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지혁아. 너 키 몇이냐?”
“갑자기?”
“빨리. 몇인데?”
나는 아침부터 뜬금없이 키를 물어오는 김준형의 물음에 의문을 품으며 대답해주었다.
“82. 근데 키는 왜? 누구 소개라도 시켜 주려고?”
“182에…. 짙은 눈매….”
그러자 김준형이 무언갈 확인하는 듯 휴대폰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너, 임아린이랑 사귀냐?”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건네왔다.
“뭔 개소리야.”
“아니, 진짜로…! 임아린이랑 아무 관계도 아냐? 정말?”
단순한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김준형은 이상할 정도로 눈을 부라리며 꼬치꼬치 캐물어 왔다.
눈빛에 묘한 진심이 담긴 게, 아무래도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뭔데.”
그는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다급히 휴대폰을 매만지며 웬 동영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한밤의 데이트?”
“좀 봐봐.”
김준형이 보여 준 건 ‘한밤의 데이트’라는 유명 토크 쇼에 출연한 퀸즈의 동영상이었다.
‘이런 것도 찍었어?’
나는 속으로 퀸즈를 굴리는 천화 길드에 욕을 퍼부으며 잠자코 동영상을 감상했는데….
[ 짙은 눈매에, 남자다운 얼굴. 키는 182cm이고, 약간 차가워 보이지만… ]
“…응?”
임아린이 이상형을 언급한 대목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 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였다.
“이거 너지? 그치?”
“…글쎄….”
“이 새끼 이거, 어떻게 임아린 같은 여자를 두고…! 너, 그래놓고 나한테 여자 소개 어쩌고 그런 거야? 진짜 큰일 날 놈이네!”
김준형은 임아린과 내가 사귀는 게 당연하다는 듯 나를 갈궈댔다.
“너어! 내가 딱 봤어. 앞으로 허튼짓하다가 걸리면, 임아린한테 다 이를 거야!”
“뭘 또 일러. 걔랑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냐! 임아린이 너한테 마음 있는 건 확실하구만. 안 그랬으면 굳이 나한테 연락까지 했겠어?”
“…뭘 해?”
나는 무심코 미간을 좁히며 김준형을 바라보았고,
그는 바로 며칠 전에 임아린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고 이실직고해왔다.
“임아린이 너 잘 부탁한다고, 일부러 기프티콘까지 보내왔더라.”
심지어 그냥 연락만 한 것도 아니고, 무려 뇌물까지 보냈다고 한다.
“무슨 한우 세트를….”
“미친….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리고. 넌 그걸 또 받아 쳐먹냐?”
“야, 당연히 나도 처음엔 거절했지! 이거 봐봐!”
나는 김준형이 보여온 메시지 내용과 통화 기록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
예상보다 더한 내용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 퀸즈 임아린 : 준형 씨가 지혁이 좀 잘 챙겨 주세요! 부탁할게요! ]
[ 나 : 아이고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
……
전반적인 내용엔 특별한 게 없었다.
그냥 단순하게 나를 잘 챙겨달라는 이야기와, 나에게 특별한 일이 생기면 이야기해달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이야기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
[ 퀸즈 임아린 : 사실 지혁이가 하도 인기가 많아서 걱정했거든요… ㅠㅠ ]
[ 퀸즈 임아린 : 준형 씨가 옆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 ]
……
바로 그녀가 마치 내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요 며칠 사이, 임아린의 이상형 발언은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 퀸즈의 대마법사의 연인은 누구? ]
[ (단독) 천화 길드 관계자의 증언 “분명 그 사람일 것“ ]
[ 퀸즈의 멤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언론은 임아린의 이상형에 들어맞는 사람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이목을 끌었고,
그중에선 프로듀서였던 나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다.
“프로듀서님. 혹시 키가 어떻게 되세요?”
“키는 왜요?”
“어…. 그냥 궁금해서요.”
“…180이요.”
“진짜요? 더 크지 않아요?”
“…아닙니다.”
덕분에 난데없이 홍역을 치른 나는, 적당히 거짓말을 하며 괜한 루머를 차단해야 했는데….
정작 원인 제공자인 당사자와는 아직도 대화를 못하고 있었다.
[ ㄱ아린이 : 나 일요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데, 혹시 그때 볼 수 있을까…? ]
임아린과는 따로 연락을 통해 약속을 잡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도 안 맞고, 아예 만나서 식사라도 하자는 태평한 소리를 해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사실 내 입장에선 임아린의 호감이 매우 난감했다.
정확히는 ‘퀸즈’의 호감이.
그녀들이 나에게 은근한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지금껏 퀸즈의 멤버들과 10년을 지내왔으니, 외려 눈치를 못 채는 게 더 이상할 수준이다.
문제는….
내가 그녀들의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나의 최종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이 세계의 결말을 바꾸는 것.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퀸즈’라는 최강의 팀을 만들었다.
퀸즈는 단순히 사람이 모인 김에 만든 게 아니라, 철저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팀이다.
원작 속에서 매번 홀로 싸우던 설주희에 맞춰, 가장 어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홍유라와 임아린을 동료로 이끌었다.
그렇게 겨우 하나로 만들어 놓은 팀이 퀸즈인데, 하필 세 사람 모두 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됐다.
사실 세 사람 모두 과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그녀들이었기에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설주희의 마음을 받아 준다면, 홍유라와 임아린에게 영향이 간다.
홍유라의 마음을 받아 준다면, 설주희와 임아린에게 영향이 간다.
임아린의 마음을 받아 준다면, 설주희와 홍유라에게 영향이 간다.
기껏 쌓아 올린 팀워크가, 겨우 연애 때문에 와르르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두의 마음을 받아 줄 수도 없다.
아무리 가족처럼 친한 사람이라 해도, 연인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세 사람 모두 일정 선을 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그녀들을 떠난 지금은 모두 부질없어졌으나….
임아린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프로듀서님.”
그때, 한창 러닝머신을 뛰던 진서원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집에서 먹어요.”
“응?”
“…밥이요.”
“아.”
뭔가 했더니, 집에서 밥을 먹자는 이야기였다.
“그래. 오늘은 집밥 먹자.”
“…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풀썩─
진서원이 은근슬쩍 옆에 자리를 잡곤 땀을 닦기 시작했다.
‘응? 벌써 다 뛰었나?’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동작에 외려 의문을 품은 나는, 저 앞에 텅 빈 러닝머신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서원아. 다 뛰었니?”
그러자.
“…….”
진서원이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뻔뻔하게 음료를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혹시 했는데, 아무래도 또 요령을 피우러 온 것 같았다.
“…한나 데려올까?”
“…!”
진서원은 방한나와 같이 훈련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열정적인 그녀와 함께하면, 지금처럼 요령을 피울 수 없기에.
“오늘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어서 가서 뛰고 와.”
“…….”
진서원은 반항이라도 하는 건지 대답하지 않으며 몸을 일으켰고, 온몸으로 싫다는 티를 내가며 런닝머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귀엽네.’
그렇게 오후 훈련을 모두 끝낸 후.
여느 때와 같이 진서원과의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선 나는, 곧장 차를 몰고 집이 아닌 이태원으로 향했다.
“여기 어디였는데….”
꽤 많은 외국인이 사는 동네인 이태원엔 수입된 아이템이나 밀수로 들어온 아이템들을 판매하는 곳이 많은데,
한창 퀸즈에 아이템 스폰서가 없을 땐 나도 이곳에서 가성비 좋기로 소문난 해외 아이템들을 구매하기도 했었다.
“찾았다.”
이번에 내가 들른 곳은 이태원 구석에 있는 작은바.
빈 자리를 비집고 차를 댄 나는, 지하로 이어지는 바 입구로 내려갔다.
계단의 끝엔 화사한 조명이 달린 책장 모양의 벽으로 막혀있었는데, 벽면에 달린 책 한 권을 잡아당기자, 책장 모양의 벽이 한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이이잉……
마침내 드러난 화려한바 내부.
고급진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지만, 묘하게 아늑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때 직원이 다가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이해왔다.
“몇 분이십니까?”
“한 명이요.”
“자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석으로.”
직원은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곤 곧장 ‘상석’으로 안내해주었다.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카운터 테이블 구석에 달린 상석은 그 화려한 이름과는 다르게 의자조차 없는 자리였는데,
애초에 앉으려고 온 자리가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이어서 바텐더 하나가 은근슬쩍 다가와 질문을 건네왔다.
“혹시 찾으시는 술 있으십니까?”
“나이트캡, 차갑게.”
“주종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와인으로.”
Cold Nightcap, with Wine.
암거래 시장 출입하기 위한 암호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바텐더의 안내를 따라 카운터 뒤로 향하자, 지하로 통하는 또 다른 계단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지나 끝에 달린 천막을 치워내니, 상당히 넓은 공간이 눈앞에 드러났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매일 아이템 경매가 열리는 이태원 지하 암시장이다.
‘꽤 많네.’
내가 이곳에 온 건, 진서원을 위한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서.
D급 아이템으로 평가받는 [ 암흑룡의 건틀릿 ]을 낙찰받으러 온 것이다.
‘D급이니까…. 무리 없이 살 수 있겠지?’
암흑룡의 건틀릿은 원작 소설에도 등장하는 S랭크 아이템이다.
제대로 된 힘을 다루지 못하면 겨우 D급 정도의 성능밖에 내지 못해서 낮게 평가된 아이템으로, 진서원이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서 구매하러 왔다.
“어디 보자….”
그렇게 오늘 경매 순서를 확인하기 위해 팸플릿을 받아 암시장 내부를 가볍게 돌아다니던 도중.
“어라?”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이네?”
팸플릿을 보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
생각지도 못한 얼굴의 등장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보랏빛 머리카락과 어우러진 고혹적인 인상의 외모.
세련된 오피스룩으로 감싸진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는 가볍게 절제된 매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혜리?”
세진 길드의 단장이자, 친한 동창생 중 하나인 그녀.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이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