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근처의 어느 고급 호텔.
“…….”
고급스럽게 포장된 5천만 원짜리 암흑룡의 건틀릿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옮겨 맞은편의 이혜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끄러운 허벅지를 드러내며 다리를 꼰 채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장난스러움이 한껏 묻어나왔다.
“이걸 나한테 주는 이유가 뭐야?”
팔짱을 꼬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이혜리가 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대답해왔다.
“뇌물.”
“…뭐?”
그녀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반대로 꼬더니, 고운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이야기해왔다.
“네 팀. 계속 서울시에 묶여있을 생각은 없잖아. 안 그래?”
나는 그녀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실제로 언제까지 서울시와 함께할 생각은 없기에.
팀 서울시청은 현재 서울시 소속.
시청에는 계속 함께할 것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몸집이 불어난다면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게 불가피하다.
“이건 나중에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선물하는 거야. 너 같은 인재를 두 번이나 놓치고 싶지는 않거든.”
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진서원에게 1억을 제시한 것처럼, 그녀 나름의 투자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굳이 입찰에 끼어들어 가격을 높여놓고, 억지를 부리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200만 원이면 살 걸 10배가 넘게 주고 샀으면서 뇌물이라고? 너무 양아치 아냐?”
어쨌든 내 돈은 아낄 수 있었고, 세진 길드와 계약하지 않을 것도 아니니, 굳이 그녀의 뇌물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딱 200만 원어치. 그 이상은 못 쳐줘.”
나머지 차액만큼은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흐응…. 그래, 그 정도는 기회비용으로 치지 뭐.”
그녀는 이해하겠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심한 사과와 함께 웬 서류를 건네왔다.
“어쨌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이건 사과의 선물이야.”
나는 그녀가 건네온 서류를 받아 읽어보았고….
‘파트너십 제안서?’
뜻밖의 내용에 의문을 품으며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적힌 그대로야. 사실 다음 주 중으로 공문 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만난 김에 미리 줄게.”
길드 간의 파트너십 자체는 그리 드물지 않다.
서로의 트레이닝 방식이나 데이터, 인프라 등을 공유하고, 함께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며 긍정적인 효과를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팀과 길드 간의 파트너십은 아예 처음이었다.
“…뭘 이야기하는진 알겠는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줄 게 없어.”
파트너십이란 자고로 서로에게 오가는 게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야 세진 길드로부터 가져올 게 많지만, 세진 길드에겐 전혀 이득이 없다.
이런 파트너십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글쎄….”
그러나 이혜리의 생각은 다른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지그시 시선을 보내왔다.
“네가 있잖아.”
너무나 당당한 그녀의 말에 외려 할 말을 잃은 나는, 일단 천천히 생각 좀 해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제안서를 챙겼다.
*
다음날.
“서원아. 오늘은 그냥 밖에서 먹는 게 낫지 않아? 요 앞에 엄청 괜찮은 장어집 있는데….”
“…싫어요.”
평소와 같이 훈련을 마치고 진서원과 함께 장을 보러 온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장어 싫으면…. 그럼 그 앞에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 너 스테이크 좋아하잖아!”
“…스테이크?”
“응. 거기 엄청 유명한 곳인데, 되게 맛있어! 어때? 가볼까?”
오늘은 주말을 맞아 진서원을 본가에 데려다 주기로 한 날이었는데, 진서원이 구태여 집밥을 먹고 싶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아직 출발조차 못 하고 있었다.
“…….”
그와중에 원 픽 메뉴인 스테이크에 흔들린 진서원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는데….
“…집에서 먹고 싶어요.”
결국, 스테이크조차 그녀의 단호한 취향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 집에서 먹자. 그렇게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얌전히 마음을 접고 쇼핑카트를 밀어 앞으로 나아가려던 그때.
꾸욱─
진서원이 내 옷소매를 슬쩍 붙잡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귀찮아요?”
마치 풀 죽은 아이처럼 불안해 보이는 그녀.
솔직히 말해서, 직접 밥상을 차리는 건 귀찮은 일이 맞다.
그래도….
미래의 S랭크가 될 그녀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너한테 차려 주는 건 하나도 안 귀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요?”
“응. 진짜로.”
진서원은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잠자코 옷소매를 놓아주었고, 묘하게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앞서나갔다.
‘귀엽네.’
그렇게 딸바보가 되는 아빠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며 마트를 돌아다니던 도중.
“…!”
진서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응?”
나는 별생각 없이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고,
“!”
홀로 쇼핑카트를 밀고 있는 익숙한 얼굴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방한나였다.
“…한나 언…! 우웁…!”
“자, 잠깐, 서원아!”
“…?”
방한나를 부르려는 진서원을 빠르게 제압한 나는, 다급히 그녀를 데리고 방한나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
“…왜 도망쳐요?”
“한나가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걸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떻게요?”
진서원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박한 눈빛을 보내왔고,
너무나 순진한 그녀의 발언에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설명했다.
“프로듀서가 팀원하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걸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친하구나?”
“아냐! 아니, 그게 맞긴 한데…. 아무튼 괜한 오해를 품게 될 수도 있어.”
“…오해요?”
“너랑 내가 만난다거나, 뭐…. 하여튼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너네 집에 드나드는 건 웬만해선 안 들키는 게 좋아. 알았지?”
진서원은 뭔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고,
우리는 재빠르게 쇼핑을 마치곤 곧장 진서원의 집으로 향했다.
“…으….”
“서원아. 씻고 누워야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달려드는 진서원을 붙잡아 욕실로 들여보낸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갈아입을 옷을 꺼내어 욕실 안쪽으로 전달해주었다.
‘진짜 사람 인생 모를 일이네.’
처음엔 진서원을 챙기는 게 마냥 어색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정말 부모라도 된듯한 느낌이다.
아니, 아빠보다는…. 삼촌에 가깝지 않을까?
쏴아아아아아───
나는 곧이어 들려오는 욕실의 물소리를 뒤로하곤 곧장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였다.
“이건 어디에 넣을까….”
내가 잡아 준 진서원의 숙소는 꽤 좋은 곳이었다.
욕실 겸 화장실에 거실을 겸하는 부엌이 붙어있었고, 안쪽에 따로 침실이 달린 고급형 레지던스였는데,
흔한 호텔 스위트룸처럼 고급스럽진 않지만, 웬만한 가전들은 모두 구비돼 있고, 공간도 꽤 널찍하고, 환기 시설까지 완벽해서 말 그대로 몸만 와도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밥은…. …그냥 돌리자.”
차마 쌀까지 안칠 자신이 없던 나는, 마트에서 사온 인스턴트 쌀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진서원이 요청했던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통─ 통─ 통─ 보글보글……
그렇게 앞치마까지 두르곤 야채를 손질하며 된장찌개를 끓이던 그때.
벌컥─
샤워를 마친 진서원이 욕실에서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반찬 준비를 시키기 위해 별 생각 없이 몸을 돌렸는데….
“서원아. 반찬은….”
수건 한 장으로 겨우 몸을 가린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야잇!”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휙─ 돌린 나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내가 옷 벗고 나오지 말라고 했지! 자꾸 그렇게 조심성 없이 다닐래!?”
그러자.
“…옷이 젖었어요.”
진서원이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말대꾸를 늘어놓았다.
“…근데 바쁘신 거 같아서 그냥 나온 거예요.”
그리고는 그대로 내 뒤를 지나치더니, 옷장 앞에 쪼그려 앉아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걸 혼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아….”
팔자에도 없는 육아 문제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뇌리에 선명히 박힌 그녀의 몸매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며 잠자코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뽀얀 살결은, 사라지기는커녕 외려 내 머릿속을 휘저어댈 뿐이었다.
“…….”
우여곡절 끝에 식사 준비를 마친 뒤.
“맛있어?”
끄덕─ 끄떡─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진서원이 그토록 원하던 집밥을 먹인 나는, 그녀가 짐을 싸는 동안 설거지를 했다.
“서원아. 다 쌌어?”
그런데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진서원이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스으… 스으…
아무래도 꽤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대로 집에는 보내줘야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깨우기 위해 슬쩍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
우우웅─ 우우웅─
때마침 식탁에 놓은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윤인경 ]
진서원의 보호자인 윤인경한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 아, 지혁 씨. 혹시 출발하셨나요? ]
“아직 안 했습니다. 마침 출발하려고 했는데…. 서원이가 막 잠들었네요.”
[ 어머 진짜요? ]
윤인경은 그렇다면 내일 와도 괜찮다며, 나도 피곤할 테니, 아예 천천히 오라고 이야기해왔다.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곧장 출발하겠다고 대답했는데….
[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
그녀는 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며, 차라리 내일 오라고 권유해왔다.
‘…이건 받아들이는 게 낫겠지.’
사건이 터지기까지 앞으로 약 일주일.
윤인경의 죽음을 막기 위해선 그녀의 정보가 필요하니, 만나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음 날, 춘천으로 향하는 길.
[ ……님이 신청해 주신 현하연의 순애! 참 좋은 노래… ]
라디오를 들으며 조용히 차를 몰던 도중.
“…저기.”
옆자리에 앉은 진서원이 말을 걸어왔다.
“응?”
그녀는 무언가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이내 용기를 내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언니…. …어때요?”
“…어?”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며 진서원을 흘끔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물게 진지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인경 씨…, 말하는 거야?”
“…네.”
“…글쎄….”
시선을 거두어 잠시 차도를 바라보던 나는, 진서원의 입장에서 가장 최선일 대답을 고민하여 슬쩍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지. 너를 잘 챙겨주시잖아.”
그러자.
“…그게 다예요?”
진서원이 묘하게 집요한 모습을 보여왔다.
‘얘가 왜 이러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짝 의아함을 품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선을 바꾸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게 다지. 뭐 다른 게 있나?”
그리고는 옆자리를 흘깃 바라보며 그녀의 눈치를 살펴보았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앙증맞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렇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진서원의 반응에 의문을 품고 차를 몰길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오려나?”
춘천 근처에 접어들자, 하늘을 둘러싼 시커먼 먹구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