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36화 (36/165)

늦은 밤.

홍유라의 집.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설주희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린 홍유라는 다급히 현관으로 나섰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

홍유라는 엉망인 그녀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쥐어뜯은 것처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옷.

미약한 술 냄새까지 풍기는 게,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너….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는 설주희의 모습에 무심코 미간을 좁힌 홍유라는, 다급히 그녀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꿀물이야, 이거라도 좀 마셔.”

홍유라는 거실에 앉아 조용히 꿀물을 홀짝이는 설주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어딘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매사에 당당하던 평소와 너무나도 달라서 영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어?”

그렇게 홍유라가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자.

탁-

설주희는 무심하게 잔을 내려놓곤, 아직도 불쾌하게 펄떡거리는 가슴을 애써 잠재우며 천천히 말을 꺼내보았다.

“…유라야.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그냥…. 다.”

설주희는 그동안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괴리감을 느끼며 고백했다.

“나, 도지혁 만나고 왔어.”

“…정말?”

설주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이름에 놀란 홍유라는 눈을 커다랗게 떠버렸다.

셋 중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도지혁을 혐오하다시피 하던 그녀였기에.

심지어 살의마저 품었던 걸 옆에서 모두 지켜본 홍유라로선, 설주희가 도지혁을 만났다는 사실에 깊은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왜? 아린이 때문에 그랬어?”

설주희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홍유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입에 담기조차 역겨울 정도로 꺼내기 싫은 대답을 힘겹게 내뱉었다.

“…걱정돼서….”

“뭐?”

“…도지혁이…. 걱정돼서….”

‘설주희가 도지혁을 걱정했다.’

그 믿기 어려운 사실에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홍유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차분히 되물어보았고,

설주희는 두서없이 상황을 늘어놓으며 도지혁과의 일을 설명했는데….

“그게….”

모든 자초지종을 알게 된 홍유라는 묘하게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확실히 뭔가 이상해….’

홍유라도 설주희와 똑같이 도지혁에 대한 걱정을 품긴 했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던 그녀였기에, 별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다.

그런데.

설주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그 동영상을 보고….’

홍유라는 도지혁이 하는 말이라면 깜빡 죽을 정도로 그를 맹신해왔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리더를 받아들였고, 메인 딜러가 아닌 탱커 포지션을 담당하며 설주희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문제의 동영상을 보고 험담을 내뱉은 모습을 본 직후, 그동안 쌓아온 신뢰와 믿음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어, 어라?’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커다란 구멍이 드러난 것이다.

“…….”

설주희는 갑자기 입술을 파르르 떨며 당혹스러워하는 홍유라의 모습에 그녀도 무언갈 눈치챘음을 확신했다.

“뭔가 이상하지? 그렇지?”

자신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묘한 기쁨을 느낀 설주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다급히 홍유라를 붙잡으며 간곡히 설득했다.

“뭔가 이상하잖아…. 그치? 내가 도지혁한테 그딴 말을 들어야 해? 아니잖아…. 나쁜 건 도지혁이잖아!”

“주희야….”

“그 새끼가 다른 여자랑 뒹굴지만 않았어도…. 우릴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

“주희야. 일단 진정….”

“아냐, 아냐, 그게 아니지…. 아닐 수도 있잖아. 내가 그 거지 같은 동영상에 속은 걸 수도 있잖아. 그렇지…?”

“…어?”

“사실 지혁이가 더럽혀지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희미한 광기에 번뜩이는 설주희의 눈빛.

설주희는 외려 자신이 속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 도지혁은 순결한 몸이었고, 착각했던 건 자신들이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 그럼 어떡하지? 내가 잘못 안 거면? 내가 병신같이 지혁이한테 상처 준 거면 어떡하지…?”

설주희는 엄습해오는 강렬한 공포감에 홍유라의 팔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가슴 속에 재처럼 흩날리던 도지혁에 대한 혐오감이 설주희를 덮쳐왔다.

“…아니지…. 내가 속은 게 문제가 아니라, 도지혁이 속을만한 빌미를 준 게 문제 아냐? 그 새끼가 맨날 끼 부리고 다녀서…!”

“주희야. 너, 대체….”

“너 기억 안 나? 이번에 우리 파워 랭킹 발표된 날, 김은영 그 씨발년이 꼬리 치는 거! 도지혁 개새끼가 다 알면서 받아줬잖아!!!”

홍유라는 너무나 불안해 보이는 설주희의 모습에 덜컥 걱정스러웠지만, 차마 설주희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퀸즈의 스케줄 매니저인 김은영이 도지혁에게 접근하던 건 홍유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비단 김은영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인들도 끊임없이 도지혁에게 추파를 던져왔었는데, 도지혁은 비즈니스를 이유로 그녀들의 호의를 밀어내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어장 관리’를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다 도지혁 잘못이야! 애초에 우리를 받아줬으면…. 제대로 확신을 줬으면 우리도 안 이랬다고! ……그래도 우리가 믿어줬으면…. 그렇게 좋아해 놓고, 고작 몸 하나 더럽혔다고…. ……근데 한 명이랑 잤으면 몰라, 더러운 창녀랑 잔 것도 모자라서, 이혜리 그 씨발년이랑…!”

설주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스스로를 자책하다가도, 대뜸 버럭 화를 내는 둥 계속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착란이 온 것이다.

“주희야. 일단 진정해…!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응?”

홍유라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고 진정시키며 대안을 내밀었다.

“…방법…?”

“응…! 같이 하나씩 해결해보면 되잖아!”

그렇게 홍유라는 겨우겨우 설주희를 진정시킨 뒤, 그녀와 함께 이 답답한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걸 사용해보자.”

“…유니콘?”

이 세계에는 유니콘이라는 S급 괴수가 존재한다.

게이트에서도 발견하기조차 힘든 이 괴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오직 순결한 존재만을 믿고 따르는 특성이 있는데….

홍유라는 이 유니콘의 특성을 이용한 상품인 ‘순결성 체크 키트’를 이용하고자 했다.

“구하기는 조금 힘든데, 아마 이거면 확실할 거야.”

이 키트는 검사자의 대략적인 잠자리 횟수를 판단할 수 있다.

도지혁이 순결한 존재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녀들이 멋대로 오해한 것이고,

만약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던 문란한 존재였다는 게 밝혀진다면….

도지혁은 그녀들을 기만해온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어때?”

설주희는 홍유라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그녀로선 최악의 선택지였기에.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권조차도 없었다.

“…해보자.”

그렇게 곧바로 키트를 주문한 뒤, 홍유라는 함께 전문적인 검사를 받아보자고 권유했다.

“아무래도 검사를 한 번 받아보는 게 맞는 거 같아.”

도지혁의 배신이 아무리 충격적이었다고 해도, 그를 받아들이는 상황과 끝없이 솟아나는 혐오감은 명백한 이상 현상이었기에.

“조만간 아린이도 불러서 같이 해보자. 알았지?”

홍유라의 설득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설주희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홍유라와 눈을 마주쳤다.

“만약…. 진짜 만약에…. 지혁이는 결백하고, 우리도 멀쩡하면 어떡해?”

그리고.

“…그건….”

설주희가 내뱉은 ‘만약의 상황’을 무심코 상상한 홍유라는 생각했다.

돌아볼 것도 없이 모두 다 끝이라고.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홍유라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설주희를 꼬옥 껴안았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끝을 상상하고 있던 설주희는, 홍유라의 대답에 작은 위안을 느끼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출근 직후.

[ 미안. 오늘 좀 바빠서 연락하기 힘들 거 같아. 나중에 연락할게. ]

평소와 같이 임아린과 메시지를 나누던 나는, 미리 적어둔 메시지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이걸 보내는 게 맞을까?’

전송 버튼만 누르면 눈 깜짝할 새에 메시지가 날아간다.

그럼 분명 임아린은 이상함을 느낄 테고, 갑작스레 변한 태도에 의문을 느끼리라.

사실 이런 애매한 방식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며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겠지만….

설주희 앞에서 호기롭게 말한 것과는 다르게, 차마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할 자신이 없었다.

“…하아….”

꾸우욱─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미련 가득한 손길로 메시지를 보내버린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고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다.

“프로듀서님! 세진 쪽에서 조만간 사무실 이전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빠르네요?”

그렇게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한규리로부터 꽤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시장과 담화를 나눴던 게 큰 도움이 됐는지, 세진 길드와의 협약도 빠르게 진행됐는데…,

아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사무실 이전을 요청해온 것이다.

‘뭐, 빨라서 나쁠 건 없지.’

“어떻게, 바로 일정 잡을까요?”

“준형이는 뭐랍니까?”

“시설 좋은 곳으로 간다고 아예 춤까지 추던데요?”

호들갑 떨어댔을 김준형의 반응을 떠올리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는, 이전에 필요한 예상 시간을 물어보았다.

“저희 이전이 얼마나 걸릴까요?”

“짐이 많이 없어서…. 오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전이라…. 규리 씨도 최대한 빨리 옮기는 게 좋으시죠?”

“싫진 않죠?”

한규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옮기자고 이야기했다.

“오전 훈련 정도는 미뤄도…. 아니면, 아예 금요일 오전에 훈련하고, 오후에 이전할까요?”

“앗! 그래도 돼요?”

“저야 뭐, 사실 언제든 상관없는데. 금요일에 저녁까지 훈련하는 것보단, 빠르게 이사하고 빠르게 퇴근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럼요!”

한규리는 마치 휴가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하며 휴대폰에 메모를 남겼고, 곧장 세진 쪽과 일정을 조율해보겠다며 사라져버렸다.

‘일은 참 잘한단 말이지.’

그렇게 한규리를 뒤로하고, 여느 때처럼 시작된 훈련.

“…프로듀서님.”

“응?”

“…오늘도 그거 해주세요.”

워밍업을 마친 진서원이 운기조식 과외를 요청해왔다.

“또?”

이미 몇 번에 걸쳐 운기조식을 가르쳤던 나는, 그동안 그녀가 보여온 야릇한 반응을 떠올리며 과외를 거절하려고 했는데….

“…주화입마….”

진서원이 주화입마를 들먹이며 과외의 당위성을 강조해왔다.

10년 전, 막 운기조식을 배우기 시작하던 설주희의 레퍼토리와 똑같았다.

‘무공 배우는 애들은 다 이런가?’

“…알았어. 한나랑 나래 봐주고, 이따 알려줄게. 그 대신 한 번이다? 오늘은 더 없어?”

그렇게 진서원이 묘하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얌전히 부스로 돌아간 사이.

“프로듀서님…!”

기다렸다는 듯 방한나가 찾아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 저희 가기로 했던 영화관 있잖아요…! 그 근처에 엄청 맛있는 곳이 있다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거기도 같이 가실래요…?”

뭔가 했더니, 주말 약속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 당연히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네?”

“영화가 저녁 즈음에 끝나서, 당연히 밥도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나?”

방한나는 곧바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아, 아뇨! 당연하죠! 네! 그럼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굉장히 기쁜 기색을 내비쳐왔다.

‘귀엽네.’

그렇게 방한나와 짧게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그때.

“프로듀서님…! 프로듀서니임!”

세진 길드와 일정을 조율하러 갔던 한규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그, 그분이 오셨어요!”

한규리가 높여 부르는 누군가에 의문을 품은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방한나와 흘끔 눈을 마주치곤 한규리에게 되물어보았다.

“누가 오셨는데요?”

그러자.

한규리가 묘하게 흥미진진해 보이는 얼굴로 그분의 정체를 밝혔다.

“임아린이요!”

“…네?”

임아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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