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6화 (6/165)

집에 도착한 뒤.

“……후우…….”

휴대폰을 앞에 내려놓은 나는,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조심스레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 계약 관련해서 서류 보내놨다. 내일까지 작성해놔. ]

[ 지금까지 지내온 정을 생각해서 이렇게 넘어가겠지만…. 괜한 짓은 말았으면 좋겠군. ]

계약 해지를 마주하고 말았다.

“…하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밤낮 할 거 없이 모든 시간을 부어가며 헌신해온 대가가 겨우 계약 해지라니.

반대로, 지금껏 그렇게 해왔기에 겨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차라리 내가 정말로 잘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풀썩─

침대에 몸을 눕힌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답답한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마음 같아선 당장 날 음해한 범인을 잡아 오해를 풀고 싶으나, 범인을 잡을 방법이 없다.

동영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제작자를 잡는다는 말인가?

괜한 루머가 퍼질까, 지인들에게 자문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결국, 개인적으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후우….”

무거운 한숨과 슬쩍 눈을 감은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차갑게 식혀둔 맥주 한 캔을 꺼내어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안주는 천화 길드와의 계약 해지 동의서.

스으윽─ 스으윽─

내용을 쭉 훑어보고 시원스레 사인을 남긴 나는, 맥주를 쭉 들이켜며 천화 길드로부터 받게 될 위약금을 바라보았다.

‘65억이라….’

현실에서 그렇듯, 이 세계에서도 65억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아니, 퀸즈의 위상에 비하면 적은 액수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지금까지 모아온 돈을 합치면,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놀고먹어도 남겠지.

원작의 엔딩처럼, 세계가 폭삭 멸망해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차피 해피 엔딩은 약속된 거나 다름없어.’

현재 설주희의 랭크는 Ex급.

원작 ‘최강고수’에 등장하는 최종 보스, 이세계 마왕보다 조금 더 강한 상태다.

거기에 성장을 마친 홍유라와 임아린까지 있으니, 엄청난 변수가 없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터.

앞으로 세 사람은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없어도.

잘.

“…….”

술을 마셔서 그런가?

괜히 기분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다.

사인을 마치고 서류를 적당히 갈무리한 나는, 맥주 한 캔을 더 꺼내어 거실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푸하아….”

설주희가 들고 온 동영상 속의 나는, 세 사람을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정말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과거의 나는, 설주희와 함께 이 세계를 지키고자 했다.

지금처럼 한 발자국 물러서 있는 게 아니라, 한 명의 어엿한 동료로서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거침없이 내 능력을 이용하여 성장해나갔고, 역대급 유망주 소리까지 들어가며 큰 기대를 받았었다.

그 당시의 나는 정말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알았다.

단순한 검술로 표시되는 내 비밀스러운 능력과 주변으로부터의 기대감, 운명이다 싶을 정도로 주인공인 설주희와 엮이는 것까지,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보는 듯했기에.

아마 그때 다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나도 어느 남성 헌터 팀의 일원으로서 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임아린과의 훈련에서 큰 부상을 입은 나는 영구 전투 불가 판정을 받았고, 끝내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임아린이 원망스럽진 않다.

그녀가 고의로 저지른 짓이 아니었고, 그 이후로 항상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 챙겨주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이젠 그마저도 점점 무뎌지고 있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나는 설주희를 더더욱 완벽한 주인공으로 만들고자 했고, 세 사람을 설득해 팀을 만들었으며, 매일같이 고된 훈련으로 성장을 이어나갔다.

그녀들은 내가 단순히 뜨거운 열정을 지녀서 자신들을 성장시켰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저, 그녀들에게 내 꿈을 강요한 것뿐이었다.

나  대신 보다 더 완벽한 주인공이 되어, 꿈도 희망도 없는 이 세계를 평화로 이끌기를.

“…….”

동영상 속 나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 사람을 이용했다.

그리고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세 사람을 이용했다.

이래선….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지 않은가.

*

다음 날 오후.

공식적으로 천화 길드와의 계약이 해지 된 이후.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휴대폰에 끝없이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퀸즈에서 나왔다는 소식이 퍼진 것이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 중엔 지인들도 여럿 있었으며….

……

[ 백일 길드 단장 강무진 ]

[ 세진 길드 단장 이혜리 ]

……

퀸즈와 경쟁하고 있는 팀도 몇몇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현 랭킹 2위를 달리고 있는 ‘블랙 로즈’의 세진 길드에선, 무려 단장께서 개인적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 오랜만에 연락 드리네요. 이렇게 연락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천화 길드에서 나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 ]

결론은 나를 스카우트하고 싶으니, 오랜만에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해보자는 내용이었다.

“세진 길드….”

사실 세진 길드와는 인연이 좀 있다.

정확히는 현 단장인 이혜리와의 인연이.

아카데미에 다닐 당시, 퀸즈를 결성하여 각종 기록을 갱신하고 다니던 우리는, 세진 길드와 천화 길드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았었다.

그때 세진 길드의 부단장이었던 이혜리가 나에게 어마어마한 푸쉬를 약속하며 꽤 큰 계약을 들이밀어 왔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퀸즈의 세 사람이 세진 길드와는 절대 계약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천화 길드와 계약을 맺었다.

‘이혜리가 그렇게 싫었나?’

“…….”

문득 오래된 추억을 회상하던 나는, 쉼 없이 떨어대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천화 길드가 아니라, 세진 길드와 계약을 했었더라면….

“으휴….”

생각이 길어진 나는 쓸데없는 고민을 접고, 슬쩍 손을 뻗어 휴대폰을 아예 꺼버렸다.

어차피 당장 급하게 새로운 팀을 구해서 일할 생각은 없다.

퀸즈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쉴 시간이 필요했다.

세계의 평화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 걸 모두 떠나.

그저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싶었다.

*

그날 밤.

“푸하….”

어제에 이어 깊은 술독에 빠져버린 나는, 그동안 미뤄뒀던 영화와 소설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비록 취할 대로 취한 탓에 내용들이 머리에 들어오진 않았으나, 마치 뭐라도 하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없이 술을 쏟아붓길 얼마나 지났을까….

“아.”

결국, 술이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더 사올까….’

편의점까지 약 3분.

귀찮긴 하지만, 못 갈만한 거리는 아니다.

“…읏차차….”

괜히 곡소리를 내며 둔한 몸을 일으킨 나는, 적당히 모자를 뒤집어쓰곤 곧장 집을 나섰다.

[ 오전 1 : 15 ]

어느덧 시간은 벌써 새벽 1시.

시간 감각조차 취해버린 건지, 이렇게 늦은 밤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뭔가 어둡다 싶더라니….’

나는 흔들리는 몸을 이끌고 아파트 현관을 지나, 바로 앞에 있는 24시 편의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물건을 정리 중인 듯, 안쪽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점원의 목소리를 뒤로한 나는, 습관적으로 물건들을 훑어보며 안쪽의 주류 코너로 향했다.

‘조금만 마셔야지.’

그리고는 와인 한 병과 소주 한 병, 거기에 맥주 두 캔까지 골라, 빈 매대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아, 잠시만요!”

그러자 안쪽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점원이 계산을 위해 다급히 매대로 돌아왔는데….

“어!”

갑자기 점원이 우뚝 멈춰 서며 이상한 반응을 보여왔다.

‘…?’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점원을 흘끔 쳐다보았고,

“…어?”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밝은 금색 생머리와 가녀린 외모가 인상적인 그녀.

방한나였다.

“안녕하세요! 그때, 면접에서 뵀었죠!”

나는 새벽임에도 당찬 텐션을 유지하는 방한나의 모습에 내심 감탄하며 슬쩍 말을 걸었다.

“여기서 일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아르바이트?”

“네! 저번 주부터 시작했어요!”

“그렇구나….”

무심히 그녀의 대답을 흘려 들으며, 다시 카드를 꺼내던 그때.

‘…응?’

문득 작은 의문이 하나 들었다.

‘오늘…. 평일 아닌가?’

내 기억에 따르면, 분명 방한나는 한창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직 방학할 시기도 아니고, 휴학했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어떻게 일하고 있는 거지?

삑─ 삑─

우두커니 서서 바코드 찍히는 소리를 듣던 나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실례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어떤 건데요?”

정말로 뭐든 괜찮다는 듯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오는 방한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 나는, 아르바이트를 무슨 요일에 하느냐 물어보았고,

방한나는 아무렇지 않게 충격적인 대답을 꺼내왔다.

“주 5일, 평일마다 하고 있어요!”

“…네? 아니, 그럼 수업은요?”

“아, 수업도 듣고 있어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았던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럼 야간 아르바이트하고 나서, 수업도 듣는 거예요?”

“네! 조금 피곤하긴 한데, 생각보다 할 만해요!”

“잠은…, 잠은 안 자요?”

“이래 봬도, 4시간이나 자는 걸요!”

‘세상에.’

자신이 나폴레옹이라도 된 것처럼 4시간이나 잔다고 이야기하는 방한나의 모습에 깜짝 놀란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밝은 미소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돈이 많이 궁한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간 알바에 수업까지 듣는 건 좀 무리 아닌가?’

물론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고 하지만, 엄연한 또 하나의 현실.

방한나에게는 방한나의 사정이 있을 테고, 그녀가 몸소 주경야독을 행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굳이 캐물을 이유는 없겠지.

“…….”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술기운 탓인지, 왠지 모르게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저…. 제가 이런 말 할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생활비가 많이 필요해요?”

방한나는 장차 A랭크가 될 몸이다.

앞으로 돈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벌 수 있는데, 당장 눈앞의 푼돈을 위해서 건강을 버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해였다.

“어…. 돈이 부족한 건 아닌데….”

방한나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부모님께 손 벌리기가 싫어서요….”

“…네?”

“사실, 제가 지방에서 혼자 올라왔거든요. 그래서 항상 부모님이 생활비를 보내 주시는데…. 좀 미안해서….”

방한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올바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부모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서 밤새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이렇게 기특한 아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대단하네요. 정말 멋있어요.”

방한나는 내 칭찬에 더더욱 부끄러워진 듯 손사래를 치더니,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왔다.

“머, 멋있긴요.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

“…!”

그녀의 한마디가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뭔가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정말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봉투에 넣어 드릴까요?”

“아.”

어느새 바코드를 모두 찍은 방한나의 물음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테이블에 놓인 술들을 슬쩍 내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멋있는 말이네요.”

“네?”

“죄송한데, 이거 다시 가져다 놓을게요.”

나는 매대에 올려놓은 술들을 집어 들며 계산을 취소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어어…. 제가 할게요!”

그러자 방한나가 자신이 하겠다며 술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나는 가슴속 깊이 스며든 그녀의 한 마디를 떠올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

정작 그녀는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일하시는데 자꾸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냥 술 취한 진상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렇게 다시 술들을 예쁘게 되돌려놓은 나는, 심심한 사과를 남기며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아니에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방한나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내 사과를 받아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남기며 편의점을 나섰다.

“그럼, 또 봅시다.”

“네! 안녕히 가세요!”

술에 취한 탓일까?

왠지 방한나와의 만남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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