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진짜 나 한 번만 좀 살려줘라! ]
스피커에 쩌렁쩌렁 울리는 김준형의 목소리에 살짝 인상을 쓰며 휴대폰을 떼어낸 나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 슬쩍 얹으며 말했다.
“준형아. 내가 진짜 도와주고 싶은데, 오늘은 컨디션이 영별로다. 나중에 도와줄게.”
그러자 스피커 너머의 김준형이 잠깐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 너…, 진짜 무슨 일 있냐? ]
있다.
10년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친구들에게 버려졌다는 아주 큰 일이.
“어.”
[ 으으음…. ]
김준형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낮게 신음하더니, 마침내 내 사정을 이해한 듯 차분하게 말을 건네왔다.
[ …그래. 내가 무슨 일인지는 물어보진 않을게. 근데…. 나도 진짜 엄청 급한 일이거든. 너 아니면 부탁할 사람이 없다. ]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지?’
김준형은 조금 가벼운 구석이 있는 사내였지만, 남의 사정을 무시하고 제 부탁을 우선시할 정도로 의리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부탁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
비록 소설 속에 등장하지도 않는 가상의 인물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내 오래된 친구였다.
“뭔데 그래?”
결국, 의리를 저버리지 못한 나는 김준형의 사정을 물어보았고,
[ 그게…. 우리 시청에서 갑자기 헌터 팀을 만든다고 난리를 피워서…. ]
“팀?”
뜻밖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다음 날.
착잡한 마음을 일로 달래고자 이틀 만에 집을 나선 나는, 서울 중심에 위치한 시청으로 향했다.
“지혁아! 여기!”
시청에서 만난 김준형은 정말로 기쁜 듯 양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는데, 그런 그의 행동이 살짝 부끄러웠던 나는, 최대한 아는 체를 하지 않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진짜 와줘서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어…! 내가, 일 끝나고 소고기 사줄게. 한우로!”
“어차피 지 돈도 아니면서….”
“내가 낸 세금인데, 내 돈이지! 들어가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김준형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를 따라 시청 건물로 들어서며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래서, 뜬금없이 팀은 왜 만든대?”
“몰라. 나도 갑자기 날벼락 맞았다니까….”
사정은 이랬다.
선거를 앞두고 내세울 만한 업적이 필요했던 시장께서 헌터 팀 사업을 추진했는데, 위에서 김준형에게 일을 떠안겼다는 이야기였다.
“위에선 어떻게든 하라고 하고, 또 눈치는 겁나 주고…. 진짜 못살겠다.”
“고생하네.”
나는 김준형을 적당히 다독여주며, 시장이 뜬금없이 헌터 팀 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원작의 작가가 아이돌을 좋아했는지, ‘최강고수’ 속 세계의 헌터 팀 사업은 현대의 아이돌 사업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길드에서 관리하는 헌터 유닛.
연예기획사와 아이돌의 느낌이다.
현대의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헌터 팀은 돈을 몰고 다니는데, 성공 시 수입에 천장이 없고, 흔히 톱10이라 불리는 랭킹까지 진입한다면 부가 가치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어난다.
작년에 퀸즈가 새로이 랭킹 1위를 달성하며 재계약 수수료로만 11자리 가까이 받았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리라.
물론 시장이 큰 만큼, 정상적으로 팀을 운영하려면 돈이 매우 많이 든다.
보통 팀원을 3인에서 5인, 많으면 9명까지 꾸리기도 하는데, 팀원들마다 각각 관리비가 어마어마하게 지출되고, 보조하는 스탭들도 많이 필요하며, 당연히 엄청난 유지비가 따라온다.
이 정보화 시대에, 이런 뒷사정을 시장께서 모를 리가 없을 테니….
‘한몫 단단히 당겨보겠다는 소리군.’
굳이 세금을 들여 불확실한 헌터 팀 사업에 뛰어들었겠다는 말은, 사업 비용을 핑계로 돈을 좀 당겨보겠다는 뜻이었다.
“진짜 어중이떠중이들 다 달려드네.”
“내가 어중이떠중이 안 되려고 널 데려온 거잖아. 퀸즈 총괄 프로듀서, 도지혁…!”
김준형의 입바른 소리 소리에 적당히 손을 휘젓던 나는,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래서, 팀원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헌터 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팀원이다.
연예계로 치면 연예인.
축구로 치면 축구선수다.
아무리 모기업이 돈이 많고, 사이즈가 큰 대형 길드라고 해도, 필드에서 뛰는 팀원들 수준이 형편없으면 모두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도 나라에서 하는 사업인데…. 최소 B급 이상은 되겠지?”
“보고 놀라지나 마라. 진짜 역대급이니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이 호언장담하는 김준형.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지?’
나는 혹시 모른다는 기대심을 품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시청에 도착한 도지혁이 김준형의 상사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있을 즈음.
같은 시각.
퀸즈의 사무실.
멋진 전망과 활기찬 인테리어로 꾸며진 사무실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어두침침한 공기가 사무실에 깔려 있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천화 길드의 단장, 구석일은 묘한 표정으로 퀸즈의 세 사람을 훑어보며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지혁이 일은 최대한 조용히 덮기로 했어. 뭐, 들쑤신다고 좋은 일도 아니고….”
도지혁의 이름이 나온 순간 한층 더 무거워지는 단장실의 분위기.
홍유라와 설주희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진 순간.
임아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지혁이는…?”
그러자 구석일이 임아린의 물음에 단호히 대답했다.
“아마 다른 팀을 찾겠지.”
“!”
새로운 팀.
즉, 도지혁이 퀸즈를 나가게 됐다는 말이다.
“…….”
올 것이 왔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는 홍유라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는 임아린.
퀸즈가 결성된 이후, 처음 생긴 이탈이었다.
사실 애초에 세 사람이 모인 것도, 이른 나이에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정상 반열에 들 수 있던 것도, 성향이 다른 세 사람이 잘 융화될 수 있던 것도 모두 도지혁의 공이다.
따지고 보면, 도지혁이 퀸즈를 만든 덕분에 세 사람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게 도지혁이 음험한 마음을 품고 벌인 계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그 누구도 도지혁을 두둔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애써 눈물을 참던 임아린이 결국, 슬픔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숨기며 안타까워하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설주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그게 끝인가요?”
“!”
날 선 발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홍유라와 임아린.
“고소를 한다거나, 뭐 그런 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주, 주희야….”
“설주희. 너….”
두 사람은 그녀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오히려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너희 정신 차려. 그 새낀 10년이나 우릴 기만한 걸로 모자라서, 우리 정보까지 팔아먹었다고!”
“주희야. 아무리 그래도….”
“홍유라. 너,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지?”
“그건….”
홍유라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자신을 비하하고 모욕하던 도지혁의 목소리가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기에.
설주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홍유라를 흘겨보고는, 빠드득 이를 갈며 엄포를 늘어놓았다.
“내가 그딴 쓰레기 새끼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거 자체가, 소름 끼칠 정도로 역겨워. 절대…, 절대 그냥 못 넘어가.”
홍유라와 임아린은 복수심을 불태우는 설주희의 모습에 살짝 걱정스러워졌다.
분노에 눈이 돌아버린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기에.
그러나….
두 사람은 설주희를 말릴 수가 없다.
두 사람도 같은 피해자였으니까.
*
뭇 헌터물들이 그렇듯, ‘최강고수’도 평이한 랭크 설정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높은 등급인 S급부터 가장 낮은 등급인 F급까지.
아이템이나 괴수, 능력자들에게도 같은 랭크를 부여하고 있으며, 원작 주인공인 설주희의 경우 측정 불가급인 Ex 랭크의 설정을 가지고 있다.
전무후무한 Ex급 1명과 역대급 S급 2명으로 이루어진 퀸즈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헌터 팀들은 대부분 B급부터 S급까지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게 진짜 장난하나?’
김준형으로부터 후보 목록을 건네받은 나는, 상식과 멀리 떨어져 있는 팀원 후보 목록에 어처구니를 잃고 말았다.
“이거 맞아?”
“역대급이지?”
김준형의 말대로, 서울시청에서 모집한 팀원 후보는 역대급이었다.
그들의 평균 랭크는 D.
심지어 가장 낮은 후보의 랭크는 F다.
‘어이가 없네.’
E급과 F급은 사실상 일반인 수준.
이딴 후보들로 팀을 꾸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서류철을 탁상에 내던져버렸다.
“장난하냐? 이딴 애들을 팀으로 만들겠다고 세금을 부어? 내 세금 토해내 이 새끼야!”
“아니, 좀 들어봐…! 내가 좋다고 이런 애들을 후보에 넣었겠냐고!”
“뭐?”
알고 보니, 사실 김준형도 처음엔 최소 B랭크 이상의 후보들로 모집하려고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일을 떠맡았으니, 중간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위에서 자꾸 몸값 싼 애들로만 꾸리라고 하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 까라면 까야지.”
상부에서 낮은 랭크의 헌터들로 팀을 꾸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진짜 어지간히 해 처먹으려고 하네.’
굳이 이렇게 랭크가 낮은 후보들로 모집했다는 건, 애초부터 팀에 돈을 거의 들일 생각이 없다는 말과 같다.
“내가 이딴 팀을 위해 일할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예상보다 처참한 수준에 김이 새버린 나는,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며 김준형을 노려보았다.
“지혁아.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나 이러다 진짜 지방 내려가…!”
김준형의 어깨너머로, 회의실 밖에 앉아있는 공무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망할 게 뻔한 사업을 맡고 책임을 지기 싫어서 김준형에게 떠넘겼을 테지.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덩치가 큰 사업을 김준형 같은 말단 공무원에게 맡겼을 이유가 없다.
“지혁아, 제발 도와줘라…!”
좌천될 위기에 처했다며 간곡히 빌어오는 김준형의 모습에 살짝 마음이 약해진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내던진 이력서를 슬쩍 끌어당겼다.
‘D급, 랜서. E급, 파이터….’
그리고 다시 이력서를 쭉 훑어보던 도중….
“…?”
보기 드문 스타일의 후보에 문득 눈길이 끌렸다.
[ 이름 : 방한나 랭크 : D 특기 : 방패 ]
‘방패랑 검도 아니고, 방패?’
보통 특기를 적을 땐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나 능력을 작성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로지 방패만 사용하는 스타일은 처음이었다.
‘잘못 적었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녀의 이력서를 뒤로 넘겨버렸고, 나머지 이력서들을 확인하며 면접을 준비했다.
그리고.
“방한나입니다. 특기는 방패술입니다!”
‘아니, 이게 왜 진짜야?’
나는 정말로 작은 방패 하나만 들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