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굴 속여?’
뜬금없는 이야기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설주희의 손아귀를 간신히 뿌리치며 소리쳤다.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뭘 어쩌고 어째?”
어이가 없다.
내가 누굴 속이고 기만한단 말인가?
“설주희.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래, 지혁이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홍유라와 임아린도 설주희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믿지 않는 듯 내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
설주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내던졌던 가방으로 다가가더니, 웬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에 내팽개쳤다.
“…이걸 보고도 아니라 해보시지?”
‘저건 또 뭐야?’
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 봉투의 등장에 잠시 시선이 끌린 사이, 임아린이 잽싸게 튀어 나가 테이블에 놓인 봉투의 내용물을 늘어놓았다.
후두둑──
설주희가 내던진 서류 봉투에선 몇 장의 사진과 작은 USB 하나가 떨어졌는데….
“…어어…?”
떨어진 사진을 살펴보던 임아린이 갑자기 당황한듯한 기색을 보였고,
뒤따라 내용물을 확인하던 홍유라의 표정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뭐지?’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반응.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 나는, 다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가 그녀들이 보고 있던 사진들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
사진 속에 선명히 찍힌 한 사내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나였다.
“…이, 이건….”
사진 속 나는 반라의 여성과 함께 침대를 뒹굴고 있었는데,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매우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믿기 어려운 광경에 무심코 미간을 좁힌 나는, 조금 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다시 한번 경악하고 말았다.
사진 속 인물은 분명 나였다.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도, 어릴 적 다친 다리의 흉터까지 같을 순 없기에.
그러나 나는 이런 여성과 잠자리를 가진 기억이 없었다.
아니,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론 단 한 번도 여성과 잔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사진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대체 이건….’
머리가 새하얘지고, 심장이 불쾌하게 뛰어댄다.
사진 속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그때.
스윽─
홍유라가 테이블에 놓인 사진 한 장을 집더니, 슬쩍 의문을 제기했다.
“이거…. 합성 아니야?”
“아…!”
“!”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히 설주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
설주희가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테이블에 놓인 작은 USB를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도 처음엔 안 믿었어.”
단 한마디에 거실에 내려앉는 무거운 공기.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USB로 쏠렸다.
꿀꺽─
나는 조심스레 USB를 집어, 곧장 TV에 연결해보았다.
분명 설주희가 잘못 봤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하지만….
[ 설주희, 그 개 같은 년…. 걘 그냥 제 잘난 맛에 산다니까?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 ]
[ 진짜? 걔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
[ 그런 진상도 개 진상이 없다니까! 생긴 건 좀 반반해서 봐줬는데,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
[ 한번 먹고 버리지 그랬어? ]
[ 원래 그런 년 괜히 잘못 건드리면 좆되는 거야. 평생 거미줄이나 치고 살라고 해야지. ]
“…어?”
희망을 저버리듯, 동영상 속 나는 정체불명의 여성과 나체로 누워 팀원들에 대한 욕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 홍유라는? ]
[ 홍유라? 그 가슴 큰 년? 난 걔만 보면 진짜 구역질이 나더라. 적당히 커야지…. 돼지 같아. ]
[ 에이…. 남자들은 큰 게 좋지 않아? ]
[ 그건 그런데, 걔는 좀 선을 넘었어. 그리고 홍유라는 존나 꼰대잖아. 그런 년들이랑 잤다간 결혼해야 한다고 지랄할걸? ]
[ 푸훕…! ]
“너….”
“아니야!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 그럼…. 임아린은? 걔도 별로야? ]
[ 임아린은 좀 낫지. 근데 걔도 좀 그래. 맨날 한입만 먹어달라고, 얼마나… ]
“…지, 지혁아….”
“아, 아니야!!!!!!!!!”
참다못한 나는, 홧김에 리모컨을 TV에 던져버렸다.
콰직─!
액정에 금이 가며 새카맣게 변해버린 화면.
하지만 동영상은 멈추지 않았고, 끔찍한 대화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하여튼, 그 개 같은 년들이랑 짝짜꿍하는 것도 이제 질려서 못하겠어. 대충 털어야지. ]
[ 이제 뭐 먹고 살게? ]
[ 걔네 정보 좀 팔아서 두둑하게 챙겼거든. 해외에서 요양이나 할 거야. 하와이 같은 데. ]
[ 진짜? 오빠, 나도 데려가라! 응? ]
[ 하와이 가고 싶어? ]
[ 응! ]
[ 오늘 열심히 해주면 생각해볼게. ]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거실엔 추잡한 물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간드러진 여성의 신음을 끝으로 소리마저 끊겨버렸다.
“…….”
거실에 내려앉는 불쾌한 분위기.
“…도지혁….”
“…지혁아….”
나는 홍유라와 임아린의 부름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고,
잔뜩 일그러진 두 사람의 표정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얘, 얘들아…. 아니야…. 저건 내가 아니야….”
나는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나는 단 한 번도 너희를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큰 충격을 받은 듯,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 아니야…. 아니라고….”
다급히 사진들을 내팽개친 나는, 그녀들에게 매달리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린아! 이, 이건 내가 아니잖아! 자세히 봐봐…!”
“지, 지혁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모르는 임아린.
“유, 유라야! 내가 왜 저런 말을 했겠어! 나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
대답 대신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홍유라.
“…주, 주희야.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 못하는 성격인 거 알지? 내가 어떻게 억지로 너네랑 지냈겠어…! 저건 다 가짜야…!”
그리고 싸늘하게 바라보는 설주희까지.
“…얘, 얘들아….”
세 사람 중에, 내 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네…. 나를 그런 놈으로 생각하는 거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하다.
배신감, 허탈감, 실망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가슴속에 드리워졌고, 이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건 조작된 거야! 누가 나를 음해하는 거라고…!”
“도지혁.”
설주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다급히 설주희를 붙잡으며 물어보았다.
“주희야. 이거 누가 준 거야? 너, 단장 만난다고 했잖아. 단장이지? 맞지?”
하지만.
“…실망이다.”
설주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지독한 슬픔과 배신감. 그리고 싸늘한 분노로 푹 젖어있었고, 그녀의 눈동자엔 일말의 신뢰도 담겨있지 않았다.
“난…. 네가 그런 새끼인 줄도 모르고….”
“주, 주희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유, 유라야! 아린아!! 그런 거 아니야! 다 오해야!”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오해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차라리…. 차라리 우리한테 말하지 그랬어…. 차라리 그랬으면….”
“…주, 주희야….”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이럴까.
더 이상 변명을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벽에 대고 아무리 소리쳐봤자,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 뿐이기에.
“…….”
그동안 가슴 한구석에 고이 묻어두었던 외로움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고독함에 젖어버린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는 홍유라와 고개를 떨군 채 주먹을 떨어대는 설주희.
유일하게 임아린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무거운 입술을 조심스레 떼어보았다.
그러자.
스윽─
임아린이 한줄기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조용히 고개를 돌려버렸고,
이내 입을 다시 다물어버린 나는, 묵묵히 시선을 거둔 채 조용히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혹시 누군가 나를 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바람을 품으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겨봤지만….
“…….”
그 누구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
다음 날.
나는 천화 길드의 단장 구석일에게 전화를 걸어, 설주희와의 면담에 대해 물어보았다.
누가 그런 자료를 넘겼는지.
출처가 무엇인지.
하지만….
[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아주 실망이 커. ]
구석일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실망감을 드러내며 나를 비난했고, 은혜도 모르고 의리를 저버린 졸렬한 배신자로 취급할 뿐이었다.
[ 나한텐 온갖 폼을 다 잡아놓고…, 감히 우리 내부 정보를 팔아? 돈이 그렇게도 좋더냐? ]
나는 그 동영상이 조작된 것이라고, 절대 그런 적이 없다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 긴말 하지 않으마. 조용히 나가. 너 같은 놈과 일할 생각은 없어. ]
그는 아예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아….”
그렇게 구석일과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며칠이 지났을까.
내내 무기력하게 침대만 뒹굴던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억지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 동영상…. 그건 대체 뭐였을까….’
동영상 속 인물은 분명 나였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흉터나 생김새,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짓을 벌인 적이 없다.
매일같이 사무실에 틀어박혀 모니터만 바라보고, 팀을 관리하는 것도 충분히 바빠죽겠는데, 언제 그딴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조작된 게 분명한데….’
심증은 있지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능력을 사용한 건가?’
환상을 구현해내는 능력자가 존재하긴 하나, 그녀의 실력이 동영상을 통째로 구현해낼 정도로 뛰어나진 않다.
‘그 여자를 찾아본다면….’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씨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고, 그저 한없이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나도 모르겠다….”
결국, 문제 해결을 포기해버린 나는, 이불로 얼굴을 덮어버리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15년 전.
이 세상이 꿈도 희망도 없는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알아차린 이후.
나는 지금까지 오직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첫 목표대로 직접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원작의 주인공인 설주희를 끝까지 성장시켰고, 도중 사망이 확정된 홍유라와 임아린까지 완벽하게 성장시켜놓았다.
뜬금없이 파워 인플레 같은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마 어렵지 않게 이세계의 침공을 막아내고 평화로운 엔딩을 맞이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엔딩 이후엔?
그 이후엔 무엇을 하면 좋을까?
“…….”
생각해보면, 엔딩 이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최강고수’의 작가가 에필로그나 외전을 연재했다면 그대로 흘러가겠지만….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진 건 마지막 화가 올라온 직후.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고, 등장인물이 모두 죽어버려서 나올만한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끝이라….”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세 사람과 함께 합숙하며 훈련하던 시절, 잠들기 전에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지혁아. 넌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때 나는 임아린에게 하와이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어디선가, 하와이가 살기 좋다는 이야길 들었던 게 생각났기에.
한창 큰 부상을 입어 헌터 데뷔를 그만두고, 오직 세 사람의 성장밖에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하와이….’
우연의 일치일까.
하필 설주희가 가져온 동영상 속의 나도 하와이를 언급했었다.
“에휴…. 씨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나는, 몸을 옆으로 돌아누우며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얼마나 모았더라?’
그동안 퀸즈의 총괄 프로듀서로 일하며 적잖은 돈을 벌어왔다.
재산을 모으는데 큰 관심이 없어서 적당히 저축만 했으니, 평생 놀고먹을 만큼은 쌓여 있겠지.
아마 하와이에서 살아도 충분하리라.
‘진짜 해외나 나가볼까.’
사실 원작과는 달리 해피 엔딩이 확정된 상황이라서 크게 걱정할 것도 없다.
문제는 가족처럼 지내온 퀸즈의 세 사람에게 크나큰 오해를 샀다는 것뿐.
‘생각해보니까 괘씸하네…. 고작 그딴 가짜 동영상 하나에 10년 치 우정을 져버려?’
물론 나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로 교묘한 동영상이긴 했다.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만든 게 사실이고.
그렇기에 세 사람 탓만 할 순 없지만….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하아….”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던 그때.
우웅─ 우웅─
휴대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메시지가 왔다는 뜻이다.
‘혹시?’
오랜만에 도착한 연락에 희미한 기대감을 품은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 헌터고 36기 김준형 : ㅁㅎ? ]
[ 헌터고 36기 김준형 : 바쁨? ]
메시지를 보내온 상대는 다름 아닌 동창생 김준형.
예전에 같이 헌터 데뷔를 준비하다가, 공무원으로 취직한 친구였다.
“쯧….”
살짝 김이 새버린 나는, 집에서 쉬고 있다며 적당히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러자….
우웅─ 우웅─
곧장 김준형으로부터 답장이 돌아왔다.
[ 헌터고 36기 김준형 : 오늘 쉬나 보네 ]
[ 헌터고 36기 김준형 : 그럼 나 뭐 하나만 도와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