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라 : 이쪽 거의 정리돼서 이제 올라가고 있어. ]
[ 아린이 : 고생 많았어! ]
[ 유라 : 주희는 괜찮아? ]
거실 소파에 앉아 메신저를 바라보던 설주희는 천천히 손가락을 옮겨 답장을 보냈다.
[ 나 : 멀쩡해 ]
[ 유라 : 지금 집이야? ]
[ 나 : 응 ]
[ 아린이 : 주희야 조금 이따가 너희 집으로 갈게! 같이 밥 먹자! ]
“…….”
자연스레 방문을 요청해오는 임아린의 메시지를 바라보던 설주희는, 최근 묘하게 서먹한 임아린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얼마 전 방송에서 임아린이 도지혁에게 미련이 남았음을 암시한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는데….
이번 사건에서 도지혁과 얽혔던 설주희는 차마 임아린을 볼 낯이 없었다.
[ 나 : 괜찮아 그냥 좀 쉴래 ]
[ 나 : 나 잘 거니까 혹시 볼일 있으면 전화해 ]
“…하아….”
설주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치우곤 탁상에 놓인 셔츠를 흘끔 바라보았다.
도지혁의 셔츠였다.
‘대체 내가 이걸 왜 가져왔지…?’
군데군데 찢어진 셔츠의 가슴팍엔 검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좋게 말해도 옷의 기능을 전혀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누더기.
그 누더기를 챙겨온 설주희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감싸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뭔가 이상해….’
현재 설주희의 마음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혼돈 그 자체.
그녀는 셔츠에 눌어붙은 핏자국을 볼 때마다 쓰러진 도지혁을 떠올렸고, 의식을 잃은 그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질 때면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건, 그 와중에도 도지혁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가 끝없이 샘솟는다는 점이다.
“…….”
설주희는 그런 자신의 상태가 명백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배신하고 문란한 생활을 즐긴 도지혁이 혐오스러운데, 동시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샘솟는다니.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태이지 않은가?
‘…답답해….’
처음엔 설주희도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도지혁과 대화를 나눠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당사자와 이야기를 해보면, 뭔가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설주희는 선뜻 도지혁에게 찾아갈 명분이 없었다.
대화조차 하기 싫다는 이유로 여태껏 연락을 안 했는데, 무슨 낯으로 도지혁을 찾아가겠는가?
“…….”
그렇게 설주희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며 해진 셔츠를 바라보던 그때.
“!”
그녀의 머릿속에 꽤 그럴듯한 아이디어 한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명분이 없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그래…. 목숨도 구해줬는데, 이 정도면 싼 거지.’
사건이 벌어진 날, 도지혁을 구하다가 찢어진 옷의 수선비를 들먹일 생각이었다.
씨익-
마침내 도지혁과 만날 명분을 떠올린 설주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도지혁의 셔츠를 집어, 쓰레기통이 아닌 세탁 망에 던져놓았다.
*
도지혁의 병실.
“썸이죠?”
병실 구석 테이블에 모여 앉은 서울시청의 팀원들은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도지혁과 임아린을 보며 나지막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조건이죠. 아니면 제 손에 장을 지집니다.”
그들은 원래 임아린을 위해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었는데, 임아린이 금방 갈 거라며 극구 만류한 덕에 옹기종기 모여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상대가 임아린이라니…. 알고 있긴 했는데, 새삼 프로듀서님이 대단해 보이네요.”
한규리의 감탄을 듣던 김준형은 익숙하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카데미 다닐 땐 세진 그룹 따님도 좋다고 따라다닌 놈입니다.”
“세상에…. 진짜요? 그 세진 길드 단장 이혜리?”
“그때, 이혜리 때문에 퀸즈가 천화 길드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근데 이제 보니까…, 소문이 아닌 거 같기도 하네요.”
김준형의 이야기를 듣던 방한나는 살짝 충격을 받고 말았다.
임아린이 도지혁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세진 길드의 단장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기에.
‘…어, 얼마나 인기가 많은 거야…?’
심지어 퀸즈의 다른 두 사람마저 도지혁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까지 나온 상황.
방한나는 무심결에 도지혁의 여자친구 후보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10년지기 소꿉친구에…. 대형 길드 단장에…. 으으….’
이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아버렸다.
“…하아….”
충격을 받은 방한나와는 반대로, 진서원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
도지혁이 누구와 사귀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사랑보다는 호감에 가까워서 그런지, 막연하게 도지혁이 윤인경과 사귀면 좋겠다는 생각만 품고 있었다.
“왜 그랬어?”
그때, 살짝 격양된 임아린의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주희가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알면서 그렇게 무리한 거야…?”
도지혁은 자신에게 쏠린 팀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차분하게 임아린을 진정시키려 했다.
“아린아. 조금 전에 말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으면 목숨 아까운 줄 몰라도 된다는 거야…?”
하지만 임아린은 넘어가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입이 닳도록 가르쳤잖아. 모든 작전은 안전을 우선으로 짜야 한다고. 돌아오지 못하는 작전은 그냥 자살이라고. 네가 그렇게 가르쳤잖아. 아니야…?”
“맞지. 그건 맞는데….”
“근데 왜 너는 그렇게 안 했어…?”
“어….”
“그러다가 만약 진짜 죽었으면? 주희가 안 구해줬으면…? 그것도 작전에 있었어…?”
도지혁은 흔히 말하는 ‘가불기’에 걸리고 말았다.
어떻게 대답해도 수렁에 빠져버리는 임아린의 모래 지옥에 걸려버리고 만 것이다.
“…미안.”
결국, 도지혁은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사과로 이야기를 끝맺으려 했는데….
“내가 지금 사과해달라고 했어…?”
임아린은 순순히 잔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내가 잘못해서….”
“네가 뭘 잘못했는데?”
단단히 표정을 굳힌 임아린은, 마치 병실에 팀원들이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도지혁을 쪼아댔다.
“네가 다쳤다는 이야길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린아…. 그게, 아니라….”
“진짜 나란히 장례식 치러봐야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어, 어어?”
도지혁은 극단적인 예를 꺼내든 임아린의 발언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린아.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농담?”
놀라울 정도로 싸늘해진 임아린의 목소리에 넋을 놓아버린 도지혁.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원들도 임아린의 냉랭한 모습에 무심코 숨을 죽였다.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마.”
임아린의 경고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도지혁은 뒤늦게 팀원들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다급히 묘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던 그때.
“아무튼…. 잘 돌아왔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임아린이 마치 할 걸 다 했다는 듯,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계를 살피며 슬쩍 몸을 일으켰다.
“더 있고 싶은데,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아….”
“…어? 간다고?”
‘아니, 이렇게 수습도 안 하고 가버린다고?’
도지혁은 논란을 일으키고 홀랑 빠져나가려는 임아린의 행동에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차마 스케줄이 있다는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괜히 분위기만 망친 거 같아서….”
“아, 아닙니다. 지혁이가 잘못하긴 했죠.”
임아린은 사뭇 뻔뻔한 얼굴로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지혁이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프로듀서님도 당연히 저희 팀인데….”
“좋으신 분들 같아서 정말 마음이 놓이네요…! 아. 이걸로 오늘 저녁이라도 좀 사 드세요.”
“괘, 괜찮습니다! 안 챙겨 주셔도….”
“아니에요. 맛있는 거 사 드시고, 남은 걸로 지혁이 간식이라도 사다 주세요…!”
마치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돈 봉투를 찔러 넣으며 팀원들에게 강렬한 인식까지 남겨주었다.
“그럼, 잘 부탁할게요…! 지혁아, 내일 봐…!”
드르륵── 탁──!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난 후.
뒷일을 예견한 도지혁은 미리 선수를 쳤다.
“혹시 해서 말하지만, 그런 거 아니야.”
“프로듀서님! 이게 어떻게 아니에요! 누가 봐도 맞잖아요!”
“야잇…! 넌 더 다쳐도 돼! 이 부러운 자식…!”
임아린과 도지혁의 관계로 후끈 달아오른 병실.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대체 뭐가 아쉬워서 안 사귀시는 거예요!?”
“아주 배때지가 불렀구만! 임아린이 사귀자고 하면 줄 설 남자가 천지에 깔렸다고!”
“몰라.”
도지혁은 한규리와 김준형의 공세를 요리조리 피하며 빙빙 말을 돌렸고,
“임아린 님이 프로듀서님을 엄청 좋아하나 봐….”
“…그러게요….”
김나래와 방한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
홀로 멀찌감치 떨어진 진서원은 임아린이 빠져나간 병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 너머에 누군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
똑… 똑…
욕조에 잠긴 홍유라는 잔잔하게 들려오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
그녀는 이번 사건이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정확히는 사건이 해결된 과정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사건 당일.
홍유라는 꽤 오래전부터 잡혀있던 스케줄에 맞춰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그녀가 평소와 같이 메이크업을 받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때, 가까운 지역에서 게이트가 열렸고, 홍유라는 헌터 협회의 호출을 받아 직접 게이트를 처리했다.
게이트 규모도 작았고, 정말 우연히 나서게 된 일이었기에 처음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서울에 벌어진 게이트를 우연히 지나가던 임아린이 처리했다는 점 춘천에 벌어진 게이트를 설주희가 닫았다는 점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데….’
마치 게이트가 열릴 곳을 미리 알고, 근처에 상위급 헌터들을 배치해둔 듯한 느낌.
그런 심증은 있지만, 확증은 없었다.
천화 길드와 구석일에게 의문을 품었을 때처럼 분명 뭔가 거슬리긴 하는데, 이렇다 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다.
“…하아….”
홍유라는 물에 살짝 떠오른 가슴을 슬며시 끌어안으며 임아린으로부터 들었던 도지혁의 소식을 떠올렸다.
‘…많이 다쳤다고 그러던데….’
그녀도 도지혁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운 감정과는 별개로 그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찾아가 볼까….’
만날 구실 자체는 충분했다.
이번에도 그가 우연히 게이트와 얽혔다는 점.
조사 차원에서 충분히 만나러 갈 이유가 있었다.
‘…아냐, 괜한 짓 하지 말자.’
하지만 홍유라는 결국 도지혁과 만나는 걸 보류하기로 했다.
괜히 그를 만나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대신….
개인적으로 천화 길드에 관한 정보를 조금 캐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