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27화 (27/165)

“할까?”

임아린은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몰래 사랑을 나누는 걸 목격했던, 이제는 사라져버린 시간의 지독한 악몽이었다.

“주희야…. 방에 애들 있잖아.”

“그래서?”

“얘가 진짜…. 앗! 손 빼…!”

“쉿! 이러다 들키면 어떡해?”

“그걸 아는 애가…. 아니, 차라리 방에라도…우웁…!”

짙은 고요함이 깔린 거실엔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야릇한 소음이 조그맣게 울려 퍼졌고,

새카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임아린은 설주희에게 희롱당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푸하…!”

“설주희. 진짜 화내기 전에 그만해…! 이러다 애들한테 들키겠어…!”

임아린은 이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흐응…. 화 안 낼 거잖아.”

“너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여기는 화가 잔뜩 나긴 하네.”

“야…!”

“들키기 싫으면…, 내가 소리 못 지르게 잘 막아보던지?”

9월의 어느 날, 명절을 맞이해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신 날이었다.

홍유라와 함께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깨어난 임아린은 거실에 남아있던 두 사람이 엉키는 모습을 목격하였고,

그렇게 자신이 가장 아끼던 두 사람이 부모가 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봐야 했다.

“헤웁…! 우움…!”

“츕…쪼옵…쪽…. 후움…쫍….”

사실 임아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우친 지 오래였다.

지금껏 몇 번이고 꿔왔던 악몽이었기에, 설주희의 목소리를 듣게 된 순간부터 자신이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꿈을 깨지 않았다.

충분히 스스로 의식을 깨우며 이 끔찍한 광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아예 설주희와 자신의 위치를 바꿔, 작게나마 만족감을 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아…하아….”

“…사랑해.”

“잠깐, 나올 거 같아! 밖에…!”

“대답 안 해?”

“나도 사랑…! 앗….”

임아린은 그러지 않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치밀어 오르는 싸늘한 분노와.

심장이 멎어버릴 정도로 온몸을 난도질해대는 소름 끼치는 고통.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잔혹한 상실감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하여.

“…….”

이윽고 꿈에서 깨어난 임아린은 촉촉하게 젖은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맺힌 자신의 눈가를 쓱쓱 닦아내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현재 시간은 오전 11시.

약속했던 대로, 구석일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설주희 춘천 스케줄 출발했습니다. ]

예정대로 일이 잘 진행됐음을 확인한 임아린은,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곤 지그시 눈을 감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았다.

도지혁의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희망찬 미래를.

*

“춘천까지 왔는데, 그래도 닭갈비는 먹어봐야지 않겠어요?”

진서원과 나는 춘천 시내에서 윤인경과 합류하였다.

그녀가 우리를 데려간 식당은 가격대가 꽤 나가는 고급스러운 닭갈비 전문점이었는데,

외부에서 누군가 올 때마다 데려온다는 그녀의 발언에서, 그녀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제가 괜히 주말에 붙잡은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사실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었는데, 마침 권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30대 초반인 윤인경은 꽤 열심히 관리한 듯, 성숙한 20대 정도로 보이는 곱상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헤친 그녀는 몸매가 과하게 도드라지지 않는 우아한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신경을 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원이는 어때요? 잘 적응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보호자처럼 말을 걸어오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의 옆에서 밑반찬을 먹고 있는 진서원을 흘끔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훈련도 열심히 하고…. 일도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사실 진서원은 팀원으로서의 훈련만 받고 있지만, 굳이 밝힐 필요는 없으리라.

“사람들하고는 잘 지내나요?”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팀원들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저희 팀에 한나라는 아이가 있는데, 서원이를 잘 챙겨주거든요.”

“어머, 그래요?”

실제로 방한나는 진서원을 잘 챙겨주고 있고, 진서원도 방한나를 잘 따르고 있다.

물론 함께 훈련하는 건 여전히 싫어하지만.

“실례합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서원이한테서 이쪽에 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집이 가까우신가 봅니다.”

“저쪽 아파트 보이죠? 저기서 살아요.”

윤인경은 춘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집값이 비싼 만큼 나름 안전하게 지은 거 같긴 했으나, 근처에 게이트가 열리면 손을 쓰기 힘들만한 위치였다.

‘자택에서 죽은 건가?’

그렇게 속으로 윤인경을 지켜낼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별생각 없이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은 닭고기를 집어 진서원의 접시에 옮겨주었다.

그 순간 진서원이 윤인경의 눈치를 흘끔 살피더니, 고기를 깨작거리며 나지막이 이야기해왔다.

“…저 말고, 언니 줘요.”

윤인경과 나는 그녀의 발언에 의아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제야 진서원의 속뜻을 이해한 나는, 냉큼 잘 익은 고기를 집어 윤인경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드리랍니다.”

그러자 그녀는 뒤늦게 진서원의 말을 이해한 듯 살짝 어이없어하더니….

이내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렇게 진서원 덕분에 분위기가 풀어진 우리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럼 낮엔 항상 카페에 계신 겁니까?”

“네. 알바를 따로 안 뽑아서, 제가 없으면 카페가 안 돌아가거든요.”

나는 윤인경과의 대화로 그녀가 사망한 원인과 게이트가 영향을 끼치는 장소를 동시에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이 근처네.’

하필 그 장소가 바로 춘천 시내였다.

“지혁 씨는 주말에 주로 뭐 하세요?”

“웬만한 일 없으면 보통 집에서 자료 조사를 합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자료가 많을수록 좋거든요.”

“아…. 그럼 집에만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럼 나중에 같이 사이클 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서원이도 같이 갈 거지?”

“…나도?”

“얘는? 뭘 모르는 척이야. 당연히 같이 가야지!”

윤인경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꽤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진서원은 그런 윤인경과 나의 모습이 퍽 만족스러운 듯 묘하게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게, 아무래도 그녀와 나를 이어주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칠 무렵.

자연스레 윤인경의 카페로 옮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카페에서 디저트나 먹고 가요. 제가 대접할게요.”

“밥도 얻어먹는데, 너무 얻어먹기만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안 팔리면 다 남는 건데요 뭘. 가실 거죠?”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우리는 카페로 이동하기 위해 계산을 마치곤 곧장 식당을 빠져나왔는데….

“비오나? 오늘 비 온다는 이야기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걸 발견하고 말았다.

‘…뭐지?’

나는 먹구름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평범한 먹구름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색깔이 짙어 보였기에.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처음엔 게이트가 열리는 징조인가 싶었지만, 두 번째 사건이 터지는 시간과 맞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정독하여 읽었던 부분이었기에, 정확하다.

“…일단 타시죠.”

그렇게 의문을 품은 채로 두 사람을 카페로 데려가기 위해 차로 다가간 그 순간.

쿠구구궁───

하늘에서 무언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네.”

윤인경과 진서원은 단순한 천둥이라고 생각한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나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게이트였다.

“다들 빨리 차에 타요!”

“네?”

“…?”

“게이트입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게, 게이트요!?”

두 사람을 차에 태운 나는,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재빨리 시내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빠앙─! 빵빵─!

이미 도로가 꽉 막혀서, 도통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다들 꽉 붙잡아요!”

“네?”

끼기기기긱---!

“꺄아앗!!”

나는 다급히 차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그러나 게이트는 이미 준비를 마친 듯 어마어마한 굉음을 뿜어냈고,

쩍─────! 쩌저저저저저적───────!

마침내 열려버리고 말았다.

“지, 지혁 씨! 어떡해요…!”

설상가상 차도는 이미 버려진 차들로 죄다 막힌 지 오래.

더 이상 차로 빠져나가는 건 힘들어 보였다.

“뜁시다!”

“…네, 네!?”

“빨리요!”

나는 황급히 차를 세우곤 두 사람과 함께 도시를 가로질렀다.

“꺄아아아악─!”

“도망쳐어!!!”

“멈추지마! 뛰어어!!”

난장판이 된 도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갈 길을 잃은 채 무작정 앞으로만 뛰었는데,

하필 그 방향이 게이트가 열린 방향이었다.

“여러분! 이쪽입니다! 그쪽으로 가면 게이트가 있어요!”

나는 최대한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 게이트의 위치를 알려봤지만….

“꺄아아아아앗!!!”

“사, 살려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경향이 없는 듯, 마치 불나방처럼 게이트를 향해 뛸 뿐이었다.

‘젠장…!’

그때.

쿠웅─! 쿠웅─! 쿠웅─!

근처에서 무언가 착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엄마야!”

“!”

두 번째 사건에 등장하는 하이에나를 닮은 수인 괴수, 놀이 나타난 것이다.

‘시간이 당겨졌어…!’

놀이 나타났다는 건, 일주일 뒤에 열렸어야 할 게이트가 지금 열렸다는 뜻.

설마 했던 변화에 살짝 당황한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근처의 식당 건물로 데려가며 소리쳤다.

“여기 들어가 있어요!”

“네, 네!?”

“놀은 후각으로 상대를 찾아요! 안쪽에 창고 같은 곳에 숨어있으면, 음식 냄새에 가려져서 안 들킬 겁니다!”

“…프, 프로듀서님은요!?”

윤인경의 부름에 잠시 멈칫한 나는, 그녀와 나란히 서 있던 진서원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항상 지니고 다니던 아공간 주머니에서, 한 장비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

“서원아.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언니를 지켜야 해.”

“…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당황한 듯 허둥거리는 그녀.

나는 무작정 그녀의 손에 암흑룡의 건틀릿을 끼워주었다.

“마력 끌어올리고, 힘껏 휘둘러. 내가 가르쳐줬잖아, 기억나지?”

“…어어….”

“프, 프로듀서님! 서원이는…!”

윤인경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를 붙잡아왔다.

진서원은 현재 마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F급이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이 그녀가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원작의 설주희가 막 능력을 각성했을 때에도 F급이었기에.

“서원이는 할 수 있습니다. 믿어 주세요.”

나는 그렇게 재빨리 두 사람을 식당 안쪽의 작은 창고로 숨긴 뒤.

“게이트가 여기까진 미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게이트를 좀 보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프, 프로듀서님…!”

“서원아! 부탁한다!”

윤인경과 진서원을 뒤로한 채, 곧장 식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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