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23화 (23/165)

“…어, 어떡하지…, 일단 씻어야 하나? 흐아아…!”

무심결에 받아버린 도지혁과 만남까지 앞으로 약 30분.

속옷에 티셔츠만 입은 채로 늘어져 있던 그녀는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치, 침착해 방한나…! 차분하게, 차분하게 하면 돼…!”

스스로를 달랜 말과는 달리, 그녀는 조금도 차분함을 찾지 못했다.

“일단 머리는…. 그냥 묶자…!”

사실 30분이면 간단한 외출을 준비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다.

이미 샤워도 마친 뒤였고, 멀리 나갈 게 아니니 옷차림도 신경 쓸 게 없다.

물론 간단한 외출조차 신경 쓰고 다니는 사림들도 있기는 하지만, 방한나는 그런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방한나는 자연스럽게 옷차림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이, 이상한가…?”

그녀는 침대에 놓인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예쁘긴 했지만, 조금 과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프로듀서님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몰라….’

일부러 과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호감을 어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미처 거기까진 떠올리지 못한 방한나는, 어쩔 수 없이 원피스를 집어넣곤, 평범한 티셔츠에 바지를 골랐다.

특별히 예쁘진 않았지만, 추레해 보이지도 않은 조합이었다.

“…이게 낫겠지?”

방한나는 못내 아쉬운 듯 한쪽에 놓인 원피스를 바라보곤, 미련을 내버리듯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칫솔을 입에 물었다.

*

어느 작은 놀이터.

벤치에 앉아 방한나를 기다리던 나는, 가로등 아래 짙은 고요함이 깔린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

오래전, 그러니까 막 이 세계에 떨어졌을 무렵.

내가 소설 속에 있다는 걸 믿지 못하고 정처 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나는, 지금처럼 어두운 놀이터에 홀로 앉아있었다.

그 당시엔 여러 가지 힘든 일이 겹쳐서, 차라리 세상이 망하기 전에 죽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죽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던 거 같다.

‘아린이가 참 큰 역할을 했네.’

내가 이곳에 떨어져서 가장 처음 만난 소설 속 등장인물은 임아린이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임아린’이라는 걸 모르고 만났지만.

한창 놀이터에 앉아 우울해하고 있을 무렵, 나는 우연히 임아린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크게 도움을 받은 건 아니었으나, 이 세상이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된 좋은 계기였는데….

정작 임아린은 어렸을 적 나와 만났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우연히 깨닫기도 했고, 내가 그런 찌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살짝 부끄러워서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평생 밝혀지지 않으리라.

“프로듀서니임!”

때마침 도착한 방한나가 손을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티셔츠의 츄리닝 바지라는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워낙 몸매가 상당해서 그런지 묘하게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꼭 유라 보는 거 같네.’

묘한 익숙함에 무심코 쓴웃음을 흘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 괜히 귀찮게 한 게 아닌가 싶네.”

벤치에 나란히 자리를 잡은 그녀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답해왔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헤헤….”

얼굴이 묘하게 불그스름하고 자꾸 실실 웃음을 흘리는 게, 혹시 술이라도 마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간섭할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근데, 무슨 이야기를…?”

방한나는 묘한 기대감을 품은 듯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마 그녀가 원하는 내용은 아닐 것 같았다.

“사실….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저한테요?”

“앞으로 네가 팀을 이끌어줬으면 해.”

“…네?”

나는 방한나에게 팀 리더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팀에서 그녀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은 없기에.

진서원은 말할 것도 없고, 김나래도 리더십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실 이건 수인이가 있던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아무래도 수인이가 연장자라서 고민을 좀 많이 했거든. 근데 어쩌다 보니 수인이도 나가게 됐고, 바로 서원이도 들어오게 돼서…. 이제 정식으로 너한테 맡기고 싶어.”

“…저, 저요…?”

방한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혹시 해서 말하는 거지만, 다른 애들이 안 어울려서 너한테 떠넘기는 건 절대 아냐. 너는 붙임성도 좋고, 성격도 좋고, 리더십도 있잖아. 만약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차라리 리더를 정하지 않았을 거야.”

“…어….”

칭찬을 듣던 그녀는 어딘가 찔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무래도 내 눈앞에서 칭찬을 들으니, 조금 부끄러운 것 같았다.

“물론 당장 리더 역할을 해내라곤 말하지 않을게. 네가 잘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주고 싶거든. 좀 해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이야기해도 괜찮아.”

방한나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 어두운 낯빛을 하며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생각을 정리한 듯 한결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왔다.

“…해볼게요…!”

마침내 그녀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낸 나는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곧장 두 번째 본론을 꺼냈다.

“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

“어떤 건데요? 괜찮으니까, 뭐든 말해 주세요!”

“네가 서원이랑 좀 친해졌으면 싶어서.”

“…네?”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듣던 방한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왔다.

“어…. 서원이랑요…?”

워낙 소통이 어려운 상대라, 아직 어색한 것 같았다.

“이건 서원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저를 위해서…?”

방한나는 아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여왔는데….

사실 그녀가 진서원과 친해져야 하는 건 필수 아닌 필수였다.

탱커인 방한나는 공격 능력이 결여돼있다.

언젠간 방패를 이용한 기술을 다룰 수 있게 되더라도, 공격을 주도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메인 딜러인 진서원은 방어 능력이 결여돼있다.

천마신공은 밸런스를 갖추기보단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능력에 가깝고, 원작에서 천마가 패배한 원인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방어력에서 기인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서원과 방한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너희 둘은 반드시 서로를 보완해가며 싸워야 해. 그런데…. 사실 서원이가 좀 많이 내성적인 편이잖아? 그래서 네가 서원이를 잘 끌어줬으면 좋겠어. 물론 서원이한테도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네 역할이 더 중요하니까.”

설명을 듣던 방한나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슬며시 시선을 마주쳐 오더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왔다.

“그…. 혹시 프로듀서님은….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은근한 기대감이 담긴 그녀의 눈빛.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했지. 아니었으면 말도 안 꺼냈을걸?”

“…저, 정말요?”

“그럼! 내가 말했잖아. 우리 팀 에이스는 너고, 네가 가장 중요한 주축이라고. 아무리 진서원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건 절대 달라지지 않아. 만약 네가 해내지 못했을 거라면 절대 시키지도 않았겠지. 알다시피, 내가 못하는 걸 시키는 사람은 아니잖아.”

나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잔뜩 불어넣어 주었다.

이번엔 거짓말도 아니었기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그렇죠…! 프로듀서님은 그런 분이시죠…!”

방한나는 내 칭찬이 기뻤는지 실실 웃음을 흘려댔고,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해왔다.

“알겠습니닷…! 저만 믿어 주세요…!”

*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방송국 스튜디오.

“퀸즈와 함께하는 한밤의 데이트!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들 재밌게 시청하고 계신가요?”

퀸즈의 세 사람은 유명한 토크 쇼에 게스트로 참여하였다.

“자, 이번엔! 1부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이번엔 퀸즈 멤버들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처음엔 특별한 내용 없이 흘러갔다.

“주희 씨는 평소에도 운동을 즐기신다고 들었는데요?”

“몸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요. 안 움직이면 괜히 근질근질해요.”

“아린 씨는 영화를 되게 좋아하신다고요?”

“네! 영화관 다니는 걸 좋아해서, 자주 다니고 있어요!”

주로 쉬는 날에 뭘 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등등 가벼운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아! 유라 씨네 집에는 필라테스 기구가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네. 원래는 요가를 좋아했었는데, 최근에 필라테스로 옮겼어요.”

사실 홍유라가 필라테스를 시작한 건 도지혁과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도지혁에게 필라테스를 가르쳐준다는 빌미로 자연스레 자신의 매력을 맘껏 어필할 수 있었고, 만족스러울 만큼 몸을 접촉하며 꽤 유의미한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부질없게 됐지만 말이다.

“자. 이번엔 조금 더 깊은 주제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인터뷰가 진행되던 도중, MC가 새로운 주제를 던졌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세 분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하네요!”

이상형.

세 사람은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먼저 주희 씨부터 여쭤볼게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글쎄요….”

설주희는 당연하다는 듯 가장 먼저 도지혁을 떠올렸지만, 이내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일부러 다른 대답을 꺼냈다.

“그냥 저보다 강한 사람이면 좋겠네요.”

“이야…. 주희 씨보다 강한 남자라니…. 후보가 없을 수도 있겠네요!”

MC는 설주희에겐 캐낼 게 없다는 걸 눈치채곤 곧장 홍유라에게 질문을 넘겼다.

“그럼 유라 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실까요?”

“음…. 저는….”

홍유라도 당연하게 제일 먼저 도지혁을 떠올렸다.

마찬가지로 도지혁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점에 살짝 마음이 상하긴 했지만, 설주희와 다르게 좋았던 점은 확실히 좋았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분이면 좋겠어요. 아무리 외모가 좋아도, 성격이 안 맞으면 별로니까요.”

“아. 유라 씨는 성격이 우선이군요? 그럼 외모적인 부분은 어떤 게 좋으신가요?”

“제가 키가 좀 큰 편이라, 저보다 키가 컸으면 좋겠어요.”

“어? 혹시 지금까지 만났던 분 중에 키가 작은 분이…?”

“음….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홍유라는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당당하게 거짓말을 흘렸다.

도지혁과의 경험을 제외하면, 남성과 교제한 경험이 없었기에.

그 사실을 모르는 MC와 방청객들만 그동안 비밀에 싸여있던 홍유라의 사적인 이야기에 환호성을 높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린 씨의 이상형은 어떻게 될까요?”

“어…. 저는….”

임아린도 다른 두 팀원과 똑같이 도지혁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지혁에 관한 정보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짙은 눈매에, 남자다운 얼굴. 키는 182cm이고, 약간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따뜻하고, 요리도 잘하고…. 아, 손도 크고, 화도 잘 안 내고, 배려심도 많고, 은근히 장난기도 많은 사람이요!”

“우와….”

MC는 임아린의 대답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대박을 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슬쩍 질문을 건넸다.

“아니, 아린 씨! 그 정도면 이상형이 아니라, 그냥 남자친구 분을 이야기하신 거 아닌가요?”

그러자.

“제발 그랬으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아요!”

임아린이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수줍은 웃음을 터트렸고, MC와 방청객들도 따라 웃으며 자연스레 질문이 마무리되었는데….

“…….”

설주희와 홍유라는 그들과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임아린이 이야기한 사람이 도지혁이라는 사실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대답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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