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37화 (37/165)

임아린이 왔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란 나는, 훈련을 뒤로한 채 다급히 로비로 나가보았다.

가는 길에 혹시 몰라 메신저를 확인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뒤였다.

‘역시…. 눈치챈 건가?’

그렇게 다다른 로비.

나는 한적한 로비 중앙에 서 있는 임아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케줄이라도 가던 길이었는지, 그녀는 이미 풀 메이크업 상태였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레이스가 달린 하늘색 블라우스와 흰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꿀꺽─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지혁아…!”

그때, 임아린이 나를 먼저 발견하곤 손을 붕붕 흔들며 아는 체를 해왔다.

마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꾸밈없이 해맑게 웃으며 쪼르르 다가오는 그녀.

그런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순간 가슴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컥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침착하자 도지혁…. 넘어가면 안 돼…!’

나는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우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다 오고.”

“그냥, 잠깐 보고 싶어서…!”

당돌한 한마디를 내뱉곤 이내 부끄럽다는 듯 혀를 샐쭉 내미는 그녀의 행동은 말 그대로 사랑스러움 그 자체.

꽉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에 입꼬리가 멋대로 꿈틀거림을 느끼던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스케줄 있어?”

“응! 러브시그널이라고 알아?”

“이름은 들어봤어.”

“거기 게스트로 나가는데, 시간이 살짝 남아서 들렀어…! 혹시, 내가 바쁠 때 찾아온 건 아니지…?”

커다란 눈을 치켜뜬 그녀는 살짝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펴왔다.

마음 같아선 바쁘다는 말로 적당히 그녀를 물리고 싶었지만….

“바쁘긴 한데…. 잠깐은 괜찮아.”

차마 매정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

임아린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짓곤,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함께 은근슬쩍 주말에 일정이 있느냐는 질문을 건네왔다.

“주말에?”

“응! 토요일에 혹시 시간 괜찮아…?”

이 패턴은 높은 확률로 만남을 권하는 패턴.

그녀와 거리를 두기 위해선 만남을 자제해야 하는데….

다행히도 토요일엔 이미 방한나와의 약속이 잡혀있었다.

“어쩌지…. 토요일에 약속이 있는데.”

“아…. 그렇구나….”

시선을 내리깐 임아린은 못내 아쉬운 반응을 보이는가 싶더니, 슬며시 고개를 들곤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근데 누구랑?”

“…어?”

“누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주룩─

그녀의 한 마디에 식은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분명 여전히 사랑스러움 그 자체인 그녀였으나,

누구와 만나느냐 묻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분노하기 직전의 설주희를 보는 듯했다.

“그냥, 우리 팀원들이랑….”

괜히 방한나의 이름을 꺼내기가 뭐했던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팀원들…?”

그러자 다행히도 임아린이 내 말을 믿어준 듯, 곧바로 표정을 풀며 되물어왔다.

“응. 그냥 시간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밥 먹기로 했어.”

“아, 진짜? 어디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나는 어디서 먹느냐는 임아린의 물음에 적당히 거짓말을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게 맞나…?’

약간의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긴 했으나….

막말로 진짜 연인 관계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웠다.

‘그래, 이 정도는 선의의 거짓말이지.’

“근데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아, 맞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서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며 무언가를 꺼내왔다.

“이거, 너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민트 초콜릿이었다.

“…일부러 사온 거야?”

“응! 바쁘다고 하길래, 힘내라고 사왔어!”

사랑스레 히히 웃는 그녀에게 일순간 무장이 풀려버린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초콜릿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덥석─

임아린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더니,

쪽─

내 뺨에 입맞춤을 남겨버렸다.

‘어?’

눈 깜짝할 새에 당해버린 나는 멍하니 초콜릿을 쥔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세상 만족스럽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뒤로 물러나며 인사를 건네왔다.

“끝나고 연락할게…! 일 열심히 해!”

그렇게 임아린이 휙 떠나버린 후.

로비에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이 좋게도 지나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기둥에 가려지는 곳이라 인포메이션 쪽에서도 안 보이는 것 같았다.

“…하아….”

십년감수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쉰 나는, 착잡한 발걸음을 재촉하며 곧장 훈련장으로 복귀했다.

“아, 프로듀서님!”

“미안. 찾았어?”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한규리와 대화를 나누던 방한나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걸어왔는데….

“오늘 훈련에서…! 어….”

“…왜 그래?”

갑자기 방한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이상한 반응을 보이더니, 조심스레 내 얼굴을 가리켜왔다.

“…그…. 얼굴에….”

“얼굴?”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녀가 가리킨 쪽의 뺨을 매만져보았다.

그리고.

“…어?”

손끝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끈적한 감촉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임아린의 립스틱 자국이었다.

“아, 알려줘서 고마워!”

뒤늦게 입술 자국이 찍혔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다급히 뺨을 가린 뒤,

“그…,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시만 기다려줄래?”

“…어…. 네….”

방한나에게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곤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

서울의 어느 교단 부속 병원.

오후부터 있을 스케줄을 위해 일찍 병원에 들른 홍유라와 설주희는 한창 검사를 받고 있었다.

“심호흡하시고,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시면 돼요.”

치과 의자와 비슷한 모양의 침대에 누워있던 홍유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곤, 수녀복을 입은 치료사의 신성력을 받아들였는데….

우우우우우웅……

“으음…. 음…?”

몇분이 지나자, 치료사가 의아하다는 반응과 함께 신성력을 거두며 소견을 말해왔다.

“뭔가 이상하네요. 분명 증상은 정신계 간섭이 확실한데…. 찾을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찾을 수가 없다고요…?”

치료사는 자신들이 정신계 저주나 마법을 치료하는 방식을 홍유라와 설주희에게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가호에 해당해요. 그래서 이제 내부를 들여다보고, 저주나 최면같이 부정한 능력들을 색출해낼 수 있죠. 그런데…. 두 분에게선 그 어느 흔적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네? 그게 무슨….”

“물론 두 분이 보이신 증상은 암시 계열의 증상이 맞아요. 그러니까, 절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거죠.”

설주희와 홍유라는 처음으로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암시에 걸려있는데, 그 원인을 못 찾는다니.

교단에서 용하기로 소문난 A랭크 치료사조차 색출해내지 못하는 정신계 능력이 있단 말인가?

“으음…. 제 소견으로는 몇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거 같네요.”

치료사는 자신이 세운 가설을 설명했다.

“첫 번째는, 두 분보다 강한 정신계 능력자가 두 분에게 능력을 사용했다는 거예요. 저도 제 랭크보다 높은 등급의 저주나 능력은 치료하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이 가능성은 낮았다.

애초에 A랭크 이상의 정신계 능력자 자체가 매우 희박하며,

국가에 알려지지 않은 강자가 존재한다고 해도, 최강으로 평가받는 두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란 더더욱 드물었기에.

“두 번째는…. 두 분이 오래전부터 암시를 당해서, 이미 잠식된 상황이라는 거예요.”

치료사는 두 번째 가설이 가장 근접한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혹시 ‘트로이의 목마’라는 신화를 아시나요?”

“트로이의 목마라면…. 목마 안에 숨어있다가 적을 물리쳤다는, 그건가요?”

“맞아요.”

치료사는 홍유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두 분이 강해지기 전부터 암시를 받아왔고, 머릿속에 안전히 잠들어있던 암시가 ‘트리거’에 작동하여 본모습을 드러낸 거죠. 마치 때가 오길 기다리던 트로이의 목마처럼요.”

치료사는 이렇게 가치관이 바뀌어버릴 정도로 암시가 통하려면, 최소 년 단위로 암시에 당했을 거라고 말했는데….

“세상에….”

홍유라와 설주희는 치료사의 말에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

대체 누가 그런 악의를 품고 자신들에게 암시를 걸었단 말인가?

심지어 1,2년도 아니고 거의 10년에 걸친 끔찍한 계획이었다.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고, 정상적인 가치관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이런 종류의 암시는 순전히 자기 의지로 깰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게 가능한 건가요?”

치료사는 설주희의 물음에 끄덕이며 대답했다.

걸린 암시보다 더 강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더 강한 마음….”

치료사의 그 대답에 두 사람은 무심코 자신들과 달랐던 임아린의 행동을 떠올렸다.

자신들과는 다르게, 모든 걸 감수하겠다며 도지혁을 만나러 갔던 임아린의 행동을.

*

그날 밤.

‘…립스틱 자국…. 분명 립스틱이었어….’

집으로 돌아온 방한나는 손톱을 깨물며 도지혁의 뺨에 묻어있던 립스틱 자국과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던 그의 반응을 떠올렸다.

‘사귀는 건 아냐. 아직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도지혁은 한규리로부터 임아린이 왔다는 걸 들은 순간 얼굴을 굳히며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즉, 그녀의 방문이 썩 반갑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럼 립스틱 자국은…? 임아린이 멋대로 입을 맞췄다는 건가…?’

방한나는 어렵지 않게 정황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임아린이 도지혁의 마음을 흔듦과 동시에 마킹을 남긴 것이었지만….

도지혁이 원치 않던 스킨십이라는 사실까진 얼추 들어맞았다.

‘스킨십…. 역시 스킨십을 해야 하나…?’

문득 방한나는 언젠가 대학 친구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남자는 잡은 물고기한테 질리기 마련이야. 나는 그래서 남자친구가 와이프한테 돌아가지 않도록 매일 컨셉을 바꾸고 있어. 어제는….’

“으….”

남사스러운 이야기에 얼굴을 붉힌 방한나는, 괜히 텅 빈 집안을 둘러보곤 티셔츠 하나에 가려진 자신의 어마어마한 가슴을 조심스레 움켜쥐어보았다.

그리고는 그 친구가 말했던, 부러움 섞인 조언을 상기시켜보았다.

‘한나야. 네 가슴은 무적이야. 그 가슴으로 못 뺏을 남자는 없어! 그냥 휘두르면 억하고 죽는다니까?’

그녀의 친구는 방한나의 가슴이라면 세상 그 어느 남자든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진짜 그런가…?”

방한나는 임아린의 가슴 크기와 자신의 가슴을 비교해보았고….

‘하, 할 만할지도…?’

약간의 희망을 품으며, 코앞으로 다가온 데이트 코스를 다시 점검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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