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혁이 진서원의 집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임아린의 집.
“잘 먹었어.”
“나도. 오랜만에 맛있게 먹은 거 같네.”
“헤헷…. 맛있었다면 다행이야!”
설주희와 홍유라를 불러 손수 저녁 식사를 대접한 임아린은, 은근슬쩍 와인까지 꺼내며 간단한 술자리를 벌였다.
“음…. 이거 향 좋다.”
“뭐, 괜찮네.”
“많이 있으니까, 편하게 마셔…!”
최근 급격히 늘어난 스케줄과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홍유라와 설주희는 자연스레 알코올에 빠져들었고….
“…후우…. 오늘따라 엄청 피곤하네….”
“벌써 취했어? 설주희 술 많이 약해졌네?”
“네 허벅지나 가리고 말해. 하도 빨개서, 네 머리카락인 줄 알았잖아.”
어느새 두 사람 모두 눈이 살짝 풀릴 정도로 취기가 올라있었다.
사실 겨우 와인 한두 병에 취할 그녀들이 아니었지만….
무슨 일인지, 오늘따라 빠르게 취해버렸다.
“저어…. 얘들아…!”
그때, 홀로 멀쩡한 얼굴을 한 임아린이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나…, 할 말이 있어!”
“할 말?”
“…뭔데?”
임아린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잔을 내려놓곤, 홍유라와 설주희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했다.
“사실…. 얼마 전에 지혁이 만나고 왔어.”
“누굴 만나?”
“…정말?”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설주희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홍유라.
임아린은 결연한 얼굴로 도지혁과 만났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음해를 당하고도 자신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외려 자신을 용서해주며, 위로해주기까지 했다고.
눈을 번뜩이며 강력하게 주장하는 임아린의 모습은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사람처럼 맹목적이었고, 설주희와 홍유라는 낯선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지혁이가 절대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해…! 그 동영상은 조작된 거야!”
“…너 제정신이야?”
“아린아….”
“정말이야! 너희도 지혁이랑 만나보면…!”
“적당히 해, 임아린. 우리가 그 쓰레기 새끼를 왜 만나?”
“제발 주희야…. 넌 속고 있는 거야…!”
“속고 있는 건 너겠지! 대체 그 새끼한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이러는데?”
설주희는 분명 도지혁이 임아린에게 무언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선, 그녀가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기에.
“안 되겠다. 너, 이제 그 새끼랑 절대 만나지 마.”
“…어?”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대체 무슨 짓거리를 당했길래 이러냐고!”
“지혁이는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네가 이래? 어!?”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홍유라가 다급히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잠깐 진정해!”
사실 홍유라는 내심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이미 앞뒤가 맞지 않는 정황과 구석일의 행동으로 동영상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던 상황이다.
도지혁이 정말로 쓰레기인지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정확히 의심하는 정도일 뿐.
홍유라는 동영상 속 도지혁의 행동이 진짜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치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봄이 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을 지나 싸늘한 겨울이 오면, 메마른 낙엽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둘 다 이제 도지혁 이야기는 그만해!”
그렇게 홍유라는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막기 위해 아예 화제를 차단해버렸고,
“난 분명 이야기했어. 앞으로 그 새끼 만나지 말라고.”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몰라…!”
설주희와 임아린은 서로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며 겨우 다툼을 멈추었다.
*
“여깁니까?”
좁은 골목길에 적당히 차를 세우고 진서원을 뒤따른 나는, 그녀가 멈춰선 작은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빌라의 벽면은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굉장히 낡아 보였다.
‘꽤 오래된 건물인가 보네.’
진서원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층.
내려가는 계단에 불조차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 흔한 도어락조차 달리지 않은 현관문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선 나는, 진서원이 불을 밝히는 동안 집안을 스윽 둘러보았고, 생각보다 더 처참한 집안의 모습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여기서 할머니랑 살았다고…?’
건물 구조 자체는 나름 괜찮았다.
화장실이 딸린 작은 거실 하나에 방 하나.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전혀 관리가 안 된 게, 아무리 봐도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
그렇게 홀로 심각해지며 집안을 둘러보길 잠시.
거실에 작은 탁상을 두고 진서원과 마주 앉은 나는, 본격적으로 영입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일단,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
“혹시, 사장님께 제 이야기를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을 대신하는 그녀.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명함을 건네며 차분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서울시에 소속된 팀 서울시청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길드가 아니라, 실제 정부 기관에 소속된 팀이죠. 여기…, 여기 보시면, 저희 팀에 대한 기사도 있습니다.”
진서원은 휴대폰에 뜬 인터넷 기사를 흘끔 내려다보았고,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는 서원 씨를 저희 팀 메인 딜러로 모시고자 합니다. 서원 씨가 지니고 있으신 능력이 저희 팀과 분명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작은 그녀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 다음은 팀에 대한 어필.
“최근에 서울시장이신 이상흠 시장님과 면담을 통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덕분에 3부급 팀에 준하는 체계를 이루게 됐고….”
그 다음은 수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막 시작한 팀이긴 하지만, 무조건 최저 연봉은 맞춰 드릴 예정입니다. 다른 팀원 분들도 그렇게 계약을 맺었고,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면 업계 표준보다 더 높은 연봉으로 재계약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제 돈이 아니니까, 아낄 필요가 없거든요.”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마친 나는, 미리 챙겨온 계약서를 그녀에게 슬쩍 들이밀었다.
“이게 저희 팀 계약서입니다. 카페 사장님께도 말씀을 드렸으니, 함께 확인하시면서 생각해보셔도 됩니다.”
“…….”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탁상에 놓인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진서원.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마음에 안 드나?’
그녀에게 천천히 생각해보라 말하긴 했지만, 사실 굉장히 빠듯한 상황이다.
내일 모레 6시까지 팀원을 등록하지 못하면, 팀 서울시청이 팀원 미달로 사라지기에.
그렇다고 사인을 강요할 수도 없으니, 나로선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받아주라….’
그렇게 진서원이 계약서를 뚫어지게 바라보길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는데….
“…죄송해요. 못할 거 같아요.”
하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진서원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뜻밖에 이야기를 꺼내왔다.
“…할머니가 싫어하셔서요.”
“할머님…말씀이십니까?”
알고 보니, 진서원의 부모님은 꽤 유망한 헌터 부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게이트에서 벌어진 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말았고, 그 탓에 할머님께서 헌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품게 되셨다고 하는데….
‘…응?’
그녀의 사정을 되짚어보던 나는, 다시 한번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진서원은 할머니가 하지 말라 했다는 이유로 영입을 거절해왔다.
아마 내가 제안하지 않았다면, 자연스레 헌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됐겠지.
그런데 어떻게 S랭크를 달성하여 천마가 됐단 말인가?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그렇게 위화감을 느끼며 곰곰이 머리를 굴리길 잠시, 이번엔 다른 말로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뗀 찰나.
“!”
오래된 기억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줄도 몰랐던 오래된 기억이.
“…서원 씨. 이건 다른 질문인데, 혹시 사장님과 알고 지내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언니요?”
“예. 사장님께서 서원 씨를 엄청 챙기시던데, 저는 처음에 두 분이 자매인 줄 알았습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서원은 여사장과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왔다고 대답해왔고….
나는 비로소 그녀가 천마로 변하게 된 계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
진서원을 친언니처럼 아껴준 카페의 여사장이, 원작 소설 속 두 번째 사건에 휘말려 죽는다는 것을.
‘진짜 불쌍한 설정이었구나.’
근거는 원작 소설에 있었다.
두 번째 사건은 첫 번째와 달리, 여러 개의 게이트가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며 벌어진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게이트가 서울에 열리고, 조금 작은 게이트들이 몇몇 도시에서 열리는데….
그 도시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강원도 춘천이었다.
이 내용은 원작 소설 속에서도 두 번째 사건의 후일담으로 매우 간단히 서술되는 내용이다.
만약 내가 이 내용을 떠올리지 못하고, 운 좋게 진서원을 곧장 서울로 데려가 버렸다면….
홀로 남겨진 여사장은 사고에 휘말려 죽어버렸을 테고,
진서원은 원작 소설대로 천마가 됐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십년감수 했네.’
그렇게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살짝 마음을 놓은 나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떠올리곤 결연한 마음을 다지며 진서원과 눈을 마주쳤다.
“서원 씨.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저희 팀에 이름만 등록해 주시는 겁니다.”
“…제 이름이요?”
“그렇습니다.”
나는 진서원을 영입하려는 이유를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정수인이 나가며 팀원이 부족하게 됐고, 며칠 뒤면 팀이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 진정성을 보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명의만 등록하고, 실제로 헌터로서 활동하시진 않아도 됩니다. 물론 사무실엔 한 번 정도 들르시긴 하겠지만…. 아마 그게 전부일 겁니다.”
물론 단순히 그녀에게 이름을 빌려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다.
“1억. 이름을 빌려주신다면, 제가 사례로 1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돈 이야기가 나온 순간, 여태껏 무심하던 진서원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하게 제 사비로 드릴 생각입니다. 앞으로…. 딱 한 달 정도만 명의를 빌려주시면 됩니다. 중간에 생각이 바뀌시면 그대로 활동을 하셔도 좋고요. 물론 서로를 위해 따로 계약서도 작성할 겁니다.”
나는 진서원을 천마로 만들 생각도, 헌터로서 놓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꺼낸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수단인 돈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붙잡아 두는 것이다.
“당연히 연봉에 따른 월급도 나올 거고…. 아, 카페에서 월급만 덜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국세청에서 태클을 걸 수도 있거든요. 이건 카페 사장님에게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려대는 진서원.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집안을 슥─ 둘러보았다.
진서원은 그동안 가난함 속에서 살아왔다.
이 집이 그를 증명했고, 사용 감이 묻어나는 가구들이 확실한 증거였다.
아무리 미래에 그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천마가 된다고 해도, 지금은 단순히 안타까운 사정을 품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일 뿐이다.
“실례되는 말씀일 수 있지만…. 할머님께서, 기회를 놓치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겠죠?”
돈의 유혹에 빠져버린 진서원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어, 언니랑 이야기해 볼게요.”
카페의 여사장과 이야기해보겠다는 대답을 꺼내왔다.
*
다음 날.
근처의 호텔에서 적당히 숙식을 해결한 나는, 다시 한번 진서원의 카페에 들러, 보호자나 다름없는 여사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당장 계약서부터 쓰죠.”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