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25화 (25/165)

“전보다 얼굴이 좋아졌네.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이혜리는 생긋 웃으며 천화 길드와 퀸즈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여전하네.’

천화 그룹의 라이벌 그룹인 세진 그룹의 손녀인 그녀는 유독 라이벌 의식이 강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 앞에서도 항상 거침없이 말을 꺼내왔었다.

“최근에 일이 좀 쉬워지긴 했지. 그래서…, 단장님께선 웬일로 직접 행차하셨대?”

“이번 경매에 좀 볼일이 있어서.”

“경매?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그래?”

이혜리는 내가 경매에 참여한다는 소식에 눈을 가늘게 뜨곤 마치 먹잇감의 크기를 가늠하는 뱀처럼 시선을 보내왔다.

분명 나에게서 캐낼 게 있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혹시 해서 말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내가 뭘?”

능청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나는 순순히 경매에 참여한 목적을 이야기하며 그녀에게 엄포를 늘어놓았다.

“그냥 적당한 장비 하나 주우러 온 거니까, 괜히 방해하지 마.”

“장비?”

“우리 메인 딜러 장비 하나 쥐여주려고.”

“…흐응….”

이혜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문득 장난스러운 눈빛을 띠며 넌지시 말해왔다.

“설마…, 내 피 같은 세금을 이런 곳에서 쓰려는 건 아니지?”

“걱정하지 마. 네 세금은 이미 내 뱃속에 있으니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자신이 경매장에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해왔다.

“난 피 묻은 왕관을 사러 왔어.”

“…피 묻은 왕관? 이번 메인?”

“응. 우리 인나가 쓰면 딱 좋을 거 같더라고?”

그녀가 말한 ‘인나’는 블랙 로즈의 리더이자 S급 헌터인 공인나를 뜻한다.

“살 수 있겠어? 경쟁자가 꽤 많을 거 같던데.”

“그렇긴 해. 아까 보니까, 해외 길드에서도 찾아온 거 같더라고.”

“해외에서까지?”

이번 경매의 메인으로 불리는 ‘피 묻은 왕관’은 몇 년 전 게이트 속 유적에서 발견됐다는 S급 아이템이다.

세간에는 피 묻은 왕관에 엄청난 액티브 스킬이 달려 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 소문이 과장된 경향이 있다.

원작 소설에 등장했던 정보에 의하면, 피 묻은 왕관은 사용 시 주변인의 마력을 흡수하여 사용자를 강화한다.

그러나 효과에 비해 지속 시간이 짧고, 흡수하는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효율이 낮은 편에 속한다.

“음…. 난 그렇게까지 살 만한 아이템은 아닌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

“거품이 너무 많이 꼈어. 나라면…. 차라리 그 전에 나오는 ‘루나리아 팬던트’를 샀을 거야.”

“루나리아 팬던트?”

이혜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왔고,

나는 루나리아 팬던트의 효과와 경매 순서를 떠올리며 가벼운 설명을 늘어놓았다.

루나리아 팬던트는 착용자의 마력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대신, 마력에 따라 신체가 강화되는 패시브가 달려있다.

이 효과는 저주가 아니라서 직접 켜고 끌 수 있고, 마력을 많이 사용하는 만큼 효과도 강화돼서 효율이 꽤 높은 편이다.

“출품 순서가 피 묻은 왕관 직전이니까…. 아마 시세보다 싸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단 말이지?”

잠자코 설명을 듣던 이혜리는 내 뜻을 이해했다는 듯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멀찍이 물러나 있던 비서를 불러왔다.

“길드에 연락해서, 루나리아 팬던트로 타겟 바꾼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아니, 이걸 바꿔?’

나는 내 말을 맹신하며 계획을 바꾸는 그녀의 행동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물론 사고 말고는 그녀의 자유이지만, 내 말만 듣고 처음부터 정하고 온 목표를 바꾸는 건 조금 곤란했다.

“뭘 믿고 그렇게 막 바꿔?”

“뭘 믿긴. 널 믿지.”

이혜리는 뻔뻔하게 눈웃음을 치며 다시 비서를 물렸고,

나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혜리는 항상 이랬다.

그녀가 막 세진 길드의 부단장을 달고, 블랙 로즈의 전신인 레드즈를 만들었을 당시.

한창 고민에 빠져있던 그녀를 도운 이후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항상 강력하게 지지해주었다.

물론 내 입장에선 그저 능력을 읽고 잠재력이 괜찮은 팀원을 골라 준 것뿐이지만….

세진 그룹의 손녀라는 부담감에 한창 빠져있던 그녀는, 마치 한 줄기 빛이 내려온 것 같았다고 말해왔다.

‘내가 세진 길드를 들어갔어야 했나….’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품으며 이혜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때앵── 때앵── 때앵──

암시장 내부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곧 메인 이벤트인 경매가 시작한다는 뜻이다.

곧바로 이혜리와 함께 경매장으로 향한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고,

그녀의 비서가 구해다 준 음료를 마시며 여유롭게 경매장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꽤 많네.’

암시장 중앙에 마련된 커다란 경매장은 가운데 무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피 묻은 왕관에 대한 소문 탓인지, 못 앉은 사람이 생길 정도로 꽤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테러를 한 건지….’

원작에선 설주희가 이곳에 소란을 일으켜 아이템을 훔쳐갔었다.

아무리 주인공 보정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폐쇄적인 곳에서 테러를 시도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에 가까웠다.

[ 신사 숙녀 여러분!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메인 이벤트! 아이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

곧이어 시작된 경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중앙 단상에 물건이 놓이기 시작했다.

[ 대망의 스타트를 끊을 상품은 바로…! 인어의 눈물입니다! ]

‘인어의 눈물’은 괴수의 일종인 인어가 연심을 품을 때 흘린다는 눈물이다.

주로 포션이나 엘릭서를 만들 때 사용하는데, 구하기가 어려워서 상당히 희귀한 소재로 평가받는 아이템이다.

‘별로 쓸모는 없지.’

인어의 눈물뿐만 아니라 꽤 쓸만한 아이템들은 많았으나, 정작 나에게 필요한 아이템은 그다지 없었다.

“붉은 등갑이네. 저건 어때?”

“좋은 재료긴 한데, 다루기가 힘들어서 난 그닥.”

“흐음…. 그럼 이건 넘겨야겠네.”

그대신 나는 이혜리의 쇼핑을 도와주었다.

이혜리는 사뭇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도 내 이야기를 꼼꼼히 들어주었는데, 그런 그녀의 반응 덕분에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 차례는….”

“드디어 메인이네.”

그렇게 ‘루나리아 팬던트’까지 단돈 85억에 구매하고 나니, 어느덧 메인 상품인 ‘피 묻은 왕관’이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오……!

피 묻은 왕관의 등장에 감탄을 내뱉는 관중들.

얼룩진 황금처럼 생긴 왕관엔 피처럼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미적 감각이 없는 내가 봐도 꽤 멋들어진 디자인이었다.

“예쁘긴 하네.”

“사줄까?”

또 다시 장난을 걸어오는 이혜리를 흘끔 쳐다본 나는, 씩 웃으며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돈 많아?”

그러자 그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있게 대답해왔다.

“저거 열 개는 더 살 수 있을걸?”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 드디어 그 녀석이 왔습니다! 이번 경매의 메인 상품! 피 묻은 왕관입니다! ]

웅성웅성── 웅성웅성──

본격적인 경매에 기대감을 품은 듯 술렁이는 사람들.

[ 시작가는 100억! 호가는 10억씩 올라갑니다! ]

메인이라 그런지, 시작 금액부터 궤를 달리했다.

[ 100억! 110억! 120억! 130억 나왔습니다! 140억! ]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태 가만히 있던 사람들도 입찰에 참여하며 호가를 높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5배가 넘는 가격이 찍히고 말았다.

[ 500억! 500억 나왔습니다! ]

아이템 하나에 500억이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속한다.

대체 불가능한 Ex급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거품이 가득 낀 아이템에 쏟아붓기엔 매우 아까운 금액이다.

[ 510억! 이제 20억씩 올라갑니다! ]

잠자코 경매를 지켜보던 나는, 이혜리 쪽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이번엔 얼마까지 쓸 예정이었어?”

“900억”

아이템 하나에 900억이라니!

루나리아 팬던트보다 거의 10배에 가깝게 비싼 가격이었다.

“너 800억 아낀 거야. 나한테 고마워해.”

이혜리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매력적인 미소를 보내왔고,

기나긴 경매 끝에, 마침내 피 묻은 왕관에 가격표가 매겨졌다.

[ 850억! 850억…! 850억! 낙찰입니다! ]

무려 850억.

아마 이혜리가 껴들었다면, 세진 길드 창고에 850억짜리가 잠들었을 것이다.

[ 자, 경매는 계속됩니다! 다음 상품은…! ]

경매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어느새 상품도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드디어 내가 노리던 아이템이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암흑룡의 건틀릿입니다! ]

‘드디어 나왔구나.’

암흑룡의 건틀릿은 그 이름처럼 검은 용의 머리를 닮은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원작에선 설주희가 사용하던 아이템으로, 강력한 기공을 날릴 수 있는 기능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과소평가된 비운의…. 아니, 고마운 아이템이다.

[ 시작가는 100만 원! 호가는 10만 원 씩 올라갑니다! ]

100억에 시작하던 피 묻은 왕관에 비하면, 1%도 안 되는 가격이었지만, 그 성능은 아마 100배 이상.

[ 150만 원! 더 없으십니까? ]

때를 노리던 나는, 기세가 줄어들었을 즈음부터 팻말을 들며 입찰에 참여하였다.

[ 160만 원! 160만 원 나왔습니다! ]

대충 200만 원 근처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여유롭게 낙찰을 기다리던 그때.

스윽─

옆에 앉아있던 이혜리가 팻말을 들더니,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했다.

[ 300만 원! 300만 원입니다! ]

“…야.”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참전에 당황한 나는 그녀를 쏘아보았고,

그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그리며 슬쩍 윙크를 날려왔다.

‘이럼 곤란한데….’

나는 곧바로 팻말을 들며 이혜리와 입찰 경쟁을 시작했다.

[ 350…! 380! 400! 이제 50만 원씩 올라가겠습니다! ]

순식간에 500만 원을 넘겨버렸음에도 호가는 멈출 줄 몰랐고,

[ 1100만 원! ]

결국, 호가가 천만 원을 넘겨버린 그 순간.

“오천.”

이혜리가 훌쩍 거리를 벌리며 내 입찰을 막아서 버렸다.

“야. 너…!”

“들어오던가?”

뻔뻔하게 도발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

마땅한 대체재를 떠올리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팻말을 들며 입찰을 받아들였다.

[ 5100! 5100만 원, 나왔습니다! ]

널린 게 아이템이었으나, 이거만큼 진서원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이 없었다.

하지만….

[ 5200! 5200만 원입니다! ]

이혜리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추격해왔다.

“이혜리. 너 진짜 적당히 해. 800억을 아껴줬더니,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나는 이혜리를 노려보곤 으름장을 늘어놓으며 팻말을 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덥석-

이혜리가 내 손을 붙잡더니….

흘끔 눈을 마주치곤 묘한 눈빛을 띠며 속삭여왔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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