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51화 (51/165)

꿀꺽─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싸늘한 감각.

크나큰 위기에 처했음을 감지한 탓인지, 귓가에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울려댄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분명 바에 들러 술을 마신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차는?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아마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 중에 필름이 끊기는 것만큼 불쾌하고 불안한 경험은 없으리라.

‘쟤네는 왜 여기 있고?’

기억을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들던 나는, 뒤늦게 내 옷차림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무려 속옷 하나뿐인, 반나체였다.

“…….”

왜 내가 이런 꼴로 자게 된 건지, 더 이상 의문조차 들지 않는다.

어차피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봐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기에.

혹시 발소리가 들릴까 싶어 살금살금 발을 내디딘 나는, 조용히 옷장이 있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탁─! 화아아아악────

그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벽을 더듬거리며 방안의 불을 밝힌 순간, 마치 도둑이 든 것처럼 조금 어질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방한나와 진서원이 내게 입힐 옷을 찾았던 모양인데….

기가 막히게도, 유일하게 편한 옷이 들어있던 곳만 피해서 헤집은 것 같았다.

“…미치겠네….”

급한대로 대충 옷을 꺼내 입고 어질러진 것들을 대충 정리한 뒤.

다시 거실로 나선 나는, 묘하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던 방한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흐아암….”

“…한나야.”

“꺄앗!”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뒤를 돌아본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금세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프로듀서님…! 좀 괜찮으세요!?”

뭐라고 할까, 너무 해맑아서 외려 힘이 쭉 빠져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엄청 취해서 집에 들어왔다고…?”

“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쓰러지셔서….”

“…깜짝 놀랐어요.”

진서원까지 인기척에 깨어난 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두 사람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던 도중, 문득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근데 너희는 날 어떻게 발견한 거야?”

“!”

순간 허를 찔린 듯 불안하게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방한나.

그때, 진서원이 슬쩍 끼어들며 사실을 밝혀왔다.

“…편의점 갔어요.”

“그 시간에…?”

“마, 맞아요! 편의점에 가려고 했는데, 프로듀서님이 저희 층으로 오셨어요!”

뭔가 묘하게 얼버무리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나를 돌봐줬다는 것.

깨어나 보니 옷이 벗겨져 있었다는 불상사가 일어나긴 했으나, 두 사람이 엄한 짓을 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뭐…, 아무튼 챙겨줘서 고마워. 정말 너희 밖에 없다.”

부끄럽다는 듯 히히 웃는 방한나와 왠지 모르게 조용히 눈길을 피하는 진서원.

두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은 나는, 점심에 맛있는 거라도 한 끼 사주기로 약속하며 해장 겸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는데….

“아, 프로듀서님!”

“응?”

“그…. 어제, 손님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애써 잊고 있었던 이름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임아린 씨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꼭 연락 달라고 하셨어요…!”

임아린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

나는 그녀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듣고도 별다른 생각을 품지는 않았다.

최소한 이 숙취가 가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굳이 찾아와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밝힌 사실로 보아, 테스트 결과를 보고도 나에게 환멸하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연락해볼게.”

“넵…!”

그와는 별개로, 묘하게 방한나가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착각이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관심을 끊곤 곧장 욕실로 향했다.

*

어느덧 순식간에 돌아온 평일.

“얘들아! 불편한 점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해줘야 해!”

““네!””

이전에 발주한 게이트용 장비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훈련을 멈추고 일일이 장비를 맞추고 있었다.

“사용법 익히는 게 좀 걸릴 거 같은데…, 마이크랑 카메라 세팅은 좀 미뤄둘까요?”

“어차피 풀 착용하고 확인해봐야 하니까, 오늘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연결은 천천히 확인해도 괜찮으니까, 착용만 해봅시다.”

한창 품목을 체크하던 나는, 한규리와 김준형의 의견에 한 마디를 덧붙이며 장비를 확인하던 김나래에게 향했다.

“나래야.”

“아, 네!”

“혹시 모르니까, 이거 입어보기 전에 반발력 테스트부터 확인해보고 입어. 알았지?”

“넵!”

일반적으로 게이트에서 사용되는 장비는 게이트 바깥에서 사용하는 장비들과 다른 소재로 제작되는데, 간혹 개인에 따라 맞지 않는 소재나 능력에 충돌되는 소재가 사용되어 반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해보고 나서, 규리 씨한테 이야기해주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김나래를 지나친 나는, 곧바로 진서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장비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서원아. 잘 되고 있어?”

부름에 고개를 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을 대신해왔고,

나는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으며 장비들을 함께 확인해주기로 했다.

“장비 확인하는 법은 안 배웠지?”

“…네.”

사실 장비를 확인하는 방법 중에 반발력 테스트 말곤 특별할 게 없다.

평범하게 물건을 사는 것처럼 마감이 괜찮은지, 어디 망가진 건 없는지, 사이즈는 괜찮은지 확인하는 게 전부다.

“너는 마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 옷은 그냥 입어봐도 괜찮을 거야. 입는 거 잘 모르겠으면 규리 씨한테 부탁하고…, 관절 부위는 착용해보고 나서 불편한 게 없는지 확인해봐.”

“…네.”

그렇게 진서원까지 지나쳐, 마지막으로 방한나에게 향한 나는, 의상에 딸린 제품 보증서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작은 의문을 품으며 슬쩍 말을 건넸다.

“뭐, 문제 있어?”

그러자.

“!”

방한나가 크게 움찔거리더니, 뒤늦게 나를 발견하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아, 아뇨! 그냥, 좀 보고 있었어요…!”

누가 봐도 아닌 게 아닌 상황.

나는 그녀가 보고 있던 제품 보증서의 페이지를 흘끔 바라보았고,

그녀가 상의 세부 사이즈를 확인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사이즈가 안 맞아?”

“그, 그게….”

나는 평범하게 사이즈가 잘못 왔거나, 안 맞는 부분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 가슴…. 부위가…, 조금 작아서….”

생각지도 못한 사이즈 이슈를 마주하고 말았다.

“…….”

순간 내려앉은 어색한 분위기.

방한나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곤 시선을 피해버렸고,

나는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어마어마한 흉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홍유라의 사례를 떠올리며 적당히 조언해주었다.

“그…. 사이즈는 보통 맞춤 제작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규리 씨한테 이야기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넵.”

“어…, 그래. 그, 나는 다른데 좀 보러 갈게.”

“…넵.”

그렇게 나는 장비 체크를 핑계로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버렸고,

훗날, 방한나가 홍유라와 같은 업체에서 새로운 장비를 맞췄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날 오후.

장비를 모두 체크한 나는, 블랙 로즈의 멤버들과 미팅 약속으로 먼저 사무실을 나왔다.

사실상 이번 미팅에서 토벌 결과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살짝 중압감이 느껴졌다.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블랙 로즈의 멤버는 퀸즈와 같이 총 세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에 만났던 리더이자, 메인 딜러인 공인나.

A랭크 능력자이자, 탱커 포지션인 김민주.

그리고 또 다른 S랭크 능력자이자, 서포터와 서브 딜러 포지션을 맡은 최효민까지.

퀸즈에 이어 두 번째로 S급 헌터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팀인데….

사실 S급 헌터들은 서로 팀을 잘 꾸리지 않는다.

일단 몇 없을뿐더러, 하나같이 콧대가 매우 높기에.

에고가 강한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충돌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많은 팀들이 S급 헌터를 1명 이상 들이지 않는 것이다.

띵──

어느새 도착한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블랙 로즈의 사무실이 있는 층을 눌렀다.

[ 올라갑니다. ]

그리고 머릿속에 입력해둔 블랙 로즈의 정보를 되새기며 멍하니 층이 바뀌는 걸 보고 있었는데….

띵──

몇 층 전에 잠시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한 중년 남성을 대동한 젊은 여성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효민아. 이번엔 절대 예의 없게 행동하면 안 돼.”

“아, 알았다니까요? 진짜, 그딴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최효민!”

“아, 입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요.”

블랙 로즈의 프로듀서 임대섭과 블랙 로즈의 멤버, 최효민이었다.

‘일을 보고 있었나?’

먼저 두 사람을 알아본 나는, 인사를 건네며 먼저 아는 체를 하려고 했다.

“안녀….”

그 순간.

“저기요. 좀 안으로 들어가요.”

“…네?”

“안 들려요? 공간 좁으니까, 안쪽으로 들어가라고요.”

최효민이 나를 흘겨보며 당당히 명령을 내려왔다.

‘…이것 봐라?’

“!!!”

그때, 때마침 나를 알아본 듯 임대섭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여왔고,

“…어, 어어…!”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에게 모르는 체하라는 의미로 정중히 인사를 건네며 최효민에게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 올라갑니다. ]

이윽고 문이 닫힌 후,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층이 바꾸는 걸 지켜보던 그때, 팔짱을 꼬고 있던 최효민이 슬쩍 말을 건네왔다.

“어느 부서예요?”

“…저 말입니까?”

“그럼, 당신이지, 누가 있겠어요? 우리 사무실 눌러놓은 거 보니까, 우리 팀에 볼일 있는 거 같은데…. 어느 부서예요?”

뜬금없는 최효민의 질문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일단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협력팀 직원입니다.”

그러자.

“흐응….”

그녀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며 내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더니, 대뜸 손을 들이밀며 무언가를 요청해왔다.

“줘봐요.”

“뭘 말씀하시는….”

“당신 휴대폰이요.”

“효, 효민아…!”

뜬금없이 내 번호를 따가려는 최효민의 행동에 기겁한 임대섭이 그녀를 말려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휴대폰을 요구해왔다.

“밥이나 같이 먹어요. 이거, 흔치 않은 기회인 거 알죠?”

“효민아, 좀…!”

띵──

때마침 멈춰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걸 흘끔 확인한 나는, 문밖을 가리키곤 생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을 건넸다.

“곧 미팅이 있어서요. 끝나고 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

당당하던 최효민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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