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설주희의 집.
스케줄로 미뤘던 임아린의 정신계 간섭 검사 결과가 나온 이후,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퀸즈의 세 사람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
“이런 짓을 당했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홍유라의 의견에, 홀로 위스키를 홀짝이던 설주희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잡아야지. 어떻게든.”
잔잔한 분노가 깔린 그녀의 목소리.
설주희는 여전히 도지혁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게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치 솟아나는 폭포수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아예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자 잠자코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 도지혁은?”
홍유라도 마찬가지.
그녀도 도지혁에 대한 원망을 지우진 못했으나, 그게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걸 인지하며 최대한 감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검사부터. 그거부터 보고 생각해도 안 늦어.”
설주희가 말한 ‘검사’란 순결성 체크 키트를 말하는 건데….
“주희야…. 아직도 지혁이를 못 믿는 거야…?”
임아린은 그런 설주희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다 밝혀졌잖아…! 그 동영상도, 우리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도, 다 가짜라고…!”
그녀는 드물게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홍유라와 설주희에게 도지혁의 억울함을 대변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해해달라고 하면 지혁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
“아린아. 그건 그렇지만….”
“…임아린. 넌 도지혁이 아무 여자한테나 대주고 다니던 걸레여도 괜찮다 이거야?”
“뭐…?”
“설주희! 말이 너무 거칠어!”
순간 확 끓어올랐던 설주희는 홍유라의 주의에 정신을 차리며 깊게 심호흡을 내쉬었고, 가까스로 감정을 잠재우며 임아린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래도 내 생각은 똑같아. 도지혁이 순결하지 않다면…, 우릴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야.”
세 사람에게 있어서 도지혁의 순결성은 중대사항이었다.
그렇기에 셋이 함께 첫날밤을 보내자고 약속했던 것이고, 홍유라도 설주희에게 반박하지 못한 건데….
“배신했으면…?”
이미 모든 걸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던 임아린은 달랐다.
“지혁이가…. 지혁이가 정말로 더럽혀졌으면…. 지혁이가 아니게 되는 거야?”
그녀는 순결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본질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왜 지혁을 좋아하게 됐는데…! 다 잊어버린 거냐구…!”
하지만.
홍유라는 자신들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아린아….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머릿속에 박힌 암시가 사라지거나, 도지혁이 순결하다는 게 밝혀지기 전까진…. 우리는 전처럼 사랑할 수가 없어.”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배신감에 기인하여 부정적인 감정이 솟아나는 것이니, 배신감의 원천인 ‘의심’ 자체를 지워버리지 않으면 감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럼 나는…?”
유일하게 임아린만은 반박 가능한 논리였다.
그녀도 똑같은 암시에 당했지만, ‘강렬한 사랑’으로 암시를 이겨냈다.
라는 검사 결과를 두 눈으로 목격한 홍유라와 설주희는, 임아린의 반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누가 우리한테 이런 짓을 했는지부터 각자 조사해 보자. 그 키트는 좀 생각해보고.…다들 알았지?”
홍유라는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돌려버렸고,
“응….”
“…알았어.”
임아린과 설주희는 흥분을 잠재우며 잠자코 따라주었다.
분명 겉으로 봐선 여느 때처럼 잘 수습된 것처럼 보였으나….
셋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
서울의 어느 대형 쇼핑몰.
“프로듀서님!”
“일찍 왔네?”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한발 먼저 도착해있던 방한나와 합류하였다.
평소엔 풀어놓던 금발을 예쁘게 땋아 올린 그녀는 어깨 부분이 내비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조여진 허리 라인 덕분에 강조된 흉부와 살짝 드러난 쇄골이 묘하게 선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진짜 말이 안 되네.’
주변의 모든 시선을 끌어당기는 그녀의 압도적인 가슴을 무심코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칭찬해주었다.
“오늘 예쁘게 차려입었네.”
“그, 그런가요…?”
부끄럽다는 듯 헤헤 웃으며 가슴팍에 슬쩍 손을 얹는 그녀.
손을 몇 개는 더 얹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녀의 포용력에 잠시 넋을 놓았던 나는, 힘든 하루가 될 것을 예상하며 그녀와 함께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한나야. 팝콘이나, 간식 같은 거 먹을래? 내가 살게.”
“앗. 괜찮은데….”
“네가 티켓 샀잖아. 이 정도는 사야지.”
“프로듀서님은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는 막 먹고 싶은 건 없네. 그냥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고?”
“음….”
방한나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스낵바에 놓인 메뉴판을 훑어보더니….
“저는 마실 거만 있으면 충분할 거 같아요…!”
이내 음료수면 충분할 거 같다고 답해왔다
그렇게 우리는 콜라 두 잔을 구매한 뒤.
“자. 네 꺼.”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때마침 찾아온 입장 시간에 맞춰 곧장 상영관으로 입장했는데….
‘…무슨 전국 커플 다 모였나?’
주말 오후의 19금 영화라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커플들로 가득했다.
“D…F…. 아. 저 안쪽이에요!”
우리가 위치한 자리는 영화관 정 중앙.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사방팔방 꽁냥거리는 커플들로 둘러싸인 자리였다.
“프로듀서님, 혹시 긴장되세요…?”
“어?”
“꼭 긴장하신 거 같아서요.”
“아니, 그냥 뭐….”
“걱정 마세요…! 저, 이런 거 엄청 좋아하니까, 무서우면 제 손 꼬옥 잡으세요…!”
방한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오며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공포 영화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한 거 같았다.
“…그래, 너만 믿을게.”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광고가 이어지고,
화아아악──
어느덧 캄캄하게 불이 꺼진 전등.
“어떡해, 나 무서워…!”
“오빠 손잡아.”
“웅…!”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근처 커플의 속삭임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콰르릉……!
오늘 보기로 한 영화는 공포 영화에 가까운 스릴러물이다.
담당 여가수와 사귀던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연습생으로 섭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하필 그 여주인공이 살인을 서슴지 않는 사이코패스에 집착이 심한 인물이었고, 덕분에 주인공이 내내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분명….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 어서 일어나. ]
[ …안아서 일으켜줘요. ]
[ …하연아. 우리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
[ ……. ]
[ 하아…. 진짜 마지막이다? ]
영화는 첫 장면부터 애정씬으로 시작되었다.
[ 쪽…. 쪼옵…. 헤웁…. 츄릅…. ]
끈적하게 혀를 섞으며 거침없이 몸을 더듬어대는 스크린 속 두 남녀.
영화관엔 야릇한 소음으로 가득 차버렸고,
‘아니, 스릴러라며…!’
괜히 옆에 앉은 방한나를 의식하던 나는, 속으로 애정씬이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 초인 오빠. 이쪽은 누구예요? ]
[ 아, 인사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이지연이라고 해. ]
[ 처음 뵙겠습니다. 이지연이예요. ]
다행히도 강렬했던 첫 번째 애정씬 이후로는 야릇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고,
여주인공이 등장한 다음부턴 제대로 공포 영화에 가까운 전개로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콰직──! 콰직──!
[ 끄아아아아악……! ]
“…히익…!”
문제는 사실 방한나가 벌벌 떨 정도로 공포 영화에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다.
‘뭐? 공포 영화를 좋아해?’
“히끅…!”
그녀는 아예 눈을 가려버린 채로 스크린을 등지며 벌벌 떨어댔고,
끝내 보다 못한 나는, 슬쩍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아주었다.
꼬옥…
그러자 그녀가 크게 몸을 움찔거리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왔는데….
눈가가 반짝거리는 게, 아무래도 눈물까지 흘렸던 모양이었다.
“(나갈까?)”
나는 방한나에게 영화관 바깥을 가리키며 조그맣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방한나가 스크린과 나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이내 울상을 지으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나가자는 의미였다.
*
“괜찮아?”
“…네….”
영화관을 빠져나온 방한나는 굉장히 우울해했다.
기껏 준비해온 계획이 처음부터 어긋나버렸기에.
‘이러면 안 되는데….’
방한나가 준비해온 영화는 선정성이 높기로 소문난 커플 메이커였다.
남녀가 함께 보면, 반드시 모텔로 직행한다는 후반 애정씬이 하이라이트인 영화였는데….
하필 그 장면이 나오기도 전에 빠져나와 버려서,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으….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럴 수 있지. 나중에 다시 보면 되잖아. 그러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마. 응?”
물론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던 도지혁은 방한나를 위로해주었고, 그녀의 기분을 북돋아 주기 위해 조금 이른 저녁을 먹자고 이야기했다.
“아 맞다. 근처에 가고 싶은 곳 있었다며. 늦게 가면 사람 많을지도 모르니까, 조금 일찍 갈까?”
“저녁이요…?”
“응. 사실 나도 배가 좀 고팠거든. 거긴 어디로 가야 해?”
방한나는 외려 먹잇감이었던 도지혁에게 위로를 받으며 금세 회복했고,
‘그래, 방한나. 아직 기회는 남아있어…!’
도지혁을 이끌고, 쇼핑몰 근처 먹자골목에 위치한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 엄청 맛있대요…!”
“이거, 술집 아냐?”
정확히는 술집에 가까운 식당이었다.
“마, 맞긴 한데…. 치, 친구들이 밥 먹으러 자주 온대요!”
“…그래?”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테이블마다 칸막이와 입구가 따로 설치된 일종의 룸 술집이었다.
“요즘엔 이런 곳이 유행인가 봐?”
도지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내심 잔뜩 긴장한 방한나는, 묘하게 어색한 모습을 보이며 주문할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프로듀서님!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글쎄…. 술 마실 거야?”
웬일인지, 도지혁이 선뜻 술 이야기를 꺼내왔다.
“…네? 술이요?”
“안 마실 거야? 술집이라 당연히 마시는 줄 알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 회식 때 프로듀서님이 안 드시던 게 생각나서….”
방심하다 허를 찔린 방한나는 무언갈 기대하는 듯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도지혁을 떠보았는데….
“괜찮아. 팀원들이 다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 취한 거 본 적 있잖아.”
도지혁은 괜찮다며 평소와 다르게 느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 진짜요? 마셔도 괜찮으세요?”
“그럼! 마시고 싶은 만큼 마셔.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아, 아니에요! 저 때문에 영화도 제대로 못 봤는데….”
“네가 나보다 돈 많이 벌면 그때 사줘. 자,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그, 그럼….”
사실상 먹어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다름없는 도지혁의 행동에 또다시 침을 꼴깍 삼킴 방한나는 곧바로 머리를 굴리며 은근슬쩍 도수가 높은 소주와 안주들을 주문했고,
째앵─!
“…처, 첫 잔은 원샷이죠?”
“이야…. 우리 한나가 은근히 꼰대 같은 면이 있구나. 까라면 까야겠지?”
“아, 아니에요!”
도지혁을 쓰러트리고 친구에게 전수받은 ‘선 잠자리 후 사귐’ 작전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3시간 뒤.
“으음…. 푸로두서니임…!”
“한나야. 저기, 너무 치대지 말았으면….”
“아니이…! 가슴이 무거워서 어쩔 수 없잖아요오…!”
끝내 만취해버린 방한나는 도지혁에게 안기다시피 끌려다니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아니, 얘는 이기지도 못한 술을….’
애초에 방한나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기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묵묵히 감내하던 도지혁은 그녀를 질질 끌며 택시를 타기 위해 큰 길가로 발길을 옮겼는데….
“…어!”
방한나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요구해왔다.
“푸로두서니임…! 조금 쉬었다가 가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어?”
모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