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이이익───!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혈액의 소음과 함께 내리깔리는 무거운 분위기.
‘아니, 이게 왜….’
일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진 나는, 마치 부패해버린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버린 혈액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
나지막이 귓가에 꽂혀오는 설주희의 헛웃음.
모두의 시선이 테스트기에 적힌 간이 대조표로 옮겨졌고,
가장 말단 부분의, 눌어붙은 혈액과 똑같이 새카만 색에 적힌 ‘+1500’ 이라는 숫자에 모여들었다.
내가 1500번 이상의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었다.
“…지, 지혁아….”
“너….”
귓가에 부딪히는 임아린과 홍유라의 목소리에 머리가 새하얘진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임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하얗게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린아…!”
뭔가 이상하다.
난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엔 관계를 맺은 적은 있으나, 이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다.
“이, 이거 잘못된 거 같은데, 다시 제대로 측정해봐요! 횟수도 알 수 있다면서요!”
불쾌하게 뛰어대는 심장 소리에 덩달아 불안해진 나는, 재빨리 직원을 붙잡고 정확한 횟수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자 직원이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다급히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는데….
“됐어요.”
설주희가 그녀를 막아섰다.
“됐으니까, 이제 가세요.”
“…아. 시, 실례하겠습니다….”
“설주희!”
그녀의 돌발 행동에 순간 열이 뻗친 나는,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에게 항의했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다시 제대로 확인해야…!”
그 순간.
“더러운 걸레 새끼.”
“…뭐, 뭐?”
설주희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냉소적인 목소리로 폭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까지 추해져야 만족할 거야? 우리 정 떼는 게 목표면, 이미 충분하니까 제발 적당히 해!”
“주희야. 일단 진정….”
옆에서 지켜보던 홍유라가 다급히 그녀를 말려보았지만, 외려 화를 돋울 뿐이었다.
“홍유라! 지금 이걸 보고도 저 개새끼 편을 들어?! 너 그런 취향이었니?”
“…나도 네 마음은 이해해. 근데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내가 지금 안 흥분하게 생겼냐고!!!”
쿵─
그 사이 직원은 케이스를 챙겨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고,
나는 세 사람이 강력한 암시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리곤,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애써 차분하게 말을 꺼내보았다.
“…얘들아. 나는 맹세코 단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어. 아니었으면 내가 왜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왔겠어?”
전엔 변명조차 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엔 나도 할 말이 있다.
애초에 하지 않았기에, 조금도 꿀리지 않아서 당당히 행동했을 뿐이다.
“검사 결과가 왜 이렇게 나온진 모르겠지만…. 난 결백해.”
그러나.
“그럼 이건 뭔데?”
당연하게도, 테스트기의 성능을 확인했던 그녀들은 내 말을 조금도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따먹히기라도 했다는 소리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지껄여?”
“변명처럼 들릴 순 있지만, 사실이 그래.”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게 대응하며 상황을 중재해보려고 했다.
어쨌든 오늘의 목적은 다툼이 아니라, 오해를 푸는 것이기에.
“얘들아. 내 순결함도 중요하지만, 오늘 모인 건 암시를 풀기 위함이잖아.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그런데 그 순간.
퍽─!
턱에 묵직한 충격이 내리꽂히며 눈앞이 번쩍거렸다.
“윽….”
“지, 지혁아!”
“설주희!”
결국, 설주희가 주먹을 쓰고 만 것이다.
“설주희 너, 대체 어쩌려고…!”
“괘, 괜찮아!?”
임아린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나는, 입안에 감도는 비릿함을 느끼며 눈앞에 서 있는 설주희를 슥─ 올려다보았다.
씩씩거리며 주먹을 치켜든 그녀는 외려 깜짝 놀랐다는 것처럼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떠올리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빨에 찢어져 버린 입안의 피를 삼키고 있자니, 갑작스레 회의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얻어맞고도 참을 수밖에 없다는 무력함.
영문도 모르는 일에 또 휘말렸다는 당혹스러움.
그리고 입안의 살갗처럼 갈기갈기 찢겨 버린 희망까지.
물밀 듯 밀려온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나는….
“…진짜 이제 못 해먹겠다.”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뭐?”
“내가…. 너한테 이딴 취급까지 받아가면서 붙어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 지혁아….”
나는 말려오는 임아린의 손길을 뒤로하곤, 불안하게 시선을 보내오는 설주희를 똑바로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네 말대로, 내가 아무나 쑤시고 다니던 더러운 걸레 새끼라고 치자.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뭐, 내 여자친구라도 돼?”
“뭐, 뭐가 어째?!”
“나는 좋은 마음으로 찾아와서, 굳이 안 해도 될, 이 좆 같은 검사까지 받았어! 그런데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니까…, 다 내 탓이라고? 지금 장난해?”
“도지혁. 화난 건 알겠지만….”
“홍유라. 너도 내가 더럽다고 생각해?”
“…….”
홍유라는 차마 대답을 꺼내오지 못했다.
결국, 그녀도 설주희와 똑같다는 뜻이었다.
“하….”
불어나기 시작한 회의감은 금세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갑자기 모든 것에 질려버린 나는, 설주희와 홍유라에게 나지막이 질문을 건네보았다.
“너네…. 정말로 날 좋아하긴 했어?”
하지만….
야속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나는 그녀들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터져버린 암시가 문제였던 걸까?
그럼 임아린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암시에 걸린 와중에도 내게 호의를 보여왔다.
날 믿지 못하고, 더러운 걸레로만 취급하던 두 사람과 다르게.
“…그동안 더러운 쓰레기 주제에, 깨끗한 척해서 미안하다. 나는 이만 빠져 줄 테니까, 알아서 해.”
“…지, 지혁아! 잠시만…!”
나는 다급히 따라붙는 임아린의 손길을 뒤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남아있었던 미련을 모두 내려놓은 채….
쿵─!
비로소 퀸즈를 떠나버렸다.
*
도지혁이 떠나고, 무거운 고요함이 감도는 응접실 내부.
어느새 가라앉은 설주희는 희미한 얼얼함이 남은 주먹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충동적이었다 해도 폭력을 쓴 건 명백한 잘못이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폭언을 퍼부어선 안 됐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주희야….”
그때, 망연자실하여 앉아있던 임아린이 선뜻 말을 건네왔다.
설주희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고,
살짝 일그러져있는 임아린의 얼굴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 지혁이한테 왜 그랬어…?”
“…어?”
설주희는 원망스러운 임아린의 말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대체 왜 지혁이를 안 믿는 거야…? 그 정도로 지혁이가 싫었던 거야…?”
지금껏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쓴소리를 한 적이 없던 그녀였기에,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그건….”
“지혁이는 아니라고 그랬잖아…. 일단 좀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랬잖아…!”
“아린아….”
“대체 왜 지혁이를 못 믿은 거야?! 정말로 지혁이가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해도…! 잠깐이라도 믿어 줄 수 있는 거잖아…!”
울컥하며 눈가를 적신 임아린은, 시선을 옮겨 홍유라를 노려보았다.
“유라 너도 그래…!”
“…….”
“왜 지혁이가 물어볼 때 아니라고 안 한 거야…?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잖아…!”
홍유라는 할 말이 없었다.
도지혁이 거짓말했다는 사실에 큰 환멸을 느꼈기에.
물론 설주희의 행동이 과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빈말로도 그를 옹호할 마음은 조금도 우러나지 않았다.
“진짜 너무 잔인하다…. 어떻게 지혁이한테 두 번이나 상처를 줘…?”
“임아린. 알았으니까, 적당히….”
“지금 내 말이 듣기 싫다는 거야?!”
설주희의 말에 더더욱 열을 내기 시작한 임아린은, 드물게 날 선 눈빛을 띠며 거세게 두 사람을 질타했다.
“나도 결과 보고 많이 화가 났고, 지혁이가 억울하다고 변명할 땐 치가 떨렸어! 근데 지혁이가 아니라고 하니까, 더럽혀졌어도 지혁이는 지혁이니까! 꾹 참으면서 믿어 준 거란 말이야…!”
설주희와 홍유라는 임아린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랑의 크기’에 압도되었기에.
알량한 변명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너희가 지혁이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절대 지혁이 포기 못 해.”
그렇게 임아린은 두 사람을 노려보곤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고,
쿵─!
홍유라와 설주희는 단단히 꼬여버린 상황에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날 저녁.
팀 서울시청의 합숙소.
방한나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던 진서원은, TV 앞에 놓인 전자시계를 흘끔 바라보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언니.”
“응?”
“…프로듀서님네 갈까?”
방한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서원이 말하는 ‘프로듀서네’라고 하면, 바로 몇 층 아래에 있는 도지혁의 집밖에 없었기에.
“어딜 가자고…?”
“…프로듀서님네 집.”
“…우리가 거길 왜 가.”
“…안 가?”
“아무리 심심하면 놀러 와도 된다고 하시긴 했지만…. 지금 가는 건 좀 그렇지.”
“…그럼, 언니는 안 갈 거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뻔뻔하게 물어오는 진서원.
‘얘가 진짜로 가려는 건가…?’
조용히 사고를 칠 것 같은 진서원의 눈빛에 잠시 고민하던 방한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다.
“안 가.”
그리고 잠시 후….
쿵─! 삐리릭─!
‘내가 미쳤지.’
진서원을 따라 현관을 나선 방한나는, 그녀에게 말려버린 자신을 원망하며 다급히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서원아. 이건 네가 가자고 한 거다? 난 진짜 말렸는데,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거다?”
“…응.”
그렇게 두 사람은 곧장 도지혁의 집이 있는 층으로 향했고,
‘이게 진짜 맞나…?’
방한나는 마치 알고도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처럼 못내 불안함을 떨치지 못한 채로 진서원의 뒤를 쪼르르 따라갔는데….
스윽─
앞서나간 진서원이 대뜸 도어락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나 비밀번호 알아.”
뭐가 문제냐는 듯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너무나 순수한 그녀의 말에 잠시 넋을 놓은 방한나는, 그녀를 잡아끌곤 멋대로 들어가는 건 안 된다며 단단히 교육했다.
“우리 연락도 없이 온 거잖아…! 일단 연락부터 드려보자. 알았지?”
“…프로듀서님이 아무 때나 마음대로 놀러 와도 된다 했는데….”
“스읍!”
“…알았어.”
그렇게 진서원의 교육을 마치고.
방한나는 진서원에게 메시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뭐라고 해?”
“놀러 가도 되냐고, 한나 언니도 데려가도 되냐고 여쭤….”
바로 그 순간.
띵──
그녀들이 있던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
메시지를 보내던 진서원과 방한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엘리베이터로 쏠렸고,
지이이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철푸덕─!
누군가가 쓰러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 어어!?”
“!”
도지혁이었다.
“프로듀서님!!”
예상치 못한 도지혁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방한나와 진서원은 다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코끝에 풍기는 알싸한 향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술 냄새.”
“어, 얼마나 드신 거야…?”
[ 문이 닫힙니다. ]
“이, 일단 꺼내 드리자!”
뒤이어 들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음성에 잽싸게 도지혁을 꺼낸 두 사람은, 다급히 그를 흔들며 의식을 확인해보았다.
“프로듀서님! 프로듀서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그러자….
“으음…?”
잠이라도 들었던 건지, 도지혁이 얼굴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눈을 떴다.
“…떴다.”
“프로듀서님! 정신이 좀 드세요!?”
“어…. 한나랑…, 서원이네…?”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해버린 도지혁은 어딘가 슬픈 눈빛을 띠며 실실 웃음을 흘리더니,
스으윽……
느릿하게 손을 들곤, 방한나의 얼굴을 슥─ 매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꿈인가….”
도지혁은 그대로 손을 툭─ 떨구며 다시 눈을 감아버렸고,
“…감았다.”
“프, 프로듀서님…!”
“…이제 어떡해?”
“이, 일단…. 지, 집 안으로 모시자!”
보다 못한 두 사람은 다급히 도지혁을 둘러업곤 그의 집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