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랭킹 갱신까지 앞으로 1분!”
한 스탭의 목소리에 왁자지껄하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한쪽 벽면에 달린 모니터를 바라보았고….
[ Updating…… ]
갱신 작업을 이어가던 모니터 화면이 반전하며, 새로운 파워 랭킹 리스트를 발표했다.
[ 1st 설주희 ( 소속 : 퀸즈) - ]
[ 2nd 홍유라 ( 소속 : 퀸즈) - ]
[ 3rd 임아린 ( 소속 : 퀸즈) - ]
……
……
순위 변동 없음.
이번에도 어김없이 1등이었다.
“와아아!!!! 1등이야!”
“축하합니다!!!”
“축하드려요!”
마치 제 일인 것처럼 우레와 같이 박수를 치며 기쁘게 축하해주는 스탭들.
나는 조용히 의자를 돌려, 축하의 중심에 선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워 랭킹 3위를 차지한 임아린.
곱슬거리는 은색 장발에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밝은 얼굴로 주변에 감사의 인사를 돌리고 있었다.
“다들 수고 많았어요.”
그런 임아린의 옆에 앉은 파워 랭킹 2위의 홍유라.
곱게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칼에 폭발적인 몸매가 어우러진 성숙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우아한 미소를 띠며 주변 스탭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재미없네.”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 무심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녀.
영광스러운 파워 랭킹 1위의 주인공 설주희.
허리까지 내려오는 매끈한 흑색 장발과 사뭇 날카로운 외모를 지닌, 이 세계의 진짜 주인공이다.
‘이변은 없네.’
나는 안전하게 순위권을 차지한 세 사람의 모습에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 소설에 따르면, 지금 시점의 설주희는 평범한 F급 능력자여야 하고, 나중에 동료로 합류하게 되는 홍유라나 임아린도 훨씬 낮은 랭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세 사람은 이미 명실상부 세계 최강자들.
시작부터 원작과 완전히 다른 전개가 펼쳐진 것이다.
내가 지금껏 그녀들을 성장시키며 가장 걱정했던 건, 원작과 달라진 전개가 과연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가.
물론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파워 인플레가 발생하여 적들이 세지기라도 한다면….
‘그땐 진짜 끝장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관찰해본 결과, 적들은 소설 속 설정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최종 보스까지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겠지.
‘그래…. 그럼 된 거야.’
나는 이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이 평화로운 미래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건 오래전부터 포기했으니까.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15년을 살아왔다.
처음 이곳에 떨어져서, 소설 도입부까지 도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는 뜻이다.
한때는 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겨있길 잠시.
“지혁 씨.”
누군가 다가와,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도 1등이네요. 축하드려요.”
퀸즈의 스케줄 매니저, 김은영이었다.
그녀는 총괄 프로듀서인 나와 자주 시간을 보내는 편인데, 드물게 내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 중에 하나다.
“고마워요. 은영 씨도 고생하셨어요.”
김은영은 내 미소에 답하듯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왔다.
그리고는 사무실 중심의 세 사람을 흘끔 바라보더니, 은근슬쩍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은근히 말을 건네왔다.
“오늘은 회식하시나요?”
회식에 참가하느냐는 이야기였다.
“글쎄요….”
예전엔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모두 함께 회식을 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회식을 거의 하지 않고, 원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기쁨을 즐기는 추세로 바뀌었다.
“이번에도 안 하지 않을까 싶네요.”
“아….”
김은영은 세상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을 흘리더니, 내 의자에 슬쩍 손을 짚으며 말해왔다.
“오늘 엄청 기대했는데…. 너무 아쉽네요.”
보란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다.
‘귀엽네.’
2살 연상인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무심코 웃음을 흘린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슬쩍 떠보았다.
“회식하고 싶어요?”
“당연….”
그 순간.
“야. 도지혁!”
누군가의 부름에 대화가 끊겨버리고 말았다.
“…?”
순식간에 몰려드는 스탭들의 시선.
김은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흘끔 바라보더니, 묘하게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쩍 거리를 벌렸고, 나는 사무실을 가로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
설주희였다.
“오늘 회식해.”
“…갑자기?”
“설마, 싫다는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닌데….”
거만하게 팔짱을 꼰 설주희는 왠지 모르게 김은영 쪽을 슬쩍 흘겨보더니,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당당하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할 예정이니까, 먼저 가서 알아서 준비해놔. 알았어?”
집에서 회식을 하겠다는 건 스탭들 없이 4명이서만 회식을 하겠다는 말이다.
‘웬일이래?’
나는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자는 그녀의 제안에 흔쾌히 대답했고,
설주희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잠자코 시선을 거두더니, 왠지 모르게 또다시 김은영 쪽을 슬쩍 흘겨보며 넌지시 말해왔다.
“난 단장이랑 이야기 좀 하고 갈 테니까, 애들하고 먼저 가 있어.”
“단장님이랑? 무슨 일인데?”
나는 설주희가 단장과 따로 면담한다는 이야기에 민감히 반응하고 말았다.
내가 전담한 헌터 팀 ‘퀸즈’는 굴지의 대기업 천화 그룹이 세운 천화 길드 산하에 있다.
그러다 보니, 위쪽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해오는 편인데….
대부분 내 선에서 잘리기에, 아예 나를 거치지 않고 팀원들에게 직접 제안을 들이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뭐, 또 이상한 거 하라고 부탁하는 거겠지.”
“주희야….”
“알아. 알아서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설주희는 내 걱정을 읽은 듯 걱정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고, 나는 그녀가 잘 대처하길 믿을 수밖에 없었다.
*
장소를 옮겨, 설주희의 집.
나는 홍유라, 임아린과 같이 축하 파티를 준비해놓은 채로 설주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임아린이 쿠션을 끌어안으며 내 어깨에 슬쩍 몸을 기대오자,
얇은 원피스로 갈아입은 채 잡지를 읽던 홍유라가 뽀얀 맨발을 까닥거리며 말해왔다.
“누구한테 함부로 당할 애도 아니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맞는 말이긴 했다.
설주희를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으리라.
누가 감히 명실상부 세계관 최강자인 설주희를 함부로 건들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받아들일 정도로 호락호락한 성격도 아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때.
스윽──
어깨에 기대있던 임아린이 내 무릎에 슬쩍 손을 얹어왔다.
그리고는 대뜸 검지를 세우더니, 손톱으로 내 무릎을 살살 긁기 시작했다.
“…….”
항상 걸어오는 하찮은 장난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묘하게 간지러운 무릎을 벅벅 긁어댔다.
그러자 임아린이 킥킥 웃음을 흘리더니, 슬쩍 손을 빼내며 선뜻 말을 꺼냈다.
“내가 주희한테 연락해볼게!”
“…그럴래? 주희가 네 연락은 잘 받잖아.”
홍유라의 동조에 힘을 받은 임아린은 냉큼 휴대폰을 붙잡더니, 마치 허락을 구하는 아이처럼 슬쩍 눈을 마주쳐왔다.
“한번 해봐.”
“응!”
그렇게 내 허락마저 받아낸 임아린이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 잠금을 푼 찰나….
쾅─!
갑자기 현관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
집주인이 드디어 행차하신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더니….”
웃음기 섞인 홍유라의 말을 뒤로한 나는, 설주희를 맞이하기 위해 곧장 현관으로 나가보았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설주희가 도착해 있었는데….
“…….”
왠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단장과의 면담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단번에 추측해낸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말을 건네보았다.
“왔어?”
그 순간.
스윽──
설주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주희야?”
잔잔하게 떨려오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툭 건들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꿀꺽─
괜히 위압감을 느끼며 무심코 침을 삼킨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한번 말을 걸어보았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같이 이야기하자.”
한동안 가만히 서서 나를 노려보던 설주희는 잠자코 시선을 거두며 집안으로 발을 들였고, 우리는 팀원들이 기다리는 거실로 향했다.
“어서 와!”
“좀 늦었네?”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달갑게 맞이해 주는 임아린과 홍유라.
설주희는 그런 그녀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가방과 외투를 내던지며 거실 중앙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두 사람에게 설주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슬쩍 설명했다.
“그 단장이 또 이상한 거 시킨 거 아냐?”
“설마아….”
두 사람이 익숙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임아린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야.”
설주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도지혁.”
소파 끝에 걸터앉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나를 슬쩍 올려다보았고,
“너, 뭐냐?”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건네왔다.
“나?”
“주, 주희야. 왜 그래….”
“설주희. 왜 갑자기 화를 내?”
당황한 나를 두고 임아린과 홍유라가 조심스레 끼어들었지만, 설주희는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또다시 싸늘한 분노를 담아 말을 꺼내왔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거야?”
갑작스러운 이유 모를 분노에 살짝 당황한 나는, 의문을 품으며 조심스레 되물어보았다.
“주희야. 지금 무슨 말을….”
바로 그때.
“도지혁!!!!!!”
설주희가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달려들어 내 멱살 콱─ 붙잡았다.
“윽….”
“주, 주희야! 이게 무슨 짓이야!”
“설주희! 너 미쳤어!? 갑자기 왜 이래!?”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다급히 설주희를 떼어내려고 했으나, 분노한 설주희는 요지부동.
목이 콱 졸려버린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붙여보았다.
“가, 갑자기 무슨….”
그러자 설주희가 빠드득 이를 갈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다 들었어. 네가 지금까지 우리 몰래 어떤 짓거리를 저지르고 다녔는지…!”
“무, 무슨….”
“가증스러운 새끼. 우리를 그렇게 속이고 기만해놓고, 평생 안 들킬 줄 알았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