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34화 (34/165)

[ 모두가 그러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빙의자는 오직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래서 빙의자들을 좋아한다. 그들이 죽기 직전에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

삑─

나는 영화를 꺼버리곤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빙의자인 나로선 빙의자를 죽이는 내용의 영화를 즐길 수가 없었기에.

마치 동물원의 얼룩말이 사파리에서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얼룩말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후우….”

차가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나는, 낮에 이혜리로부터 받았던 의뢰를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퀸즈라…….”

여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놨지만, 퀸즈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팀이었기에.

‘이기고 싶다고 막 이길 수 있는 팀이 아니야.’

퀸즈가 강한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나는 그 압도적인 밸런스가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분명 설주희는 강하다.

측정 가능한 범위가 S랭크까지라서 공식적으로는 S랭크에 해당하나, 현재 수준으론 유일무이한 Ex급에 다다랐으니, 사실상 세계 최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다른 팀원들이 그녀를 받쳐주지 못했다면, 아마 그녀는 랭킹 1위를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을 가진 홍유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폭발적인 공격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1티어급 탱커에 필적한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설주희가 없었다면, 그녀가 단연 최강의 딜러로 손꼽혔으리라.

임아린은 또 어떤가?

천재 마법사라고 불리던 그녀는 말 그대로 만능에 가까운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받아 소개팅을 나갔던 당시, 듣도 보도 못한 GPS 마법으로 나를 찾아내어 파투를 놓았던 사건은 아카데미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을 수준.

1:1 전문에 가까운 설주희나 홍유라와는 다르게 광범위한 공격도 펼칠 수 있어서, 그야말로 치트키에 가까운 서포터다.

이처럼 퀸즈는 개인의 강함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빠지지 않는 완벽한 밸런스가 강점인 팀이다.

물론 블랙 로즈도 전 1위였던 만큼, 부족한 팀은 아니지만….

현재의 퀸즈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게 팩트다.

“어렵네….”

금액적인 면이나 세진 길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냥 의뢰를 받아들이는 게 맞다.

애초에 상대가 퀸즈다 보니, 처음부터 세진 쪽에서도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던 모양이라, 크게 부담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거지 같은 천화 길드와 천화 그룹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함부로 사람을 자른 대가는 치러야지.’

그 밖에도 지금껏 퀸즈가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게 살짝 걱정스러웠다.

애초에 실패하지 않을 길만 걸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걔네도 한번 넘어지긴 해야겠지.’

마왕군의 행적이 달라지며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르기에, 미리 한번 꺾어두는 편이 정신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할 수밖에 없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휴대폰을 들어 이혜리에게 메시지를 남겼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지휘에 참여하는 걸 숨겨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

다음 날.

여느 때와 훈련을 멈추고 잠시 쉬는 시간.

“…언니.”

방한나는 진서원의 부름을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언니?”

‘그냥 하지 말까…?’

그녀가 이렇게 머리를 싸매는 이유는 바로 도지혁.

도지혁에게 영화를 보자고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방한나는 도지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이미 매일같이 훈련을 진행하며 하루의 상당 부분을 같이하고 있었지만,

팀원과 프로듀서라는 딱딱한 관계가 아니라, 오빠와 동생으로서 긴밀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너무 오버하는 걸로 보이려나?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때.

“…한나 언니.”

보다 못한 진서원이 방한나를 툭 건드렸다.

“어, 어!?”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차린 방한나는 진서원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묘하게 걱정된다는 말투로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다.

“…괜찮아?”

“어…. 응…! 괜찮아!”

방한나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둘러댔지만….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진서원은 그녀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고민 있어?”

“고, 고민…?”

방한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진서원의 모습에 살짝 당황스러워하며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고, 고민은 무슨!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그런 모습이 외려 진서원의 걱정을 돋울 뿐이었다.

“…….”

그렇게 한동안 방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서원이 갑자기 주변을 슥─ 둘러보는가 싶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방한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쓰고 올래?”

“…?”

부드러운 실리콘 비슷한 재질로 이루어진 작은 타원형 모양의 물건이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 방한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띠며 슬쩍 질문을 건넸다.

“이게 뭐야…?”

그러자.

“…마사지기. 마력으로 움직여.”

진서원이 의미심장한 답변을 꺼내왔고,

“마사지기…?”

방한나는 별생각 없이 마력을 조금 불어넣으며 정체불명의 물건을 작동해보았다.

부르르르……

정체불명의 마사지기는 크기에 비해 꽤 강력한 진동을 선보였는데….

손바닥 위에서 부르르 떨어대는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던 방한나는 그제야 그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

바로 여성용 마사지기였다.

“저, 저기…. 서원아. 이거…. 혹시…. 그…. 네가 쓰던 거야…?”

“…응.”

“그, 그렇구나…. 그…. 근데 이걸 왜 들고 있어…?”

“…필요할 때 쓰려고.”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진서원의 모습에 순간 어질어질함을 느낀 방한나는, 다급히 마력을 거두곤 물건을 돌려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 서원아. 이건 집에서만 쓰는 거야. 남한테 막 보여주고 그러면 안 돼…!”

“…왜?”

“어?”

일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방한나는, 묘하게 비틀어진 진서원의 가치관에 큰 충격을 받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무리 같은 여성이라 해도,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며, 함부로 해선 안 될 행동이라고.

그러자….

“…난 그냥, 언니가 힘들어 보여서….”

진서원이 전혀 몰랐다는 듯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순순히 사과를 건네왔다.

“…미안.”

순진하다 못해 순수했던 진서원의 갸륵한 마음에 또다시 깜짝 놀란 방한나는, 언젠가 남몰래 그녀를 질투했던 자신의 마음을 부끄러워하며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다음부터 잘하면 돼. 알았지?”

“…응.”

뜬금없는 진서원의 커밍아웃으로 도지혁에 관한 고민을 싹 잊어버렸던 방한나는, 외려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내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 하자…!’

그렇게 이어진 훈련 시간.

“밖에 비가 엄청 온다네.”

“앗! 진짜요?”

“응. 내일 아침까지 쏟아질 거라던데?”

“으아…. 우산 안 가져왔는데….”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태워다 줄게.”

“정말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뭐.”

도지혁에게 피드백을 받는 내내 타이밍을 노리던 방한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제안을 들이밀었다.

“프로듀서님! 오늘 태워다 주신다고 했으니까…. 그럼 제가 주말에 영화 보여 드릴게요…!”

“영화?”

“네! 주말에 친구랑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못 가겠다고 해서 티켓이 하나 남거든요…!”

거짓말이다.

“…그래?”

도지혁은 어딘가 묘한 시선으로 방한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갈 고민하는 듯 눈을 크게 굴리더니….

“그럴까 그럼?”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레 받아들였고,

‘됐다…!’

마침내 데이트 약속을 따낸 방한나는, 벅차오름을 감추지 못한 채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

도지혁의 집.

설주희는 텅 빈 집안에 앉아, 도지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막 스케줄을 끝낸 그녀는 풀 메이크업 상태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아름다운 모습과는 다르게 악귀와 같이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 그 걸레 같은 년 꽁무니를 쫓아가?’

막 들려온, 팀 서울시청과 세진 길드의 협력 소식 때문이었다.

설주희는 오래전부터 이혜리를 매우 혐오했다.

처음엔 도지혁이 잘 나가기 시작하니까 들러붙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자신들이 코앞에 있음에도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도지혁을 꾀어내려는 모습을 보곤 혐오에 다다르게 됐다.

그래서 더 좋은 조건을 내밀었던 세진 길드가 아니라, 천화 길드와 계약을 맺겠다고 주장했던 건데….

하필 도지혁이 세진 길드와 엮이게 됐고, 그 소식을 알게 된 설주희는 잠깐이라도 그를 걱정했던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절대 가만 안 둬.’

도지혁에 대한 걱정과 혐오가 공존하던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혐오로 가득 차버린 지 오래.

그렇게 악만 남아버린 그녀가 싸늘한 냉기를 폴폴 날리며 집안에 앉아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삑─ 삑─ 삑─ 삑─

현관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리릭─ 철컥─

도지혁이 온 것이다.

“…….”

설주희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조차 인식할 수가 없었다.

“…응? 아린이야?”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도지혁의 목소리.

현관에 놓인 신발을 보곤 임아린이 찾아온 줄 아는 듯했다.

까드득-

당연하다는 듯 임아린을 찾는 도지혁의 목소리 이를 갈던 설주희는,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예뻐 보이는 각도로 다리를 꼬곤,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팔짱을 꼬며 도지혁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린…! 어?”

마침내 그와 마주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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