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7화 (7/165)

“보자….”

방한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술을 깨기 위해 어질러놓은 집안을 치우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사실 단순히 할 수 있는 걸 따진다면, 할 수 없는 쪽을 세는 편이 훨씬 빠르다.

나는 지금껏 퀸즈의 총괄 프로듀서로 일해오며 꽤 많은 돈을 벌어왔다.

일없는 백수라 시간도 넘치며, 앞으로의 미래도 줄줄이 꿰고 있는데, 내가 뭘 못하겠는가?

마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생각해보면, 나는 꽤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타인의 능력을 읽고, 내 능력인 것처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능력의 이해도가 높아지며, 한번 이해한 능력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완벽하게 복제하긴 힘들다는 단점이 있는데….

나는 그 단점을 노력으로 커버했다.

예를 들어, 설주희의 능력인 ‘빙백신공’은 내가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마력을 다루는 내가, 설주희처럼 내공을 다루는 건 불가능하기에.

하지만 그 하위분류에 속하는 특유의 무술이나 기공의 운용 방법은 연습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고, 실제로 이 방법을 통해 역대급 유망주 소리까지 들기도 했다.

물론 부상 이후엔 큰 의미가 없게 됐지만….

어쨌든 나는 이 능력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대신, 퀸즈의 세 사람을 성장시켰다.

설주희의 무공.

홍유라의 검술.

그리고 임아린의 마법까지.

덕분에 세 사람은 원작 소설에 등장하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고, 나는 결말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과 잠재된 힘에 맞춰 적절한 피드백과 성장을 보조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전부냐?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아카데미 2학년 무렵에 퀸즈를 설립하여 3학년에 천화 길드와 계약을 맺었다.

10년 가까이 팀 관리를 도맡아왔고, 쟁쟁한 경쟁자들을 꺾고 당당하게 팀 랭킹 1위도 찍어보았다.

물론 규격 외에 속하는 세 사람 덕분이 컸으나, 내 공이 없었다곤 할 수 없겠지.

‘생각보다 열심히 살아왔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며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벌떡─

번뜩이는 생각에 몸을 일으킨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을 들어 오랜만에 메신저 앱을 켜보았다.

[ 읽지 않은 메시지 300개 ]

‘많이도 왔네.’

나는 수많은 지인으로부터 날아온 메시지들을 모두 뒤로한 채, 김준형의 연락처를 찾아 새로운 메시지를 보냈다.

[ 너네 프로듀서 안 필요하냐? ]

*

다음 날.

“너, 진짜로 하게?”

“공무원이 아니라서 안 되나?”

나는 김준형과 만나, 다시 한번 서울시청을 찾았다.

팀 서울시청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서.

“아니, 네가 해준다면 우리야 땡큐인데….”

“그럼 문제없네.”

김준형은 사무실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우뚝 멈춰 서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지혁아. 솔직히 이번 일 , 별로야. 너도 알잖아, 여기 내부 완전 개판인 거. 아무리 잠깐 맡는 거라고 해도, 네 커리어에 도움 하나도 안 돼.”

그는 진심으로 내가 커리어를 망칠까 걱정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솔직히 말해, 서울시청의 팀을 맡는 건 나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 맞다.

애초부터 버릴 걸 계산하고 계획된 팀이다.

가장 중요한 팀원은 아카데미 동아리 수준도 안 되는 D랭크로 이뤄져 있으며,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예산을 얼마나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런 팀에서 시간과 커리어를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오히려 좋아.’

지금 나에겐 서울시청보다 더 알맞은 팀은 없다.

내 가장 큰 목표는, 이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의 미래를 바꾸는 것.

이미 설주희를 비롯한 두 사람을 성장시켜놔서 한시름 덜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을 순 없다.

그래서 나는 기억 속 원작 소설의 정보를 이용하여,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놓을 예정이다.

그런데 만약 제대로 된 팀에 들어간다면, 인수인계다 뭐다 하여 매우 바쁠 가능성이 높고, 계획에 차질이 생길 확률이 높다.

하지만.

서울시청이 제작하는 팀은 어떠한가.

김준형이 말하길, 팀원과 담당자만 뽑아놓았을 뿐,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내가 뭘 어떻게 하건 그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다는 말이다.

‘감히 누가 나에게 태클을 걸겠어?’

아카데미 동아리에 불과했던 퀸즈로 헌터 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 바로 나다.

“준형아. 걱정해 주는 건 정말 고마운데, 나도 다 생각해보고 하겠다 한 거야. 내가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하겠다 했겠어?”

“…….”

김준형은 내 호언장담에도 곧장 표정을 풀지 않았고,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난 모른다.”

알아서 하라는 말과 함께 문고리를 돌려버렸다.

*

같은 시각.

퀸즈의 사무실.

“…….”

정기 회의에 참가한 설주희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회의 시간이 벌써 40분이나 지났는데,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못 하고 있었기에.

“윤석아! 아직 못 찾았어!?”

“어, 찾고는 있는데…. 프로듀서님 서고에 자료가 너무 많아서….”

“아니, 미리미리 안 찾아두고 뭐 했어! 그리고, 누가 프로듀서님이야? 말 똑바로 해!”

“죄송합니다!”

그동안 도지혁이 쌓아온 산더미 같은 분석 자료를 뒤지던 직원은, 냅다 윽박지르는 구석일에게 사과를 건네며 잽싸게 자료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으휴….”

홍유라와 임아린도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지금까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회의가 지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자료가 준비가 안 되어 회의를 못하는 건 정말 상상조차 못하던 일이었다.

“하여튼…. 쯧.”

괜히 분석팀 직원들을 닦달하던 구석일은, 테이블에 슬쩍 자리를 잡으며 퀸즈의 세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아마 금방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도지혁 걔는 왜 평소에 인수인계도 안 해놔서….”

구석일은 회의가 지연된 걸 자연스레 도지혁의 탓으로 돌렸는데….

사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게, 지금까지 퀸즈의 모든 전략과 자료는 도지혁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팀원들의 특성과 성향, 그리고 토벌 예정인 게이트나 친선전 상대의 정보를 조합하여 알맞은 전략을 구상했고, 직접 하는 게 편하다는 이유로 꽤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직원들도 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 도지혁이 분석하고 정리하는 걸 보조한 수준에 그쳐서, 곧바로 도지혁을 대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

벌써부터 도지혁의 부재가 드러나는 상황에 불편한 분위기가 스멀스멀 몰려오던 그때.

“됐어요. 그냥 회의는 없던 걸로 해요.”

설주희가 선뜻 입을 열었다.

“어?”

“어차피 다 들어가 봤던 게이트잖아요. 전략 같은 건 없어도 충분해요.”

“어어….”

구석일이 그녀의 발언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임아린과 홍유라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리 경험이 있는 게이트긴 해도, 그냥 들어가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곳도 아니고, 계속 환경이 바뀌는 곳이잖아.”

이번에 퀸즈가 토벌할 게이트는 무려 S랭크 게이트.

하위 랭크의 게이트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변수를 일으키는 게이트로,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많은 곳이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전략을 세워왔….”

홍유라가 한마디를 덧붙이며 설주희를 설득하려는 순간.

“아니.”

설주희가 그녀의 말을 툭─ 잘라버렸다.

“우리한테 전략은 필요 없어. 솔직히…, 지금까지 전략이 먹혀든 건, 그냥 우리가 강해서였잖아.”

홍유라와 임아린은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도지혁의 전략이 큰 효과를 보이긴 했으나, 결국 그 전략도 모두 자신들의 실력을 기반으로 짜인 전략이었기에.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설주희는 홍유라와 임아린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구석일을 흘끔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단장님. 제가 생각해봤는데, 새로운 프로듀서도 안 뽑아도 될 것 같네요.”

그러자 구석일이 진땀을 흘리며 재빨리 장단을 맞추었다.

“으흠…. 생각해보니까 그게 맞는 거 같기도 하네. 사실상 너희가 전략 그 자체인데, 굳이 새로운 총괄 프로듀서를 뽑을 필요는 없지. 두 사람은 어때?”

자연스레 홍유라와 임아린에게 쏠리는 시선들.

사무실 내부에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설주희의 의견에 수긍한다면 별문제가 없지만….

만약 여기서 반대 의견을 낸다면, 처음으로 퀸즈 내부에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난 네 의견에 따를게.”

홍유라는 팀의 분열을 막기 위해 설주희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임아린에게로 모여들었고,

“나, 나는….”

살짝 움츠러든 임아린은 조심스레 눈을 굴려 홍유라와 설주희를 번갈아 보았다.

임아린은 사실 총괄 프로듀서가 있는 편이 훨씬 좋았다.

도지혁이 퀸즈에 관한 모든 걸 결정했을 땐 단 한번도 세 사람의 의견이 갈린 적이 없었기에.

애초에 의견이 틀어질 일이 없던 쪽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지혁이 팀을 나간 지금, 실질적인 전권은 설주희에게 있다.

공식적인 리더는 홍유라이지만, 그 홍유라조차 설주희에게 힘을 실어준 상황이다.

“…나, 나도 그렇게 할게….”

결국, 임아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반대 의견을 낸다면, 반드시 팀이 무너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좋아.”

극적으로 의견 통합을 이뤄낸 설주희는, 구석일을 바라보며 새로운 체제의 시작을 알렸다.

“그렇게 결정됐으니, 적당히 상황에 맞춰서 준비해 주세요.”

“…그러지.”

구석일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설주희의 말과 함께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새로운 퀸즈의 시작이었다.

*

서울 시청사에 위치한 작은 회의실.

회의실 한쪽 벽면엔 [ 팀 서울시청 ]이라고 적힌 작은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그 아래 전자식 칠판엔 급하게 만든 듯한 PPT가 띄워져 있었다.

“그럼 간단하게 서로 통성명부터 하고 시작합시다.”

김준형의 말과 함께 시작된 오리엔테이션.

“저는 팀 서울시청의 총 관리를 맡게 된 김준형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짝짝짝짝─

짬 처리라는 이유로 총 관리를 맡게 된 김준형에 이어, 그와 마찬가지로 내몰린 젊은 여성이 자신을 소개했다.

“행정 담당 한규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턱까지 오는 갈색 단발의 그녀는 어딘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을 품고 있었는데, 이 자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내 차례가 돌아왔다.

“전에 면접에서 뵀었죠? 총괄 프로듀서를 맡게 된 도지혁입니다.”

나는 앞에 앉아있는 세 명의 팀원들과 눈을 마주쳐보았다.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의욕이 가득해 보였다.

“궁금해하실진 모르겠지만, 제 이력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저는 얼마 전까지 퀸즈의 총괄 프로듀서로 있었습니다. 퀸즈 아시죠? 헌터 팀 랭킹 열어보면 가장 맨 위에 있는 팀.”

“…!”

내 경력을 알아본 팀원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나는 성공적으로 그녀들의 관심을 이끌어냈음을 확신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사정이 생겨서 그만두긴 했는데, 어쨌든 이렇게 여러분의 매니지를 맡게 됐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세진 길드도 차고 온 거니까, 다들 열심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진 길드를 차고 왔다는 이야기에 큰 흥미를 느낀 듯 눈을 반짝거리는 팀원들.

나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간단히 소개를 마친 뒤, 팀원들에게 차례를 넘겼다.

“안녕하십니까! 정 수 인 입니다!”

첫 번째로 소개한 팀원은 커다란 키와 튼실한 덩치가 인상적인 정수인.

“나이는 스물셋이고, D랭크입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팀원 중에 최연장자인 그녀는 외모로만 봐선 탱커를 할 거 같은 느낌이었지만, 의외로 얇은 검을 다루는 딜러 포지션을 맡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나래라고 합니다!”

두 번째 팀원은 꾸미지 않은 수수한 외모가 인상적인 김나래.

“나이는 스물둘이고, D랭크 정령술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성실하고 야무진 이미지를 가진 그녀는 B랭크의 잠재력을 가진 서포터. 앞으로 팀의 윤활유 역할을 맡게 될 예정이다.

짝짝짝짝짝─

그렇게 두 번째 팀원 소개까지 마치고.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돌아왔다.

“…아, 안녕하십니깟…!”

살짝 긴장한듯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슴에 슬쩍 손을 얹으며  애써 당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해왔다.

“나, 나이는 스물한 살이고! 방패를 다루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사람이자, 서울시청을 고르게 된 가장 큰 이유.

“한나 씨. 이름이요! 이름!”

“아…. 이름은 방한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닷…!”

방한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