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주한 설주희의 힘은 여전히 상상을 초월했다.
콰아아아아앙───!!!
그녀는 빙백신공을 쏘아대며 길을 막아선 수많은 놀 무리를 단숨에 해치웠는데, 내공의 1%도 들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우리는 훨씬 빠르게 게이트 입구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데….
“주희야! 이쪽으로!”
게이트 입구에 진을 친 수많은 그레이 울프 무리와 중심에 서 있는 레드 울프를 발견한 우리는, 무너진 건물 잔해에 몸을 숨기며 상황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수가 꽤 많네….”
대략 눈에 보이는 숫자만 수십.
소설 속에서 묘사될 땐 몰랐지만,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군세였다.
‘아이템이라도 좀 챙겨왔다면….’
B급 괴수인 그레이 울프들은 자신들의 왕인 레드 울프의 지시를 받으며 움직인다.
레드 울프는 A급으로 평가받는 괴수로, 동급의 괴수들에 비하면 살짝 약한 축에 속하지만, 그 이름처럼 속도가 상당히 빠르고 영리한 덕분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수.
사건이 일찍 터져버린 탓에 기껏 세워둔 계획도 모두 일그러져버렸으니…,
아무래도 새로운 전략을 세워 접근해야 할 것 같았다.
“주희야. 전에 불리 앤트 상대했던 거 기억나지?”
나는 설주희에게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에 토벌했던 게이트를 예로 들었다.
“…….”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조용히 쏘아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딱히 부정하지 않을 걸 보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랑 똑같이 가자. 내가 주의를 끌 테니까, 레드 울프 쪽으로 날아가서 한 번에 터트려버려.”
그레이 울프는 반드시 레드 울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물론 그레이 울프들도 자기들끼리 체계를 나눠 움직이기도 하나, 레드 울프가 존재할 땐 무조건 레드 울프의 지시가 먼저다.
요컨대, 레드 울프라는 머리를 잘라내면, 그레이 울프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럼, 바로….”
그렇게 곧바로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무기를 넣어두곤 마력량을 점검하며 주의를 끌 방법을 찾던 그때.
“…마력도 제대로 못 다루는 주제에 그레이 울프를 유인하겠다고?”
설주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클을 걸어왔다.
“그레이 울프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멍청한 작전을 짜는 건데? 그렇게 죽고 싶어?”
언행은 평소보다 거칠었지만, 분명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평소 그녀가 나를 걱정하던 패턴과 똑같았기에.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
지금은 위험을 감수하는 게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레이 울프들은 먹잇감의 힘을 빼기 위해 치고 빠지는 걸 반복하는 차륜전과 비슷한 전략을 이용하는데, 잠자코 이를 일일이 상대하는 건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다못해 홍유라나 임아린이 있었다면 내가 나서지 않았겠지만….
당장 설주희를 보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잘 도망쳐볼게. 대신 네가 빨리 레드 울프 처리하면 되잖아. 안 그래?”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설주희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는데, 이내 나의 작전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걸 인정한 듯 대놓고 혀를 차며 몸에 내공을 휘감기 시작했다.
“알아서 해.”
“좋아. 바로 시작하자.”
그렇게 그녀의 동의를 받아낸 나는, 곧장 근처의 적당한 돌멩이를 주워 마력을 눌러 담았고,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있던 그레이 울프를 향해 내던졌다.
파아아앙────!!
폭음을 들려오자, 털을 바짝 세우며 주변을 경계하는 그레이 울프들.
아우우우우────! 아우우우우────!
곧이어 저 멀리 레드 울프의 지시가 내려진 찰나.
“끝나고 보자.”
나는 평소와 같이 설주희에게 인사를 남기며 잔해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릉……! 크르르르르릉……!
귓가에 파고드는 살벌한 울음소리와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살기.
“…으….”
갑자기 다리를 관통하는 뻐근한 환상통에 나지막이 신음을 흘린 나는, 생존 본능을 일깨우며 온몸의 마력을 활성화했다.
아우우우우우우──────!
그때, 레드 울프의 하울링이 울려 퍼지며 그레이 울프들이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간다아아앗!”
나는 진짜 주인공을 위해 길을 열기 시작했다.
*
‘멍청해.’
잔해 뒤에 숨어있던 설주희는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도지혁을 보며 생각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고.
‘배신자 주제에….’
설주희에게 있어서, 이번 사건은 애초에 도지혁이 끼지 않아도 되는 사건이었다.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사건이었다.
크르르르르르릉───!
파아아앙──!! 파아아아아앙──!!
하지만 도지혁은 길을 열기 위해 온몸을 바쳐 노력했고,
동시에 자신의 작전이 옳았음을 확실하게 증명해내고 있었다.
“…….”
설주희는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길을 흘끔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민했다.
‘이상해.’
동영상 속 도지혁이 보이던 모습과 지금껏 자신이 봐온 도지혁이 너무나 다른 것 같다고.
‘뭔가 이상한데….’
분명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설주희는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과 친구들을 배신한 그를 용서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 떠오를 뿐이기에.
그게 진리고,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이었으며,
어느새 머릿속에 박힌, 매우 당연한 공식이었다.
“…후우….”
그렇게 설주희가 묘하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곧장 레드 울프에게 접근하려는 찰나.
쿵─!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잠시 멈칫한 설주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고,
이내 건물 외벽에 처박혀버린 도지혁을 발견하고 말았다.
결국, 그레이 울프의 공격을 피해내지 못한 것이다.
“…!”
화들짝 놀란 설주희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도지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팍은 발톱에 긁혔는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는데….
그 선명한 붉은색을 마주한 순간.
‘도지혁이 죽는다.’
설주희의 머릿속도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도지혁이 죽는다.’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쏟아지는 공포와 물밀 듯 차오르는 분노.
‘도지혁이 죽는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엔 불쾌한 감정만이 가득 차올랐고,
‘도지혁이 죽는다.’
이성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본능이, 온몸을 지배하여 멋대로 내공을 폭발시켰다.
화아아아아악────!!!!
그렇게 도지혁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떠오른 순간.
“건드리지 마!!!!!!!!!!!!!!!!!!!!!”
분노에 눈이 돌아간 설주희는 어느새 작전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도지혁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
미처 피하지 못한 그레이 울프의 공격에 당한 직후.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은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황제’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붙은 채로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는, 마치 어릴 적 망상에 가까운 꿈이었다.
‘어이가 없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건, 꿈속의 내가 그런 대우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인터넷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는 점인데….
[ ‘황제’ 도지혁, ‘여왕’ 설주희와 결혼식을 올려… ]
[ 황제와 여왕의 만남. 세기의 결혼식… ]
[ 세진의 황제, 라이벌 천화 길드의… ]
[ 11월의 신부 설주희 “저희, 과속했어요.” ]
무려 설주희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내가 설주희랑 결혼을 해?’
아무리 꿈이라고 하지만, 비현실적이다 못해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고,
“…로듀서님…! 프로듀서님…!”
이내 눈앞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익숙한 방한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으음….”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프, 프로듀서님! 정신이 들어요!?”
“지혁아!”
“의, 의사 불러올게요!”
서울시청의 팀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너희가 왜….”
가슴팍에 느껴지는 뻐근한 고통에 미간을 좁히며 힘겹게 말을 꺼내자, 머리맡에 서 있던 김준형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이씨…! 대체 뭔 자신감으로 그레이 울프랑 싸운 거야?! 그러다 뒤졌으면 어쩌려고! 진짜 설주희가 구해줘서 다행이지…. 아녔으면, 너 지금 요단강 건넜어!”
“…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팀원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춘천에서 사건이 일어난 게 벌써 몇 시간 전.
게이트는 설주희가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닫아버렸으고, 그녀가 나를 구해 춘천의 병원으로 옮겨주었다고 한다.
“…설주희는? 그럼 여기 춘천이야?”
“설주희는 너 병원에 맡기고 그대로 가버렸어.”
“여기는 서울이에요! 응급처치만 받고 다시 서울로 옮겼대요…!”
“…서울? 너네는 별일 없었어?”
“아, 서울에도 게이트가 열렸었는데, 임아린 님이 잘 막아주셨어요.”
‘아린이가?’
김나래로부터 듣게 된 소식은 꽤 놀라웠다.
서울에 게이트가 열린 순간,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임아린이 무려 9서클짜리 마법을 펼쳐 괴수가 빠져나오기도 전에 게이트를 닫아버렸다고 했는데….
서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게이트들도 빠르게 진압이 됐으며,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건 전국에서 춘천이 유일하다고 한다.
‘…우연이라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큰 의문을 품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원작과의 차이가 심했기에.
‘뭔가 이상한데….’
원작에서 두 번째 사건은 전국적으로 적잖은 피해를 남겼고,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곳이 서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이상할 정도로 순탄하게 넘어갔으며, 내가 있던 춘천만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내용이 달라진 영향인가?’
그렇게 의문을 품으며 병실에 들른 의사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똑똑─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려왔다.
“응?”
“누구지…?”
“손님인가…?”
자연스레 모든 팀원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고,
드르륵──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사랑스러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 얼굴을 빼꼼 들이밀어 왔다.
“…지, 지혁이 병실 맞나요…?”
임아린이었다.
“어!”
“이, 임아린…?!”
“우와….”
방한나와 진서원을 제외한 팀원들은 유명 헌터인 임아린의 등장에 매우 놀라워했는데….
“앗….”
정작 임아린은 안에 사람들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여왔다.
누가 보더라도,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