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35화 (35/165)

도지혁은 당황스러웠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몇 없기에 당연히 임아린인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 한 설주희의 등장에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왜. 아린이인 줄 알았어?”

당연하다는 듯이 임아린을 찾는 도지혁의 행동에 살짝 기분이 나빠진 설주희는, 싸늘한 얼굴로 혀를 차며 도지혁을 쏘아보았다.

“쓰레기 새끼…. 이혜리, 그 걸레 같은 년이랑 놀아난 주제에. 감히 아린이를 들먹여?”

“…뭐?”

다짜고짜 폭언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표정을 구기는 도지혁.

설주희는 그런 그의 반응에 더더욱 분노를 끌어올리며 그의 문란함을 지탄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쌀 수가 있어? 그냥 창녀처럼 다리만 벌려주면 아무나 좋다 이거야?”

“설주희.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듣다 못 한 도지혁은 들고 있던 가방을 내팽개치며 설주희의 말을 반박하려 했지만….

“닥쳐.”

10년짜리 짝사랑을 배신당한 그녀의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러운 배신자 새끼. 우릴 버리고 세진에 붙었으면서 아린이를 만나? 아린이가 착해서 속아주니까, 아주 그냥 눈에 뵈는 게 없지?”

도지혁은 마냥 억울했다.

퀸즈를 버린 적도, 세진에 붙은 적도, 심지어 임아린을 속이지도 않았기에.

그럼에도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화로 설주희의 오해를 풀어보려고 했다.

“주희야.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순간.

“한마디만 더 해.”

설주희가 싸늘한 살기를 흩뿌리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 역겨운 얼굴 당장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동안 정을 생각해서 봐주는 거야.”

“너….”

“아린이한테 더 상처 주지 말고, 당장 관계 정리해.”

말 그대로 일방적인 통보.

목 끝을 겨눈 섬뜩한 살기에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도지혁은, 머릿속에 앵앵 울려대는 생존 본능에 저항하며 설주희의 경고를 맞받아쳤다.

“…네가 뭔데?”

“뭐?”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멋대로 오해를 품곤 자신에게 살기를 뿜어내더니, 임아린과 자신의 관계에 간섭까지 하려는 그녀의 행동이.

“아린이랑 내가 사귀든 말든…, 네가 뭔데 자꾸 간섭하냐고.”

“…하.”

설주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살기를 거두자, 도지혁이 숨을 크게 몰아쉬며 다시 한 번 쏘아붙였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린이는 달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순진한 애 속여서 가지고 놀아놓고, 뭐가 어째?”

임아린이 순진하다는 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도지혁은 차분하게 받아쳤다.

“순진한 게 아니라, 날 믿어 주는 거야. 왜 자꾸 네 생각을 아린이한테 강요하는데?”

“뭐? 강요?”

“아린이도 어른이야. 네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설주희는, 그대로 도지혁에게 가까이 다가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나지막이 쏘아붙였다.

“아린이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친구야. 난 내 친구가 상처받는 꼴 절대 못 봐.”

친구.

그 친구라는 한 마디에 끓어올랐던 도지혁의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그럼 나는?”

이세계에 떨어진 도지혁이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끔찍한 외로움이었다.

20년 넘게 쌓아온 인생은 일순간에 송두리째 사라져버렸고,

말만 통할 뿐이지, 그 어디에서도 ‘도지혁’이라는 사람을 알아봐 주는 곳이 없었으며,

편안히 몸을 기대 쉴 수 있는 조그만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극심한 고독에 빠져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그때 ‘우연히’ 임아린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도지혁은 가장 좋아했던 소설의, 가장 좋아했던 등장인물인 설주희를 살리겠다는 목적으로 망설임 없이 평생을 바쳐왔다.

가짜 주인공인 자신이 아니라, 진짜 주인공이었던 ‘친구’를 위하여.

여태껏 거짓 없는 진심으로 그녀들을 대해왔던 그였기에, 허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난 네 친구 아니었어…?”

설주희는 슬픔이 묻어나오는 도지혁의 눈빛에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고,

“난…. 네가 날 친구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어.”

도지혁은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슴속에 깊은 곳에 묻어뒀던 무거운 진심을 털어놓았다.

“…네가 그 망할 동영상을 들고 왔을 때에도. 짧은 해명조차 안 듣고, 날 쓰레기라 욕했을 때도. 10년 동안 헌신한 팀에서 걸레 짝처럼 버려졌는데, 한 마디 연락조차 없을 때에도.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널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그건…!”

진심을 부딪쳐오는 도지혁의 행동에 설주희는 당황하고 말았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그가 자신을 속이려 든다는 생각이 솟아났지만,

눈앞에 있는 도지혁은 꾸밈없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아, 화가 많이 났겠구나. 내가 봐도 똑같이 생겼는데, 당연히 오해할만하겠구나.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모두 오해였다고 해명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난 그렇게 생각했어.”

쓰러졌던 그를 목격했던 날처럼, 설주희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안타까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나는…!’

설주희는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다급히 도지혁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그게 아니라…!”

“…근데, 넌 아니었구나.”

이미 엎지른 물은 되돌릴 수가 없다.

‘아, 아냐, 아니야…!’

설주희는 마치 뇌가 곤죽이 돼버린 듯한 감각을 느꼈다.

사고방식에 혼선이 생긴 것이다.

“…아, 아냐…. 아니라고!!!”

혼란스러움에 무심코 머리를 콱 움켜쥔 설주희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도지혁이 배신자에 문란한 쓰레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주희가 도지혁을 쓰레기라고 믿게 된 건 오직 ‘동영상’ 때문이다.

분명 처음엔 도지혁이 그럴 리 없다며 조작을 의심했었는데, 다른 여성과 뒹구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배신감’을 느낀 순간부터 너무나 당연한 사실처럼 느끼게 돼버렸다.

마치 구멍이 나버린 듯, 중간 과정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읏….”

그렇게 설주희가 혼란에 빠져있길 잠시.

속마음을 모두 털어낸 도지혁은 크게 심호흡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 날 살려 준 건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거니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딱딱하고 사무적인 감사의 인사.

일말의 감정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보상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너…!”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괜찮아. 날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천하의 쓰레기로 보든, 10년 동안 함께한 팀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신자로 보든, 마음대로 해.”

“도지혁!”

“아린이랑도…. 조만간 정리할게. 나 때문에 너희 둘이 싸우는 건 보기 싫어.”

설주희는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애꿎은 주먹만 움켜쥐었다.

친구들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기로 약속할 정도로 사랑하던 그였다.

그 누구보다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며, 당연히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당연히 함께 순결함을 주고받으리라 생각했던 도지혁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더러운 사내였음을 알게 돼서 매우 억울한 상황인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대체 왜…!’

그렇다고 이 억울함을 내뱉을 순 없었다.

억울하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그렇게 소중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단숨에 태도를 바꿔버린 자신의 모순된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어지기에.

“…이제 그만 나가줘.”

“!”

설주희는 도지혁의 퇴거 명령에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말았다.

애초에 이런 이유로 온 게 아니었다.

정말 밉지만,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진심으로 걱정됐기에 찾아온 것이었다.

단지, 오는 길에 세진 길드와의 소식을 알게 돼서, 조금 화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앞서 그랬듯이, 설주희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

설주희는 도지혁을 슬쩍 쳐다보았고,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뒤로한 채, 곧바로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

어두운 집안.

홀로 커다란 화면을 지켜보던 임아린은 무언가 아쉽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갔네….”

푹신한 의자에 풀썩 몸을 기댄 임아린은,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곤 무언가를 찾는 듯 책상 위를 더듬었다.

덥석─

이윽고 그녀의 손에 집힌 정체불명의 알약.

임아린은 한알씩 은박으로 잘 포장된 약을 슬쩍 살피며 남은 개수를 확인해보았다.

“으음….”

남은 알약의 개수는 약 11개.

포장지 속 알약은 백탁액에 가까운 색깔을 띠고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약이 아닌지, 어디에도 약물에 대한 설명이 쓰여있지 않았다.

폭─

알약을 포장지에서 빼낸 그녀는 포장지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하아아….”

사르르 녹아내리는 표정과 함께 안타까운 한숨을 토해내는 그녀.

그녀는 남은 약을 내려놓곤, 입안에 가득 찬 군침을 꿀꺽 삼키며 빼낸 알약을 낼름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알약을 굴리며 안쪽 어금니 사이에 잘 끼워 넣은 뒤에, 천천히 알약을 으깨버렸다.

뿌득──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찢어져 버린 연질 캡슐은 머금고 있던 백탁액을 내뱉었고,

임아린은 입안에 가득 차오르는 향긋함과 만족감에 강렬한 쾌감을 느끼며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으흐….”

마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황홀함에 젖어 온몸을 덜덜 떨며 비트는 그녀.

뇌까지 파고든 강렬한 체취를 즐기던 그녀는 조금도 흘리기 아깝다는 듯, 숨 쉬는 것조차 멈춰버렸고,

이내 한계까지 참았다가, 조금씩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후으으….”

마치 불법 약물에 취한 듯한 반응이었지만….

꿀꺽─

그녀가 삼킨 건 불법 약물이 아니었다.

“…하아….”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남아있던 쾌감을 즐기던 임아린은, 조심스레 눈을 뜨곤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눈을 움직여 책상에 놓인 거대한 모니터를 바라보았고,

홀로 쓸쓸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도지혁을 가만히 응시하며 한쪽 가슴과 다리 사이에 손을 얹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의 체취를 음미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구해 줄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