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탁…
타오르는 장작의 소음이 굴 내부에 잔잔히 울려 퍼진다.
그 메마른 따뜻함에 넋을 놓으며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시선을 옮겨 옆자리의 진서원을 바라보았다.
“…….”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대충 말린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무릎을 끌어안곤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1일 차에 호흡법을 떼다니….’
진서원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녀가 쉽게 집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조금 수를 쓰긴 했으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호흡법을 익힌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설주희도 거의 일주일이 걸렸는데…. 재능은 재능이라 이건가?’
비록 설주희는 맨땅에 헤딩하듯 무식하게 수련을 시작했긴 했지만, 중간부턴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내게 보조를 받으며 훈련을 진행했다.
그렇게 까먹은 시간을 제외하고도 총 이틀이 걸렸으니….
고작 하루 만에 완벽히 익혀버린 진서원은 굉장히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진서원은 주인공이 될 수 없을까?’
원작 소설 ‘최강고수’의 주인공인 설주희는 엄청난 잠재력을 바탕으로 극의 중심이 되어갔다.
주인공 보정이라는 걸 고려해도, 흔히 사용되는 회귀, 빙의, 환생 같은 치트키조차 없이 오직 주먹만으로 세계를 구해냈다.
뭐, 끝엔 작가가 미쳐버려서 막장 엔딩을 찍긴 했지만.
어쨌든 소설 속 설주희의 행보를 따져보면, 진서원도 주인공이 못 될 게 없었다.
재능도 출중하고, 일단은 선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믿을만한 동료도 있다.
반쪽짜리 가짜 주인공이었던 나는 조연으로 남게 됐지만….
진서원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프로듀서님.”
그때, 내 시선을 눈치챈 진서원이 슬쩍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눈을 마주치며 넌지시 물어왔다.
“…설주희는, 얼마나 걸렸어요?”
“…으, 응?”
앞뒤 없이 내던져진 뜬금없는 질문에 살짝 당황한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되물어보았는데….
“설주희는 갑자기 왜?”
“…사진.”
“사진…?”
“…같이 찍은 사진. 저기서 봤어요.”
“아.”
나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고,
“글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척, 조심스레 말을 골라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비슷했던 거 같은데?”
그러자.
“…얼마나요?”
진서원이 묘하게 집요한 모습을 보이며 다시 한번 질문을 건네왔다.
아무래도 설주희를 경쟁 대상으로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사실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현재의 진서원이 더 뛰어나다.
튜터인 나의 경험치나 커리큘럼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빠른 건 빠른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걸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게 맞을까?
이곳에 온 이유는 진서원의 성장을 앞당기기 위함이다.
설주희가 더 빨랐다는 말을 한다면 진서원에게 더 강한 동기를 부여해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자라나는 새싹을 잘라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한마디가 진서원의 앞길을 결정하는 것이다.
“음…. 얼마나 걸렸더라?”
은근슬쩍 시선을 옮긴 나는, 따가운 진서원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녀가 살아온 배경을 되짚어보았다.
그녀는 지금껏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무엇하나 넘치는 게 없는, 말 그대로 모든 게 부족한 삶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매사에 흥미가 없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는데….
유일하게 ‘떳떳한 직업을 가진 어엿한 어른’이라는 자아를 갖는 것엔 큰 호기심을 보여왔다.
즉, 정말로 모든 것에 흥미가 없는 게 아니라, 몰라서 흥미가 생기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설주희에게 경쟁에 흥미를 보였으니….
제대로 북돋아 주는 게 맞으리라.
“일주일인가?”
“…일주일?”
“거의 5일은 아무 도움 없이 혼자 수련하긴 했는데…. 그거 빼도 이틀 정도 걸렸어.”
진서원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시선을 거두곤, 활활 타오르는 장작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나는 눈을 흘기며 그녀를 몰래 훔쳐보았다.
“…….”
꾹 다문 채로 조금씩 호선을 그리는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
아무래도 자신이 더 빨랐다는 사실이 썩 기뻤던 모양이다.
‘귀엽네.’
보기 드문 그녀의 미소를 발견하곤 괜히 들뜬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다음 훈련은 좀 힘들걸?”
은근슬쩍 자극을 주며 동기를 끌어올릴 속셈이었다.
“…뭔데요?”
아니나 다를까, 작전에 걸려든 진서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싹 지우며 질문을 건네왔고,
나는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다음 훈련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
*
도원향에서의 훈련 2일 차.
과거의 설주희와 경쟁이 붙은 진서원은 의욕을 불태웠고, 덕분에 훈련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오늘 훈련은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경공에 대해 배울 거야.”
원작 소설인 ‘최강고수’에서의 경공은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이는 일종의 액티브 스킬로 묘사돼있다.
흔히 사용되는 초상비, 답설무흔, 등평도수, 허공답보, 이형환위 등 꽤 세세하게 단계가 나뉘어 있으며,
오늘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자, 풀잎 위를 내달릴 수 있는 경지인 초상비(草上飛)가 목표다.
“술래잡기 알지?”
“…술래잡기?”
경공을 수련하는 방법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경험상 술래잡기만큼 적절한 게 없다.
술래잡기야말로, 자신의 의지를 속도로 표현하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기에.
“이 모래주머니를 차고 날 잡으면 돼. 잡으면 거기서 훈련 끝이고, 못 잡으면…. 잡을 때까지 계속하는 거야. 쉽지?”
“…설주희는 얼마나 걸렸어요?”
진서원은 훈련의 난이도보다 설주희를 이기는 것에 더 관심을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이 훈련은 설주희를 이기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정확히 6시간 만에 경공을 익히고 나를 잡아버렸기에.
당시 한창 당근과 채찍의 원리를 깨달았던 나는 훈련 보상으로 ‘소원’을 내걸었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녀가 기를 쓰고 달려드는 바람에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소원으로 놀이공원에 갔었지, 아마?’
잠시 추억을 되돌아보며 향수에 젖었던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진서원에게 대답했다.
“설주희 기록은 앞으로 네가 훈련을 마칠 때마다 알려 줄게. 괜히 신경 쓰이면 방해되잖아.”
그러자 그녀는 내 뜻을 이해한 듯 잠자코 수긍해왔고, 나는 가볍게 허리를 비틀며 보상에 관한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이번 훈련엔 보상이 있어.”
“…뭔데요?”
“도지혁 자유이용권 1개. 불가능한 거 빼고 다 들어주는 소원권이지”
소원 이야기에 눈을 뒤집었던 설주희와는 달리, 진서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른 보상을 내걸까 생각했으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소원권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
“내공을 쓰든 뭘 하든 어떻게든 빠르게 움직여서 날 잡으면 돼. 시작!”
타앗─!
진서원은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 도지혁의 모습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빠르다.’
도지혁의 경지는 물 위에 떠오른 풀을 밟고 내달린다는 의미의 등평도수.
설주희와 오랫동안 지내오며 그 능력을 완벽하게 복사해온 도지혁은 이미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타앗─!
진서원은 도지혁을 따라잡기 위해 재빨리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쪽이야!”
“…읏…!”
기본적인 경공조차 사용할 줄 모르는 그녀가 단번에 도지혁을 붙잡기란 쉽지 않았다.
타아앗─! 타아아앗──!
‘너무 빨라…!’
“3시간 지났네.”
“…하아…하아…!”
연이은 추격으로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진서원은 숨을 헐떡이며 도지혁을 노려보았고,
반면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멀쩡한 모습으로 근처의 바위에 쪼그려 앉아있던 도지혁은, 진서원을 유심히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서원아. 너는 ‘능력’이 어떤 거라고 생각해?”
“…?”
“나는 우리가 가진 ‘능력’이라는 게, 일종의 패키지 선물이라고 생각하거든. 레벨이 오를수록 하나씩 열리는, 그런 거.”
진서원은 도지혁의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의미 없이 하는 말이 아니리라 생각하며 잠자코 경청하였다.
“뭐, 내 표현이 틀렸을 순 있는데. 요점은, 우리가 지닌 ‘능력’ 자체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미 완성된 능력은 네 머릿속에 있고, 그걸 많이 떠올려낼수록 강해지는 거지.”
‘내 능력은 이미 완성돼 있다고…?’
진서원은 처음 각성하여 마주했던 자신의 능력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천마신공이라는 낯선 이름의,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의 능력을.
그리고는 설주희의 능력으로 유명한 빙백신공을 떠올리며 도지혁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럼. 천마신공이랑, 빙백신공 중에 뭐가 더 강해요?”
그러자.
“글쎄….”
도지혁이 잠시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곧 답을 찾은 듯 넌지시 말해왔다.
“보통은 천마신공이 더 강하지.”
극한의 파괴력과 최강의 무(武)를 추구하는 천마신공은 여러 무공 중에서도 단연 으뜸.
진서원은 무심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고,
“…….”
이내 한가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말았다.
도지혁이 믿고 있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스윽─
자세를 낮춘 진서원은 도지혁을 바라보며 깊숙이 잠들어있던 능력을 끄집어냈다.
파직──! 파지직───!
그러자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내공들이 새카만 스파크가 되어 온몸에 튀어 올랐고,
“!”
도지혁은 갑자기 달라진 진서원의 기세에 흠칫 놀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잡는다.’
능력은 의지의 발현.
강함을 추구하는 천마의 힘은, 순수하게 강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발현한다.
원작의 ‘천마’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매개체로 힘을 끌어올렸지만,
진서원은 도지혁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순수한 의지만으로 힘을 끌어올렸다.
파아아앗───!!!
순식간에 접근하여 손을 휘두르는 진서원.
“…!”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도지혁은, 심상치 않은 그녀의 속도에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몸을 내던졌다.
타아앗──!
파아아앗───!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진서원의 모습은, 소설 속 천마 그 자체.
‘빠르다!’
도지혁은 무심코 침을 꼴깍 삼키곤 노련함을 앞세우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나갔다.
그러나….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로 도망 다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윽….”
연이은 충격에 환상통을 느낀 도지혁은 순간 주춤거리고 말았고,
와락─!
풀썩─
곧이어 덮쳐온 진서원에게 붙잡혀, 그녀의 밑에 깔리고 말았다.
“아…. 잡혔다.”
도지혁은 그 짧은 새에 성장해버린 진서원에 내심 놀라워하며 손목에 달린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정확히 3시간하고도 2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세상에….’
압도적인 성장 속도에 혀를 내두른 도지혁은 대자로 뻗으며 배를 깔고 앉은 진서원을 올려다보았다.
“설주희보다 딱 3시간 빨랐어. 진짜 대단한데?”
그런데….
“…하아…하아….”
진서원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보였다.
“…서원아?”
“…하아…하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헐떡이는 숨과 초점을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
그녀는 극도의 흥분감에 취해있었다.
‘…내가…. 내가 잡았어…!’
“서원…읏…!”
진서원은 양손을 들어 땅을 짚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 서원아…?”
“…하아…하아…!”
여유로움이 가득하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당황으로 물들어 살짝 일그러져있었고,
그 당황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인지함과 동시에, 누가 우위인지 깨달은 그녀는 도지혁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잡았으니까…!’
그 순간.
딱─!
“아읏…!”
이마를 덮치는 충격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서원은, 몸을 일으키곤 이마를 쓱쓱 매만지며 도지혁을 내려다보았다.
“정신 좀 들어?”
“…으….”
“나 좀 일어나자.”
진서원은 짧은 사과와 함께 얌전히 비켜주었고,
십년감수한 도지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키곤 옷매무새를 단단히 추슬렀다.
훈련 2일 차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