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의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1인실이라 시끄러운 것도 없었고,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경관과 쾌적한 공간 덕분에 답답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일반식도 허락되어 음식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으니, 단 한 가지 빼곤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지혁아! 나 왔어…!”
바로 임아린이 매일 찾아온다는 것.
“늦어서 미안, 요 앞에서 차가 막혀서….”
“…아냐, 괜찮아.”
“배 많이 고프지…? 바로 차려 줄게! 잠시만 기다려 줘!”
“…응.”
여지없이 식사 시간에 맞춰 병실로 찾아온 임아린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며 손수 싸온 도시락이었다.
“자, 어서 먹자…!”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것까지 함께 준비해온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나무젓가락을 내밀어 왔는데….
정작 나는 그녀의 호의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곤란하네.’
입원 첫날 이후, 임아린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찾아오며 나를 극진히 챙겨주기 시작했다.
“내가 안 돌봐주면, 누가 하겠어…?”
나를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자신이 돌봐주겠다는 명분이었다.
이게 단순한 동정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면 참 고마웠겠지만….
문제는 명백한 연심에서 이어진 행동이라는 점이었다.
“어때…? 맛 괜찮아? 네가 전에 맛있다고 했던 곳이랑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맛은 있는데…. 내가 그랬던 적이 있나?”
“응! 아무튼,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그녀는 마치 제 마음을 알아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끊임없이 호의를 부딪쳐왔다.
“자, 이것도 먹어봐…!”
“아니, 나 손은 멀쩡한데….”
“얼른!”
이 정도면 외려 눈치를 못 채는 게 더 이상할 수준.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호의를 받는 게 싫은 건 아니었으나, 퀸즈의 다른 두 멤버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만약 내가 임아린의 마음을 받아들여 연인이 된다면, 나를 미워하고 있는 홍유라나 설주희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다.
안 그래도 마왕군이 원작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걸 알게 된 참인데, 괜히 잘 가꿔놓은 퀸즈의 단합력을 무너뜨리는 건 말 그대로 멍청한 짓.
고작 눈앞의 행복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를 망치고 싶지는 않기에,
임아린의 마음을 덥석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후아…. 배부르다.”
“덕분에 잘 먹었어. 맨날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는, 그녀를 도와 도시락을 정리하며 슬쩍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임아린이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괜찮아. 나중에 다 받아낼 거니까…!”
사뭇 요망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해왔다.
“그래, 아린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는 당연히 평소처럼 그녀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슬쩍 웃음을 흘리며 적당히 받아주었는데….
“어디로 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화제를 던져왔다.
“뭘?”
“여행!”
“여행 가게?”
“응! 넌 가고 싶은 곳 있어…?”
“글쎄…. 제주도?”
“제주도?”
“응. 거기 안 가본 지 꽤 됐잖아.”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을 남기며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탈깍-
그 순간.
“제주도…. 알았어! 그럼 거기로 가자.”
임아린이 어딘가 이상한 말을 꺼내왔다.
“…어?”
“이번 달은 시간이 안 되니까…. 다음 달 어때…?”
순진한 눈빛을 띠며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는 그녀와 마주 보던 나는, 그제야 그녀가 말한 여행의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나랑 가겠다고…?”
“그럼 누구랑 가…?”
“…혹시, 둘이 가는 거야?”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임아린.
나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얘가 진짜 제정신인가…?’
아무리 우리가 오래 알고 지낸 관계이긴 하지만, 단둘이 여행을 가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심지어 제주도 여행이라니!
분명 숙박까지 하고 올 텐데, 연인도 아닌 남녀가 숙박 여행을 즐기고 오는 건 사실상 기정사실을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랑 여행 가기 싫어…?”
내게서 거절의 낌새를 눈치챈 임아린은 마치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어왔고,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무심코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하였다.
“아린아. 네 마음은 알겠는데…. 우리끼리 여행가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뭐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녀.
‘이건 안 되겠다.’
성인이 된 지 몇 년이나 지난 그녀를 교육한다는 게 웃기지만, 나는 성교육을 한다는 거룩한 마음으로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하였다.
“아린아. 아무리 네가 나랑 친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친구지, 사귀는 사이가 아니잖아. 물론 너는 순수하게 여행을 즐길 마음으로 같이 가자고 했겠지만, 내 가치관으로는….”
그때.
“저…. 지혁아….”
임아린이 내 말을 툭 잘라내더니, 당장에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여왔다.
“나…. 여, 여행만 즐길 생각으로 가려는 거 아니야….”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대답에 멍청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고,
“…어?”
그녀는 은은한 색기가 담긴 뜨거운 눈빛을 보내왔다.
*
며칠 뒤.
“퇴원 축하드려요!”
“…축하해요.”
“다들 고맙다.”
예정보다 일찍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곧바로 팀 훈련에 참가하였다.
“며칠 더 안 쉬어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조금 더 쉬다가 와도 괜찮은데.”
“아냐, 나는 일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해. 그리고…. 내가 나와야, 너네 일 시키지.”
서울시청 팀원들은 조금 더 쉬지 그랬느냐며 걱정해주었고, 나는 장난스럽게 받아치며 팀원들의 걱정을 잠재웠는데….
사실 일찍 퇴원하게 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프로듀서님! 이것 좀 봐주세요!”
방한나는 오랜만에 지도를 받는 게 기뻤는지,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더미 체급을 한 단계 높였는데…, 뭔가 이상한 거 같아요…!”
“그래? 바로 해보자.”
“넵…!”
나는 그동안 쌓인 데이터와 부스 속 방한나를 비교해가며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꽤 괜찮은데?’
역시 기본적으로 잠재력이 있어서 그런지, 방향성을 잡아줬을 뿐인데도 꽤 가파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 이름 방한나 / 잠재 랭크 : A / 보유 능력 : 기초 방패술 Lv6 ]
‘레벨 6이면…. 슬슬 게이트에 들어가도 되겠네.’
훈련으로는 능력을 성장시키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지금 성장세로 따져보면, 아마 하급 게이트 몇 번만 다녀와도 금세 중급 방패술로 성장하리라.
삐익──
세트 종료를 알리는 비프음과 함께 더미가 동작을 멈추자, 방한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부스를 빠져나왔다.
“후우….”
“자.”
“아, 감사합니다…!”
그녀가 수건을 받아 땀을 닦는 사이, 나는 태블릿으로 이번 세트의 데이터를 확인하며 개선점을 이야기했다.
“정수리 쪽으로 떨어질 때 충격 분산이 전혀 안 되고 있어. 한두 번은 괜찮지만, 계속 맞으면….”
그런데.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무슨 일인지, 방한나가 멀찍이 떨어져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따,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알고 보니, 땀 때문에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여자애는 여자애네.’
풋풋한 그녀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을 흘린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그녀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까이 와.”
“…지, 진짜요…?”
“내가 갈까?”
“…아, 아뇨! 갈게요…!”
그녀는 묘하게 꺼리는 듯한 모습으로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4번 패턴 막을 때 허리 안 아팠어?”
“어…. 조금…?”
“조금 맞아? 확실해?”
“…조, 조금 많이…?”
“으이구…. 괜찮아?”
“견딜만해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방한나가 견딜만하다고 말하는 건 꽤 통증이 있다는 뜻.
“…안 되겠다. 잠깐 약 좀 바르고 하자.”
“괘,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나는 그녀의 방패를 강제로 뺏어 들곤, 곧장 배정받은 마사지 침대로 데려갔다.
“여기는 왜…?”
“누워.”
“네, 네?!”
“약 발라 줄게. 다른 애들도 봐줘야 하니까, 어서 눕자.”
“…….”
팀원들을 들먹인 게 효과가 있었는지, 방한나는 얌전히 침대에 몸을 뉘곤 전투복 상의를 슬쩍 걷으며 탄탄한 복근을 드러냈다.
“…한나야. 엎드려야지.”
“…아.”
방한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다급히 몸을 돌려 누웠고,
나는 침대에 눌려 옆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옆 가슴에 새삼스레 놀라워하며 상의를 살짝 더 걷어 올리곤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스윽… 스윽…
그 순간.
“…흐응….”
방한나가 희미한 비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
잠시 멈칫했던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수건을 떼어낸 뒤에, 해바라기 괴수의 오일로 만든 회복 약을 방한나의 허리에 쭉 짜냈다.
움찔─ 움찔─
오일이 떨어지자, 입을 콱 틀어막으며 몸을 움찔거리는 그녀.
묘하게 야한 그녀의 몸짓에 꼴깍 침을 삼킨 나는, 애써 담담한 척 말을 꺼내며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살살 할 테니까, 아프면 이야기해.”
“…네, 네에….”
기립근이 바짝 올라온 그녀의 얇은 허리에 손을 얹자, 손가락 끝에 꿈틀거리는 떨림이 느껴진다.
‘이게 뭐라고….’
단순한 의료 행위임을 자각하며 정신을 꽉 붙잡은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스윽…스윽…
마냥 뽀얗던 피부에 끈적끈적한 오일이 더해져 굉장히 야릇한 모습을 자아냈고,
“…흣…흐응….”
그녀는 허리를 문지를 때마다 미약한 경련과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후우…후읏….”
민감한 방한나의 반응에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느낀 나는, 다시는 마사지를 해주지 않기로 하며 손을 떼어냈다.
“…됐다.”
그렇게 다음은 없음을 다짐하며 약물 도포를 마친 뒤.
“…좀 누워있다 나와.”
“네, 네헤….”
마사지실에 가득 찬 방한나의 달큰한 체취를 뒤로하며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곧장 화장실로 들어섰다.
“…후우….”
방한나의 야릇한 반응 때문인지, 괜히 얼마 전에 임아린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 여, 여행만 즐길 생각으로 가려는 거 아니야….’
적당히 얼버무리며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보류해두긴 했지만….
임아린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받아 주거나, 거절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애매한 유사 연애를 계속 이어가거나.
머지않아 이 셋 중의 하나를 정해야 했다.
“…하아….”
그렇게 아주 잠시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우웅─ 우웅─
그새를 못 기다리고, 휴대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 서울시청 한규리 : 프로듀서님! 서원이가 찾는데, 혹시 어디 계세요? ]
어서 일터로 복귀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래…. 일부터 하자.”
나는 금방 가겠다는 답장을 남긴 뒤에 다시 한번 찬물로 얼굴을 적셨고,
임아린에 대한 고민은 나중으로 미룬 채, 곧장 훈련장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