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44화 (44/165)
  • ‘홍유라가 왜?’

    뜬금없는 그녀의 방문에 황급히 사무실로 향하던 나는, 그녀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동영상 사건 이후, 나는 지금까지 홍유라와 별다른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다.

    제 발로 찾아왔던 임아린이나 우연히 엮여온 설주희와 다르게 특별한 접점이 없어서 간간이 소식을 듣는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설주희 때문인가…?’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설주희와 다툰 문제로 찾아왔다는 것.

    평소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돈독히 지내온 세 사람이었기에, 설주희와 다퉜던 일이 홍유라의 귀에도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임아린이 설주희와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걸린다.

    홍유라가 알았더라면 분명 임아린도 알았을 텐데, 그녀는 단 한 번도 설주희와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그렇게 머리를 굴리며 안내받았던 사무실에 다다르자, 문앞에서 웬 익숙한 얼굴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프로듀서님! 오랜만에 봬요!”

    줄곧 홍유라를 담당해온 매니저였다.

    “언니가 누굴 만나러 왔나 했더니…. 프로듀서님이셨네요!”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요?”

    가벼운 악수와 함께 안부를 나눈 나는, 사무실 안쪽을 슬쩍 가리키며 그녀에게 용건을 물어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어라? 프로듀서님도 모르세요?”

    그러자 그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더니, 스케줄을 가기 전에 잠깐 들른 거라고 이야기해왔는데….

    ‘또 스케줄이야?’

    개인 훈련 시간은 있는 건지 살짝 걱정된 나는, 길드 내부 사정을 알아볼 속셈으로 슬쩍 떠보았다.

    “스케줄이 그렇게 많아요?”

    “어우…. 장난 아니에요. 프로듀서님 나가시고, 완전 고삐 풀렸다니까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길드에 관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꺼내왔고,

    천화 길드가 뜬금없이 사업의 다양성을 들먹이며 기존 방식을 뒤엎곤 새롭게 팀을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내가 나가기만 기다린듯한 느낌이었다.

    ‘수상한데….’

    체제가 달라졌으니, 방향성이 달라지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나가자마자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고생이 많네요.”

    “에이, 제가 뭐 고생하는 게 있나요.”

    그렇게 다시 한번 천화 길드에 대한 의심을 쌓은 나는,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며 사무실 안쪽을 들여다보자….

    “이야기는 다 했니?”

    우아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슬쩍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유라야.”

    홍유라였다.

    *

    “…….”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사무실 내부.

    묘하게 홍유라가 나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동시에 내게 어필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기분 탓인가?’

    붉은 머리카락 가볍게 풀어헤친 그녀는 몸매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베이지 색 원피스에 끈으로 만들어진 샌들을 신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걸 싫어해서 평소에 펑퍼짐한 옷을 즐기던 그녀는 절대 입지 않던 스타일이다.

    “얼굴 좋아 보이네.”

    그때, 홍유라가 선뜻 말을 건네왔다.

    “새로운 애들은 어때? 잘 따라줘?”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어왔지만, 은연중에 내비치는 희미한 불쾌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직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좋지 않은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굳이 찾아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일단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넌 요즘 어때? 들어보니까, 대외 스케줄만 엄청 늘었다던데.”

    “방송 스케줄이 많이 늘긴 했지. 그래도 꽤 할 만해. 몸 다칠 일도 없고, 위험하지도 않고….”

    그녀는 헌터보다는 연예인에 가까운 최근의 삶도 꽤 만족스럽다는 식으로 말해왔는데….

    ‘거짓말이구나.’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지내온 홍유라는, 누구보다 연예인과 맞지 않는 여인이었기에.

    홍유라는 퀸즈의 독보적인 싸움꾼이다.

    퀸즈의 멤버들 중에서 가장 성숙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도 그런 면이 있지만, 실제론 필드에서 검을 휘두를 때 가장 기뻐하는 전투 중독자다.

    심심하면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게 취미인 그녀가, 가식적인 웃음이나 짓고 다니는 방송가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불 보듯 뻔한 거짓말이다.

    “훈련은? 개인 훈련할 시간은 좀 있어?”

    홍유라는 내 물음에 찔린 듯 살짝 표정을 굳히더니,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한 미소를 띠며 답해왔다.

    “아쉽게도 훈련장에 갈 시간이 없네. 스케줄이 워낙 많아서, 요즘 운동도 겨우 하는 실정이야.”

    “…필라테스?”

    “필라테스는 접었어. …할 이유가 사라졌거든.”

    묘하게 가시가 섞인 그녀의 말에 조용히 끄덕인 나는, 적당히 화제를 돌려 본론을 꺼내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직접 찾아온 거야?”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홍유라는 자주 들고 다니던 명품 가방에서 웬 작은 서류 봉투를 꺼내더니, 내 쪽으로 슬쩍 들이밀어 왔다.

    “이게 뭔데?”

    “내 진단서야. 주희 거랑 아린이 것도 같이 들어있어.”

    ‘진단서?’

    진단서랑 무엇인가.

    환자의 대한 의사의 소견이 적힌 증명서 아닌가?

    그녀가 건네온 봉투 구석에 찍힌 교단 부속 병원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잠자코 봉투를 건네받으며 슬쩍 되물어보았다.

    “…어디 안 좋아?”

    그러자.

    “…조금.”

    홍유라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왔고,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봉투를 열어 진단서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

    진단서를 쭉 훑어보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상기 환자는 세뇌 암시 계 정신 간섭 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특정 인물에 강한 혐오감을 통해…… ]

    무려 퀸즈의 멤버들이 정신계 공격에, 그것도 ‘특정 인물’에 관한 정신 간섭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게…뭐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퀸즈의 멤버들이 정신계 공격에 당했다는 건 믿기가 어려웠다.

    세 사람은 현재 세계관 최강으로 손꼽히는 S급 헌터들이다.

    하찮은 정신계 공격에 당할 정도로 어중간하게 키우지도 않았고, 당할 실력도 아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런 그녀들에게 정신 간섭을 시도했고, 또 그걸 성공해냈단 말인가?

    “…암시가 너무 깊게 박혀있고, 너무 강한 세뇌가 걸려 있어서 교단에선 해결할 수 없대.”

    홍유라는 담담한 말투로 교단의 전문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왔다.

    자신들은 오래전부터 세뇌에 당해왔을 가능성이 크고, 어느 기점을 계기로 암시가 발현하게 됐는데….

    “…그게, 너야.”

    그 시발점이 나라고.

    “…….”

    머리가 혼란스럽다.

    혼란스럽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천천히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복잡한 마음을 다스린 나는, 애써 차분함을 되찾으며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누군가 퀸즈 멤버들에게 암시를 심어두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그 암시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그 암시가 나를 혐오하게 되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퀸즈의 세 사람이 인지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상당한 실력자가 움직였다는 뜻인데,

    우리 사이를 이간질해서 대체 누가 이득을 본다는 말인가?

    ‘천화 길드인가?’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

    홍유라로부터 권유를 받은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되물어보았다.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러자.

    “…그게….”

    그녀가 어딘가 말하기 어려운 듯한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 순결함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줘.”

    “뭐, 뭐?”

    대체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걸까.

    순결함이 어째?

    “우리가 지금 널 안 좋게 생각하는 건, 모두 네가 우리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네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고, 그걸 인지할 수 있다면 암시가 풀릴 가능성이 있어.”

    “아니, 무슨 그런….”

    “…네가 지금까지 일부러 우리하고 선을 그었던 거 다 알아.”

    “…어?”

    “우리도 다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네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온 거야. 솔직히 말하면…, 우린 널 공유하는 것까지 생각해왔어.”

    순결함에 이은 일부다처.

    연이어 터지는 폭탄 발언들에 잠시 넋을 놓아버린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친 건가…?’

    나도 남자인 이상 흔히 말하는 ‘하렘’이 싫은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당황스러웠다.

    아니, 외려 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네 순결함을 확인하고 싶어.”

    쐐기를 박는 홍유라의 발언에 무심코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희미한 두통에 이마를 붙잡곤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그래. 아니…. 다 재껴두고.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건데?”

    “…순결성 체크 키트를 준비해뒀어.”

    “…무슨 키트…?”

    홍유라는 순결성 체크 키트에 대해 담담히 설명해왔다.

    유니콘의 피를 이용한, 대체 왜 만들었는지 모를 정신 나간 아이템이었다.

    “염치없지만…, 부탁해.”

    홍유라의 간곡한 부탁에 잠시 아찔함을 느낀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문제들을 뒤로한 채, 그녀들에게 협조할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암시를 풀 수 있으면…, 돕는 게 맞겠지.’

    순결함은 나름 자신 있어서, 그 순결성 키트니 뭐니 하는 건 충분히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이유가 전부 암시 탓이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 굳이 해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다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점이 아쉬웠다.

    나는 새로운 팀을 맡고 있고, 퀸즈의 라이벌인 블랙 로즈와도 협력이 예정돼있다.

    예전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다.

    ‘…내가 너무 늦게 눈치챘구나….’

    차마 정신계 공작을 의심하지 못한 나는 안타까움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해피 엔딩으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

    “…….”

    그렇게 홍유라를 떠나보낸 후.

    홀로 벤치에 앉아 훈련장 바깥을 바라보던 나는, 잠시 미뤄두었던 문제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고 있었다.

    ‘…진짜 골치 아프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았다.

    퀸즈를 덮친 암시도 그렇고, 그 암시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한다.

    ‘분명…. 그 동영상하고 관련이 있어.’

    내가 봐온 동영상은 교묘한 합성이나 무언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제로 촬영한 동영상이라고 밝혀졌다.

    처음엔 그런 능력자가 있을 거라곤 조금도 의심치 못했는데, 세뇌 사건을 되짚어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실체에 가까운 환술에…. 세뇌까지 사용하는 능력이라….’

    원작 소설에선 등장하지 않은 능력이지만, 실제로 나타난다면 굉장히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 아린이도 환영 만들 수 있지 않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알고 보니 환술과 비슷한 걸 다루는 능력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에이. 아니겠지.”

    찰나의 순간, 혹시 임아린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살짝 스쳤던 나는, 이내 의심을 거두었다.

    그녀를 의심할 근거보다, 아니라고 생각될 요소가 훨씬 더 많았기에.

    그녀는 엄연히 원작 소설에도 등장하던 선역.

    물론 아무리 사람 속을 알 길이 없다곤 하나, 상대는 10년 동안 지내온 임아린이다.

    그녀는 그런 짓을 저지를만한 성격이 못 된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오며 임아린의 마법을 베껴온 나는, 그녀가 범인일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녀의 마법 중에 세뇌 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환영 마법은 단순한 동작만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애초에 임아린이 나를 음해한 범인이라는 건 성립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한 10서클쯤 되면 모를까.’

    장담컨대, 그녀는 절대 범인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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