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원이 훈련복으로 갈아입는 사이.
잠시 굴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낮은 바위에 앉아 지천에 깔린 은은한 복사꽃 향기를 음미하며 예전 일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여길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래 전, 설주희가 한창 힘을 각성하여 실력을 쌓아갈 무렵.
나는 그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원작 소설 속에 등장하던 도원향을 찾아 나섰다.
원작 소설에선 설주희가 어느 사건을 해결하고 힌트를 얻어내며 찾아낸 곳이었는데,
다행히 십이간지가 적힌 커다란 비석이라는 특이한 설정과 작가가 지명을 남겨둔 덕에 생각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었고, 곧바로 설주희와 이곳에 틀어박혀 수련을 시작했다.
그땐 나도 설주희도 살짝 미숙하던 시절이라 여러모로 헤매기도 했었는데….
원작을 따라 하며 훈련을 진행하느라 거의 일주일을 아무 소득 없이 까먹기도 했고,
온천에 설치해둔 가림막이 떨어진 탓에 서로의 알몸을 목격한 일로 다투며 며칠을 날려 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부터 설주희와 부쩍 친해졌던 거 같다.
…이젠 다 부질없게 됐지만.
“…왔어요.”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진서원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나는, 별생각 없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평소 얼굴 대부분을 덮고 있던 갈색 단발을 반 묶음으로 정리한 그녀는 눈처럼 새하얗고 감정 없는 인형같이 정갈한 외모를 시원하게 드러냈는데….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꽤나 과격한 옷차림을 걸치고 있었다.
평소에 후드나 훈련복으로 살갗을 꽁꽁 싸매고 다니던 그녀는 무려 쇄골이 시원하게 파인 검은색 탱크탑과 아랫배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산 거야…?’
새카만 상하의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속살에 잠시 눈이 멀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옷인데…. 새로 샀어?”
그러자.
진서원이 묘하게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곤 아랫배를 슬쩍 가리며 고개를 끄덕여왔다.
“어…. 그래. 예쁘네. 수련하기 딱 좋게 생겼어.”
나는 적당히 칭찬하며 애써 화제를 끝내버렸는데,
“…….”
진서원은 그런 내 칭찬도 썩 마음에 들었는지, 묘하게 만족스러운 낯빛을 띠며 조심스레 눈을 마주쳐왔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우리는 본격적인 훈련을 위해 근처에 있는 폭포로 향했다.
콰아아아─────
내부가 훤히 내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거대한 못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 하나.
그 폭포수 아래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수려하게 조각된 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리 훈련할 장소다.
“저기까지 갈 거야. 어서 들어가자.”
물에 젖을 걸 대비하여 신발과 양발을 고이 벗어둔 나는, 뭉뚝한 자갈을 밟으며 물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첨벙…첨벙…
발 끝에서 퍼져 나가는 청량함에 무심코 몸을 부르르 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진서원을 바라보았다.
“어서 들어와.”
그런데….
“…….”
무슨 일인지, 진서원이 묘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물 무서워하나?’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에 잠시 당황했던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자,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어서 신발 벗고 들어와. 여기 허벅지까지밖에 안 와.”
그러자 진서원이 내 손을 흘끔 바라보더니….
스윽─
내 손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드물게 앓는 소리를 해왔다.
“…진짜죠?”
아무래도 물을 무서워하는 게 맞았던 거 같다.
‘물을 무서워하는 천마라니.’
투욱─ 투욱─
손을 꼭 붙잡고 반대 손으로 신발과 양말을 벗어낸 그녀는, 마치 독극물에 발을 집어넣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발씩 천천히 물속으로 들여왔다.
꼬오오옥……
차가움에 반응하는 듯 점점 강하게 조여드는 그녀의 손아귀.
나는 그녀가 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손을 잡아끌며 훈련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저쪽에 평평한 돌조각 보이지? 오늘은 저 위에서 훈련할 거야.”
“…무, 물속에서요?”
살짝 겁을 먹은 듯 말까지 더듬어대는 진서원.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가학심이 솟아난 나는, 살짝 과장을 보태며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TV에서 자주 나오잖아? 폭포수 맞으면서 수련하는 장면. 오늘은 네가 물속에서 숨 쉴 수 있을 때까지 저기에 앉아있을 거야.”
그러자.
우뚝─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정말요?”
마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된 아이 같았다.
‘귀엽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린 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도 같이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같이요…?”
“싫어? 혼자 하려면 아마 일주일은 걸릴 텐데…, 혼자 일주일 동안 물 맞고 싶으면 빠져 줄게.”
“…그, 그건 아닌데요….”
진서원은 혼자 수련하긴 싫었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첨벙거리며 다급히 따라붙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주며 오늘 훈련의 목적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오늘 훈련의 목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폭포수를 맞으며 호흡할 수 있게 되는 것.
다만 단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의 호흡이다.
예전부터 사람 머리에 차가운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강제로 잠들지 못하게 하는 물고문이 존재했는데, 이 원리는 폭포수를 맞으며 훈련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차가운 폭포수를 맞으며 정신을 집중하기란 쉽지 않은 일.
집중을 위해선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호흡을 통해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지만, 얼굴에 물이 쏟아지는 상황에선 단순히 호흡을 가다듬는 것조차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호흡을 연마하는 게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도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거다.
“이곳에선 바깥보다 시간이 몇 배정도 느리게 흘러가. 우리가 2박 3일을 잡았으니까…. 대충 열흘 정도 될 거야.”
“…네?”
진서원은 이곳에 열흘이나 갇혀있을 거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이곳이 현대 문명보다는 몸이 덜 편할 수밖에 없으니, 놀라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여기서 한 달을 지내본 입장으로선, 열흘이면 꽤 할만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목표는 이틀 안에 호흡하는 거야. 더 빠르면 좋고.”
“…….”
“할 수 있지?”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진서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보여왔고,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천천히 폭포 쪽으로 다가갔다.
콰아아아아아───────
무서운 기세로 물을 쏟아내는 폭포.
아무리 작은 폭포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 기세가 엄청난 법이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내뱉은 나는 희미하게 떨려오는 진서원의 손을 잡아당기며 천천히 폭포수 아래의 돌조각으로 다가갔고,
꼬오옥……
그녀는 혹시라도 손을 놓칠세라, 손을 꽉 쥐며 나를 따라왔다.
*
쏴아아아아……
쉴 새 없이 머리에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
어느 정도 적응하긴 했지만, 아직 물에 대한 공포를 씻어내지 못한 진서원은 잔뜩 움츠러든 채로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
진서원은 모든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도지혁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겨우 숨을 쉬는 게 전부인데, 어찌 바른 자세를 취하고 숨을 쉬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에.
‘프로듀서님은 어떻게 하고 있지…?’
반대편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 진서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도지혁을 훔쳐보았는데….
“…….”
그는 거센 물줄기 속에서도 기절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그때.
움찔─
내내 잠잠하던 도지혁의 손이 꿈틀거렸다.
“!”
진서원은 괜히 딴짓하다 걸린 것 같은 기분에 황급히 자세를 바로 고치며 훈련에 집중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푸후….”
그리고 얼굴에 쏟아지는 물줄기 틈으로 겨우 거친 숨을 내쉬며 집중과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던 그 순간.
스윽…스윽…
도지혁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진서원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진서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차가운 물길 속에서 희미하게 전달되는 그의 온기를….
마치 비바람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는 촛불처럼 알량한 따뜻함을 느끼는 게 전부였다.
“…….”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어느덧 60분에 다다랐을 무렵이 지나서도.
스윽…스윽…
도지혁은 여전히 진서원의 손을 주무르는 걸 멈추지 않았고,
‘…뭘 말하고 싶은 건가?’
어느새 진서원은 자신이 물을 무서워하는 것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도지혁의 손장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온 정신을 그에게 쏟아붓고 있던 것이다.
‘…뭐지…?’
그동안 깊게 숙이고 있던 고개는 멋대로 들려 정면을 향하게 됐고,
싸늘하게 식은 피부가 점점 추위에 무뎌졌으며,
쉼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에 맞춰 불규칙하게 뛰어대던 심장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진서원이 느낄 수 있던 건 오직 손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도지혁의 온기뿐.
잘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기 위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듯이, 그의 온기를 더 자세히 느끼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손끝에 집중할 뿐이었다.
“…….”
그리고 그렇게 폭포 속에서 약 2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 가만히 서로의 체온에만 집중하고 있을 무렵.
여유가 생긴 진서원의 머릿속에 잡념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설주희랑도 이렇게 훈련했던 걸까?’
진서원은 굴에서 확인했던 사진으로, 과거 설주희와 도지혁이 함께 수련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는데….
도지혁의 방식이 방식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설주희와 연관 짓게 됐다.
‘…이렇게 손도 잡았겠지….’
사실 진서원에게 있어서 이성과 손을 잡는다는 건 별로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다.
최근까지 성욕이 없다시피 살아온 그녀였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얼마나?’
진서원에게도 질투와 시기심은 존재하였다.
‘얼마나 오래 수련했을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설주희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문파는 다르지만, 능력도 비슷하고, 똑같이 권법을 사용하며, 같은 스승에게 같은 장소에서 수련을 받은 두 사람이다.
비록 명확한 비교 대상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을 모두 가르쳐본 도지혁의 기준으론 충분히 위아래를 나눌 수 있으리라.
그 점을 정확하게 눈치챈 이상….
승부욕이 생기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호흡…. 어?’
뒤늦게 자신이 안정적으로 호흡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진서원은 내심 화들짝 놀라며 앞서 도지혁이 내세웠던 목표를 떠올렸다.
‘이틀…!’
도지혁이 무려 이틀이나 잡았던 훈련을 겨우 몇 시간 만에 해낸 것이다!
‘…내가 설주희보다 빨랐겠지?’
진서원은 분명 도지혁이 자신을 설주희보다 더 우위로 쳐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키워낸 헌터들 중에 단연 으뜸은 파워 랭킹 1위의 설주희일 테니,
그녀를 이긴다면, 사실상 유일무이 최고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최고…?’
소중한 팀원이자, 최고의 제자.
애정에 굶주렸던 진서원은 그 관계성에 짜릿한 감각을 느꼈고,
“…….”
싸늘한 피부를 뚫고 아랫배로부터 올라오는 따스함에 젖어들며, 무심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훈련 1일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