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라와의 만남 이후.
깊은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란 사실을 깨닫곤 다시 훈련장으로 복귀하였다.
팀원들도 내 사정을 봐준 건지 별다른 말을 물어오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잡생각을 떨치며 다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한나야.”
“…….”
“한나야?”
“네, 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
방한나의 피드백 시간에 맞춰 짬을 낸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담히 말을 꺼내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뭘 골똘히 생각하는 거 같은데…. 혹시 고민이라도 있어?”
그러자.
방한나가 찔린 듯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해왔다.
“아, 아뇨!? 고민 같은 거 없는데요?!”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
그녀는 누가 봐도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원이 때문인가?’
방한나가 진서원에게 은근히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최근엔 많이 나아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진서원의 실력에 다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여기선 모르는 척하는 게 맞겠지.’
“그래? 아니면 다행이고.”
자연스레 화제를 넘기고 잠시 뜸을 들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방한나를 흘끔 쳐다보며 가장 중요한 본론을 꺼냈다.
“한나야. 서원이랑 딱 2주만 합숙하자.”
그 순간.
“……네?”
방한나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한 반응을 보여왔고,
나는 기세를 몰아치며 재빨리 합숙의 필요성을 늘어놓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서원이랑 너는 반드시 협력이 필요한 관계야. 아직 기억하고 있지?”
“어…. 기억하곤 있는데….”
“그래서 내가 기획한 건데, 너랑 서원이가 합숙을 통해 팀워크를 기르면 좋지 않을까 싶어.”
“…하, 합숙이요…?”
“응. 처음엔 나래도 같이 하는 걸 생각해봤는데, 나래는 당장 필요하진 않을 거 같아서.”
사실 합숙은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극단적으로 팀워크를 높일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틀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방식이다.
굳이 문제가 없는 김나래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으리라.
“당연히 숙소랑 기초 생활비는 모두 우리 쪽에서 해결할 거고, 서로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거실만 공유할 수 있는 집으로 구할 예정이야.”
“어….”
“딱 2주만 해보고,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얼마든지 그만해도 돼. 괜히 억지로 시켜서 너희 팀워크를 깰 생각은 없거든.”
“으음….”
뜬금없는 제안에 당황한 듯 방한나는 내 설득이 통하지 않은 듯 썩 미묘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뭔가 강력한 게 필요해.’
그녀를 설득할 무언가를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숙소 생활의 강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일단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나 한번 볼래?”
“…가, 갑자기요?”
“사실 혹시 몰라서 사진 같은 건 다 찍어놨거든. 아. 우리 집이랑 같은 아파트라 내가 요 근처는 빠삭해.”
“……네?”
두 사람의 숙소는 내가 사는 아파트와 같은 곳이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자잘한 문제가 생길 게 뻔한데, 누군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케어를 해야지 않겠는가?
“우리 집 기억나? 그 구조랑 완전 똑같이 생겼….”
“아니, 아니, 잠시만요…! 숙소가 프로듀서님이랑 같은 건물이라구요…?”
“좀 그런가?”
“그, 그게 아니라…! 그…. 프로듀서님도 숙소에 들르시는 건가요…? 시, 싫다는 건 아니구요! 조금 더. 그…. 친목?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나 해서요…!”
묘하게 기대하는 듯한 눈치의 방한나.
그런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 내역을 일일이 읊어주었다.
“그럼, 당연히 있지! 평일 저녁마다 수제 집밥 제공. 장보기 참여 시 저녁 메뉴 선택 가능. 특별한 용무가 없을 시엔 자차로 출퇴근 보장에, 개인 용무에 자차 및 인력 제공.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아?”
꿀꺽─
내 제안이 썩 매력적이었는지, 군침을 꼴깍 삼킨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조심스레 되물어왔다.
“…지, 진짜요?”
“응.”
“저, 정말요? 정말로 해주시는 거예요?”
“나 못 믿어?”
“그, 그건 아닌데…! 너무 힘드시지 않을까 해서요….”
“에이…. 이거 힘들면 프로듀서 못하지.”
그리고는 몇 번이나 확인을 받은 뒤에야, 정말로 확신을 가진 듯 눈을 번뜩이며 말해왔다.
“합숙할게요…!”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느낌이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러나저러나 좋은 쪽으로 흘러가니, 어렵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
얼마 후.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세진 길드 사옥에 들른 나는, 블랙 로즈 프로듀싱에 관하여 이혜리를 비롯한 세진 길드의 사람들과 미팅을 하고 있었다.
“저희 팀은 현재 약 87만 포인트로 2위에 있습니다. 최근 퀸즈가 게이트 활동을 전혀 안 하고 있어서, 활동이 확정된 마녀의 성 토벌까지 최대한 포인트를 좁혀두는 게 목표입니다.”
헌터 팀 랭킹은 일종의 공적치를 환산한 포인트를 얼마나 모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시즌 개념으로 매년 8월 1일에 초기화가 되며, 현재 1위 팀인 퀸즈의 포인트는 100만을 조금 웃돌고 있다.
“마녀의 성 전까지 예정된 게이트가 3개라고 적혀있는데…. 이거 맞습니까?”
“A급 두 개에 S급 한 개로, 총 3번 예정돼있습니다.”
“음…. 일정이 너무 빡빡한 거 같은데. 마녀의 성 이후로 뺄 수는 없는 겁니까?”
블랙 로즈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임대섭은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블랙 로즈를 맡아온 그는, 한참 어린 나에게도 꼬박꼬박 존칭을 붙여가며 상황을 설명해왔다.
“사실 그러고 싶은데…. 애들이 꼭 마녀의 성으로 1등을 달성하고 싶어하네요.”
“흐음….”
나는 블랙 로즈 멤버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줄곧 1위에 빛나던 블랙 로즈는 퀸즈의 등장 이후로 만년 2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창 전성기를 누릴 나이인 지금 1위를 달성하지 못하면, 앞으로 다시는 1위를 넘보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그동안 쌓아온 게 있으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아직 전성기라 부르는 나이에 들어서지도 않은 퀸즈를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너무 뒤 없이 지르는 것 같아서 좀 그렇군요. 마녀의 성 토벌에 1등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퀸즈가 가만있진 않을 텐데, 그때부턴 진짜 수명을 갈아 넣어야 합니다.”
경쟁의 세계는 냉혹하다.
블랙 로즈는 1만 점 차이로 마녀의 성 토벌에서 순위를 앞지르고 싶은 것 같은데,
이 정도는 퀸즈가 게이트 토벌을 재개하면 금세 뒤집힐 차이였다.
“마녀의 성이 평범한 S급 게이트도 아니고, 냉정하게 풀 컨디션으로 덤벼도 애매해요. 이건 멤버들을 다시 설득해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
“직접 설득해보면 되겠네.”
줄곧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혜리가 선뜻 말을 꺼내왔다.
“어서 들어와.”
그리고는 바깥에 손짓하며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벌컥─
이윽고 문이 열리며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꽂혔고,
“실례합니다.”
나는 예정에 없던 그녀의 등장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공인나!’
블랙 로즈의 리더이자, S랭크 헌터인 공인나였다.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단발을 찰랑거리며 들어온 그녀는 세진 길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곤 살짝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계신다고 하길래 찾아왔어요. 방해된 건 아니죠?”
“방해될 게 뭐 있습니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공인나도 자연스레 미팅에 참여하였고.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그, 우리 일정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회의 내용을 설명하던 임대섭은 내 눈치를 살피며 일정이 빡빡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그래요?”
자신들의 계획에 태클을 건 게 썩 마땅찮았는지, 공인나가 묘한 눈빛으로 내게 슬쩍 시선을 보내왔다.
그 순간.
“그거에 관해서, 도지혁 프로듀서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좀 들어보죠?”
이혜리가 은근슬쩍 끼어들며 대화를 유도해왔다.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능력껏 설득하라는 의미였다.
‘얼마든지.’
“…방금 들으신대로, 저는 이 일정이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마녀의 성까지 체력을 비축해도 모자라다 생각하거든요.”
나는 공인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블랙 로즈의 기량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그 이후의 활동을 고려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마녀의 성은 상당히 어려운 게이트입니다. 그런 대형 이벤트를 앞두고 리스크를 짊어지며 무리하게 일정을 짤 필요가 없죠.”
그러자 공인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또박또박 반박해왔다.
“저희 팀 목표가 어디인지는 아시죠?”
“예. 1위지 않습니까?”
“그 1위를 차지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나요?”
맞는 말이다.
나보다 헌터 팀 랭킹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 일정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럼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인나 씨는 얼마나 1위에 있고 싶으십니까?”
“무슨….”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듯 말끝을 흐리는 공인나.
나는 실질적으로 블랙 로즈가 1위에 등극할 수 있는 확률을 떠올리며 설득을 이어나갔다.
“블랙 로즈가 1위로 시즌을 끝낼 수 있는 확률은 상당히 낮습니다. 지금이야 천화 길드가 쓸데없이 퀸즈를 외부로 돌리고 있지만, 당장 일주일에 게이트 하나씩만 토벌해도 무난하게 1위로 마무리하게 되겠죠.”
이번엔 공인나도 반박하지 않았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에.
“그래서 여쭤보는 겁니다. 바짝 노력하고 한 일주일만 1위에 머무를 건지, 아니면…. 정말 죽을 각오로 노력해서 1위로 시즌을 마무리할 건지.”
“…1위로 시즌을 끝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공인나는 1위를 바라고 있었고,
나는 사실상 설득이 끝났다 생각하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럼 고집 그만 피우시고, 프런트를 따르시면 되겠네요.”
“…뭐요?”
“당장 여기 계신 임대섭 프로듀서님만 해도 그렇습니다. 블랙 로즈를 거의 10년 가까이 이끌어오신 분이, 어떻게든 1위로 만들겠다고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제게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프로듀서는 스포츠로 따지면 감독에 해당한다.
원래 팀을 이끌던 감독이 다른 감독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프로듀서님도 이 일정은 무리라고 판단하셨고, 프로듀서님을 보조하는 프런트에서도 일정이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맞지 않습니까?”
“…그건 맞긴 한데….”
임대섭의 동의까지 얻어낸 나는, 공인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그렇다네요.”
그런데….
“…그럼 어떡해요.”
공인나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며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눈앞에 기회가 왔는데, 그냥 가만있어요? 어떻게 그러냐고요!”
그녀는 정말로 1위를 갈망하고 있는 듯했다.
이미 0.1%에 해당한다는 S랭크 헌터에, 넘보기도 힘든 2위 팀을 이끌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정상’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이 아니면 평생 1위를 못 달지도 몰라요!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가?
오직 정상을 갈망하는 공인나의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나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래서 제가 왔잖습니까. 블랙 로즈 1위 보내려고.”
“저기요…!”
“그리고. 뭔가 착각하신 거 같은데…, 저는 1위를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정을 바꾸라고 말했지.”
“…!”
큭큭 소리 죽여 웃음을 흘리는 이혜리를 무시한 나는, 허를 찔려 멍하니 바라보는 공인나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제가 반드시 1위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그건….”
공인나와 임대섭은 믿기 어렵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뻔뻔한 미소를 생긋 지으며 두 사람에게 가벼이 말을 건넸다.
“회의 계속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