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33화 (33/165)

오후 훈련이 아직 한창일 무렵.

“…….”

잠시 쉬는 시간을 맞아 임아린과 메시지를 나누던 나는, 그녀가 보내온 사진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ㄱ아린이 : 애들이랑 회의 준비 중! ]

사진 속 임아린은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땋은 채로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그녀의 뒤로 각자 휴대폰을 매만지는 홍유라와 설주희의 모습이 작게 찍혀있었다.

‘잘 지내나 보네.’

사진을 확대해가며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확인한 나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기 위해 모르는 척 임아린의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칭찬했다.

[ 머리 땋으니까 예쁘네. 샵에서 했어? ]

그녀가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메시지 옆에 뜨는 미확인 표시가 나타나지 않았고, 곧바로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직접 땋았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진짜 썸타는 기분이네.’

병원에서 임아린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은 이후, 우리는 마치 고백하기 전에 마음을 확인하는 남녀처럼 풋풋한 연락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밥은 먹었냐는 간단한 이야기부터, 정말 시시콜콜하고 잡다한 이야기까지.

우리는 짬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메시지를 이어 갔고, 서로가 퇴근한 뒤엔 잠들기 전까지 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정도면 따로 언급만 안 했지, 사실상 연인 관계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맞나….’

임아린과 유사 연애를 즐기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좋다.

지금껏 외로울 새도 없이 살아오긴 했으나, 가슴속 깊은 곳에 사무치는 외로움이 존재하던 건 사실이다.

메마른 가슴에 찾아온 한줄기 설렘은 그 무엇보다 강렬했고, 이상형에 가까운 그녀였기에 더더욱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동안 힘들게 쌓아온 퀸즈의 팀워크를 떠올리며 어찌어찌 억누르고 있긴 하지만….

코앞에서 달콤한 향기를 뿌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임아린의 유혹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 ㄱ아린이 : 앗 시작하려나 보다! 조금 이따가 회의 끝나고 연락할게! ]

그렇게 임아린과 나중을 기약하며 휴대폰을 넣어두곤 다시 훈련을 재개하려던 그때.

웅성웅성──

파티션 너머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려오는 게, 어디 팀의 높으신 분이라도 찾아온 모양이었다.

‘우리 시장님은 저럴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

어쨌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곧장 훈련을 재개하려고 했는데….

“아, 마침 있었네.”

소란을 몰고 나타난 그녀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쉬고 있는 거 같은데, 시간 좀 괜찮지?”

세진 길드의 단장, 이혜리였다.

“세, 세진 길드 단장…!”

“우와아….”

근처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방한나와 김나래는 유명인의 등장에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그 와중에 진서원만 유일하게 관심 없어 보였다.

‘공문 보내겠다고 하더니…. 직접 들고 오셨구만?’

이미 사전에 그녀와 연락을 나누며 뭔가 행동을 취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인사 대신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너희 애들 군기가 아주 바짝 들었나 봐. 인사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던데?”

“이제 2년 차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입꼬리를 씩 끌어올린 그녀는 대동하고 있던 수행비서들에게 슬쩍 지시를 내렸다.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까, 제대로 진행해.”

“예.”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던 그들은 곧장 한규리와 김준형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공문을 직접 전달하러 온 것 같았다.

“아니, 시대가 무슨 시대인데, 서류를 직접 들고 와?”

“그냥, 겸사겸사 네 얼굴도 좀 보려고.”

이혜리는 내 어이없다는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왔는데….

그런 그녀와의 대화가 신기했는지, 잠자코 지켜보던 방한나와 김나래가 살짝 놀랍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이쪽은…. 팀원들?”

나에게 있어서 이혜리는 그저 짓궂은 동창일 뿐이지만, 주로 매체에서 그녀를 마주했을 팀원들에겐 유명한 연예인이나 마찬가지.

“아, 안녕하십니까! 방한나입니닷…!”

“기, 김나래입니다!”

“…진서원입니다.”

진서원을 제외한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이혜리에게 인사했고, 그녀는 가식이 가득 담긴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혜리예요. 앞으로 자주 볼 거 같은데, 잘 부탁해요.”

“넵…!”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간단한 팀원 소개까지 마친 후, 나는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

“어때?”

“나쁘진 않네.”

“…겨우 그 정도라고? 그 제안서 하나 만들려고 몇 명이 밤을 새운 줄 알아?”

어이가 없다는 이혜리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들고 있던 제안서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극찬이야.”

제안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알찼다.

원활한 협력을 위해 길드 본청에 제대로 된 사무실을 제공한다는 내용과 모든 부대시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거기에 ‘활동지원비’라는 명목으로 무려 40억씩이나 책정돼 있었으며,

하다못해 세진 그룹 계열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복지 포인트까지 제공한다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조항까지 들어있었다.

‘아주 어떻게든 침 바르려고 애를 썼구만.’

사실 이런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수준의 내용들이라 막 구미가 당기진 않았는데….

세진 길드 전용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매우 흥미로웠다.

‘세진 길드 게이트가 질 좋기로 유명하지.’

기본적으로 모든 게이트는 국가에 귀속된다.

하지만 국가에서 모든 게이트를 관리할 수 없기에, 흔히 ‘국가 과제’라고 부르는 일종의 연구 형태로 게이트를 시중에 풀기도 한다.

세진 길드도 그렇게 게이트를 받아낸 길드 중에 하나로, 받아낸 게이트 하나하나가 알짜배기라 불릴 정도로 질 좋은 곳이 많아서 업계에선 꽤 유명한데….

이쯤 되니, 그녀가 무슨 말로 길드의 수뇌부를 설득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투자가 너무 과한 거 같은데….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야?”

“네 이름 좀 팔았지.”

이혜리는 수고도 아니었다는 듯 슬쩍 다리를 꼬며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세진 길드에서 도지혁 모르면 간첩이잖아?”

“…그런가?”

나는 묘하게 뼈가 섞인 그녀의 말에 모른 척 잠자코 수긍했다.

천화 길드와 1,2위를 다투던 세진을 손수 끌어내린 사람이 나였기에.

“뭐…. 네 능력을 믿고 따낸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괜히 부담스럽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부담 주기 싫은 거 맞아?”

“당연히 아니지.”

이혜리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곤 구둣발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40억은 네가 먹을 만큼 떼먹어. 애초에 그러라고 매긴 예산이니까.”

“…뭐?”

대놓고 비리를 종용하는 이혜리의 말에 무심코 헛웃음을 친 나는, 슬쩍 팔짱을 꼬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수로 그 큰돈을 떼먹어?”

그러자.

“충분히 할 수 있잖아?”

그녀가 마치 선수끼리 왜 그러냐는 듯 음흉한 눈빛을 보내왔다.

‘할 수야 있긴 하지.’

헌터 팀이라는 사업 자체가 워낙 비용이 많이 드는 종목이다 보니, 이혜리가 활동지원비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가져온 것처럼 얼마든지 가로챌 방법은 많다.

그러나.

내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사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기에, 굳이 위험한 방법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잘못 먹고 배탈 나면 어떡해? 난 감옥 가기 싫은데.”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이 누나가 도와주는 수밖에.”

나는 새빨간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날름거리는 이혜리의 모습에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돈을 꿀꺽하는 순간 세진 길드에 옭아매겠다는, 아주 뻔하디 뻔한 속셈이 엿보였다.

‘정말로 옭아매려는 건 아닐 테고…. 그만큼 간절하다는 의미겠네.’

이혜리의 깊은 뜻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 나는, 십원짜리 하나 빼먹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파트너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자고로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세진에서 어마어마한 조건들을 내건 만큼, 우리 쪽에서도 무언가가 제공되어야 한다.

이혜리가 가져온 제안서엔 ‘업무 지원’이라는 애매한 항목으로 쓰여있었는데, 이를 미리 확실하게 맺어놓고 가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혹시 말하지만, 우선 협상권 같은 거 말하면 그냥 안 할 거야.”

“설마, 내가 그런 걸 바랄까?”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우아하게 웃으며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사뭇 진지해 보이는 기세로 나지막이 용건을 말해왔다.

“블랙 로즈 지휘 좀 맡아줘.”

“…?”

이혜리의 제안은 이랬다.

현 랭킹 2위 팀인 블랙 로즈의 게이트 토벌을 진두지휘해달라는 것.

계속해서 맡아달라는 게 아니라 딱 1번뿐인 단발성 제안이었으며, 파트너십 계약이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어마어마한 보수까지 달려있었다.

“30억?”

무려 30억.

길어봤자 고작 몇 주짜리인 프로듀싱에 무려 30억을 태우려는 것이다.

“너네 돈이 그렇게 많으면, 한 100억만 줘라.”

“못 줄 것도 없지. 대신 나랑 결혼해야 할걸?”

이혜리는 보수 기준을 미국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받는 프로듀서를 기준으로 책정했다고 설명했다.

대충 1달 월급 정도를 보수로 정한 것이다.

“…대체 무슨 게이트에 들어가는데 그 돈을 들고 나를 찾아?”

나는 이혜리가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는데….

“파주 공동 토벌 구역에 들어갈 거야.”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한 대답에 튀어나왔다.

‘공동 토벌 구역이라….’

일반적으로 A급 이상의 상위 게이트는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되어 한 번에 한 팀만 입장할 수 있다.

그중에 예외적으로 동시에 입장하는 걸 허락한 게이트들이 몇몇 존재하는데, 그곳을 보통 ‘공동 토벌 구역’이라 부른다.

그 공동 토벌 구역을 굳이 나한테 맡긴다는 건….

같은 날 블랙 로즈와 동시에 입장하는 팀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흐음….”

공동 토벌 구역에선 전투가 허용된다.

즉, 상대를 방해하거나 쓰러뜨려서 게이트를 독점할 수 있다는 의미다.

‘평범한 곳을 아닐 테고….’

파주에 위치한 공동 토벌 구역 중에 블랙 로즈가 단단히 준비해서 토벌할만한 곳은 단

한 곳.

악랄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마녀의 성뿐이다.

‘,,,마녀의 성 토벌에, 다른 팀이랑 싸워서 이기기까지 하라고?’

마녀의 성은 그 퀸즈도 겨우 한번 토벌해냈을 정도로 굉장히 난해한 곳이다.

거기에 다른 팀과의 경쟁까지 해내야 한다고 하니….

30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액수가, 외려 합당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대는 누군데?

나는 이혜리에게 가장 중요한 상대 팀을 물어보았다.

“썬더스? 불스? 아니면…. 이번에 백일에서 3등 보낸다고 호언장담하던 걔네?”

그리고.

“퀸즈.”

가장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팀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진심이야?”

이혜리는 나의 물음에 오묘한 웃음을 띠곤, 은은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나지막이 부탁해왔다.

“퀸즈를 잡고, 블랙 로즈를 1등으로 만들어줘.”

여왕을 죽여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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