아앙────!!!!
이윽고 방한나를 발견한 강철 곰.
위협을 가하기 위해 크게 울부짖은 거대한 괴수는,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커다란 발을 들곤 방한나를 향해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
‘빠르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발을 끝까지 응시하던 방한나는 일순간 마력을 폭발시키며 방패를 치켜들었고,
쿠우우우우우우우웅───────!!!!!!!
“크으읏…!”
조금도 밀리지 않는 기염을 토하며 첫 번째 공격을 막아내 버렸다.
“나래 언니!!!”
“가라앗!!!!”
이어진 김나래의 공격.
화르르르륵───! 퍼어엉───!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불의 정령이 쏘아낸 불꽃은 강철 곰의 시야를 가리며 순간 혼란에 빠뜨렸고,
강철 곰이 허우적거리며 빈틈을 보인 찰나, 내내 전투조차 피해 가며 끝까지 힘을 모아온 진서원이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서원아!!!”
진서원은 귓가에 꽂히는 방한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묘한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진서원은 그런 방한나의 부름이 썩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토록 다재다능하고 멋있는 그녀가, 이 순간만큼은 오직 자신만을 믿고 있다고 느꼈기에.
‘할 수 있다…!’
그동안 쌓아온 부러움이 마침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타앗─!
크와아아아앙……!
강철 곰의 유일한 약점인 옆구리로 파고든 진서원은, 새카만 내공을 온몸에 두르며 주먹을 모았다.
파직…! 파지지직───!
그리고.
[ 보여줘! 진서원! ]
귓가에 꽂혀있던 이어폰에서 도지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끓어오르는 야릇한 희열에 무심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