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6화 (16/165)

생각지도 못한 임아린의 등장에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그때.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안부를 물어왔다.

“…잘 지냈어…?”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

온몸으로 불안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마음이 약해진 건지, 매정하게 대하려는 마음과는 다르게 덤덤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임아린은 마치 꾸중이라도 들은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더니, 조심스레 눈을 치켜뜨곤 시선을 마주쳐오며 이야기를 꺼내왔다.

“하, 할 말이 있어서….”

“…나한테?”

묘한 감정이 휘감겨온다.

그녀가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피해자인 주제에 어째서 내 눈치를 살피는지도 모르겠다.

“할 말이 뭔데?”

임아린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내 발치를 흘끔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왔다.

“그….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

그 순간.

‘아.’

나는 이미 다른 손님이 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아, 안 될까…?”

고의인지 아닌지, 임아린은 보호심을 자극하는 가녀린 표정을 지으며 은근히 나를 압박해왔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살짝 약해진 나는, 괜히 눈을 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

“…….”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눈치껏 집을 나선 방한나는 홀로 길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한창 때인 주말 오후라 그런지, 길거리엔 평소보다 많은 연인들이 돌아다녔는데….

지나다니는 커플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임아린과 도지혁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무슨 사이지…?’

겨우 인사가 전부였던 짧디짧은 만남이었으나, 방한나는 분명 임아린과 도지혁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고….

정확히는 임아린이 도지혁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증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임아린과 처음 인사를 나누던 순간, 방한나는 온몸에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들을 느꼈다.

흔히 여성끼리 상대방의 수준을 확인할 때 나타나는 시선이었다.

남다른 몸매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시선을 이끌었던 방한나는 희미한 임아린의 경계심을 감지해낼 수 있었고,

그것이 좋아하는 남자를 곁에 둔 여성의 방어기제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지혁을 바라보던 시선도 그랬다.

도지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보였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으니,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수준이었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방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이 사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선남선녀.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 같았다.

“…….”

방한나는 무심결에 임아린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왜 부러워하는지도, 부럽다는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도지혁 같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는 임아린을 부러워했다.

*

“…….”

방한나가 돌아가고, 어색함만이 남아버린 거실.

한동안 방한나가 앉아있던 자리를 조용히 바라보던 임아린은, 슬며시 시선을 마주쳐오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다.

“…아니지?”

묘한 간절함이 담긴 그녀의 눈빛.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주어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걸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야. 사정이 조금 긴데….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왜 이걸 해명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짝 의문이 들었으나, 왠지 그녀에게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그랬구나….”

임아린은 내 말을 믿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왔고, 이내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선뜻 사과를 건네왔다.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나는 왜 그녀가 나에게 사과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임아린은 내가 그 동영상 속에 등장하던 쓰레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홍유라나, 설주희처럼.

그래서 내 억울함을 믿어주지 않았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뒤늦게 사과를 한단 말인가?

“…….”

임아린은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덜컥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소파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려대며,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해오기 시작했다.

“…지, 지혁아…. 내가 미안해…. 널 믿어주지 못해서…. 정말…흣…. 미안해….”

“…아린아….”

나는 임아린의 진심 어린 사과에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친구를 믿지 못한 건 분명 사과할만한 게 맞지만, 이렇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빌어올 정도는 아니고, 애초에 내가 봐도 속을만한 증거였기에, 세 사람을 탓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흑…. 미안해…. 흣…. 잘못했어어….”

이렇게 필사적으로 빌어오니, 외려 그녀에게 묘한 동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린아. 괜찮으니까, 어서 일어나.”

나는 일단 일으키고 보자는 생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흑…. 진짜, 맨날 내가 잘못해서…. 흐으…. 정말 미안해…. 흣….”

그러자 임아린이 더더욱 서럽다는 듯 굵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고, 나는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늘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게 달래주었다.

“아냐, 괜찮아. 진짜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 응?”

“…지, 지혁아….”

촉촉하게 젖은 분홍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임아린은 말없이 내 품속에 폭─ 안겨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잠자코 그녀를 달래주었는데….

기분 탓인지, 왠지 모르게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내 다리를 산산조각 내버린 그녀가 평생을 책임지겠다며 사과해왔던 그날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

그렇게 임아린을 꼬옥 껴안으며 달래주길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울음을 그친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또 누군가 내 동영상을 보내왔다는 이야기였다.

“…뭐?”

임아린은 구석일에게 받아왔다며 복사본이 담긴 USB를 건네주었고, 나는 곧장 TV에 연결하여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대체 이건….’

동영상을 모두 확인한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번에도 동영상 속의 인물은 누가 봐도 ‘도지혁’이었으며, 이전의 동영상보다 한층 더 쓰레기 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 나는 이 동영상이 조작된 거라고 생각해…! 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다,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임아린은 무조건 나를 믿겠다며 내 편을 들어주었고, 설주희와 홍유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보겠다며, 기운을 북돋아 주기까지 했다.

“…고맙다. 역시 우리 아린이 밖에 없네.”

찌르르 밀려오는 감동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버림받았었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 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억울함을 밝힐 방법에 대해 의논해보았고,

“내가 자리를 만들어볼게!”

“괜찮겠어? 애들이 싫어할 텐데….”

“아냐! 주희랑 유라도 속으론 널 믿고 싶을 거야!”

“…그럴까…?”

“응! 확실해!”

“그래…. 그럼, 부탁할게.”

“나만 믿어…!”

조만간 다른 두 사람과 자리를 주선해보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

얼마 후.

팀 서울시청의 훈련날.

“야, 지혁아!”

“왜.”

“너 그 인간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뭘?”

“시장 말이야! 대체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예산을 뿌리냐고!”

상부로부터 뭔가 귀띔을 받은 건지, 김준형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초지종을 물어왔다.

“그냥….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

“장난치지 마.”

“아니, 정말로.”

“거, 진짜 치사하네…. 좀 이야기해주라!”

“다 해줬잖아.”

그렇게 김준형과 투닥거리며 훈련 시간표를 확인하는 사이, 한규리가 다가와 뜻밖에 소식을 전해왔다.

“저희 외부 훈련장 사용 허가 떨어졌어요!”

어제 신청했던 외부 훈련장 사용이 바로 승인된 것이다.

“와…. 역시 권력이 좋긴 좋네. 그냥 다 프리패스야!”

“프로듀서님. 오늘 바로 옮기실 건가요?”

“오후부터 이용 가능해요?”

“네! 마침 딱 세 자리 비었다고 하네요!”

우리는 기존에 이용하던 체육관에서 오전 훈련을 마친 뒤, 곧바로 새로 구한 헌터용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무려 일반적인 헌터용 훈련장이 아니라….

상위급 팀들이 이용하는 최고급 훈련장이었다.

“프, 프로듀서님! 저희 이제 여기서 훈련하는 겁니까!?”

“맞아.”

“세상에…! 한나야! 저기 좀 봐! 진짜 괴수 같아!”

“우와아…. 엄청 크다…! 책에서 본 거랑 똑같아요…!”

“준형 씨! 저거 봐요! 랭킹 9위, 팀 크로커다일이에요! 햐아… 진짜 잘생겼다….”

“시설이 진짜 좋긴 좋네.”

팀원들은 마치 신기술을 마주한 것처럼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기존에 사용하던 일반 체욱관과 차이가 너무 심하다 보니,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돈이 있는데, 굳이 안 쓸 이유가 없지.’

이상흠으로부터 60억의 예산을 따낸 나는, 빠듯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짜뒀던 팀의 계획을 모두 바꿔버렸는데, 그 시작점이 이 훈련장이다.

이곳은 처음 면접을 봤던 일반적인 헌터용 훈련장과 크기부터가 달랐다.

최상급 방탄유리로 지어진 훈련용 부스는 팀 전체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은 크기를 자랑했고, 사용할 수 있는 훈련용 로봇도 실제 괴수와 매우 흡사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더불어, 훈련 부스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를 데이터로 기록할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자체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말 그대로 ‘훈련도 장비빨’이라는 말을 형상화한 훈련장이었다.

“시설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가 하는 게 달라지는 건 아니야. 다들 남은 할당량 채우고, 마력석에 마력 넣는 거 잊지 말고. 알았지?”

“““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후 훈련.

아직 훈련 초기라 각자에게 할당된 개인 훈련으로 시작됐고, 나는 부스를 돌아다니며 세 사람에게 피드백을 해주었다.

“수인아. 검 끝이 흔들리잖아. 손에 힘을 너무 줬어.”

“앗, 다시 하겠습니다!”

레이피어를 다루는 정수인은 검을 섬세하게 다루는 부분에서 꽤 애를 먹는 듯했는데,

원래 덩치가 남들보다 커서 그런지, 외려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손가락에 힘 조금 빼고, 허리에 힘을 더 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수인의 부스를 지나쳐, 다음으로 도착한 김나래의 훈련용 부스.

“가랏…!”

김나래의 지시를 받은 하급 불꽃 정령이 조그만 불덩이를 만들어 더미에게 쏘아냈다.

후우우욱─! 파스스…

호기롭게 날아간 불꽃은 더미와 부딪치며 힘없이 흩어져 버렸고, 김나래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다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라앗…!”

후우우우욱─! 파스스…!

그녀는 이전에 해줬던 피드백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앞서 보였던 공격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알아서 잘하고 있네.’

그렇게 김나래의 훈련 부스를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방한나의 부스.

쿠우웅─! 쿠우우우웅──!

방패 전문가인 방한나는 무려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로봇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크읏…!”

그녀는 살짝 버거움을 느끼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내 기준으로는 아직 여유로운 수준으로 보였다.

‘자세가 어정쩡하긴 한데…, 힘 분배를 잘해서 그런가? 나름 안정적이네.’

방한나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이해하는 천재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하나를 알려주면 그 하나를 반드시 이행하는 스타일이라, 마치 ‘탱커’라는 역할을 인물로 그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나야! 자세를 조금만 더 낮추자!”

“넵…!”

그렇게 세 사람의 훈련을 봐주던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첫 게이트 토벌에 도전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죄송합니다.”

얼마 후, 정수인이 팀을 탈퇴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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