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47화 (247/248)

247. 죽은 신의 잔영

별의 의지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볼포토에게서였다.

볼포토를 통해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볼포토, 가짜 몸, 숲의 현자, 나리트.

그들은 암중에서 제국을 쥐고 흔들었고, 인간을 도구처럼 사용했다.

그런데 그런 자들조차 별의 의지가 권유하는 가이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내게 나름 충격이었다.

게다가 별의 의지는 자신의 정체를 적극적으로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를 부르는 별의 의지라는 명칭을 볼포토로부터 직접 들었고, 그녀의 모습을 대사제에게서 흡수한 기억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도 했다.

신의 파편을 모으던 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되도록이면 숨기려고 했던 것을 감안해보면 별의 의지가 보이는 행동은 상당히 특이했다.

게다가 신의 파편을 모아서 신이 되라는 권유를 하고 다니다니!

진짜 좋은 것이 있으면 남을 주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하는 법이다.

아니면 그럴 만한 자격이 없어서 저것은 신포도라는 소리를 하거나.

나는 별의 의지라고 자칭하는 저 여인이 정말 수상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의 겉모습은 대사제의 기억을 통해 본 별의 의지라는 여자와 동일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까지 같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압니다.”

칼마르에서 오르벤 강체술의 수련을 하고 있을 때, 빛무리 속에서 내게 말을 걸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내게 할 말이 있습니까?”

“윌리엄 버로스. 당신은 내가 할 말을 이미 다 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기는 했지.

내 앞에 빛으로 나타난 누군가가 현학적인 소리를 지껄이기는 했다.

그런데 내가 그런 학자연한 소리를 들으면서 단숨에 이해하기에는 책을 멀리한 기간이 너무 길었다.

사람을 상대하고, 숫자를 다루던 기간은 내 성격을 바꿀 정도로 길었고, 칼을 쥐고 날뛰던 경험은 내 영혼에 새겨질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철학책을 읽어본 것은 대학 시절이 마지막이었고, 과학교양서도 다르지 않다.

지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시절의 지식은 단편적인 개념 몇 개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어설픈 지식으로 아는 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다시 공부할 생각 역시 없다.

내게 이익이 된다면 한 번 정도는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냥 생각만.

별의 의지가 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우 속물적인 사람이다.

막연한 약속과 기대로 움직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당신이 빛으로 내게 나타나서 말하던 것을 의미하는 겁니까? 유감스럽지만 나는 당신이 했던 말의 반의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 나는 학자가 아니에요. 엉뚱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고 목을 치는 일은 제법 잘하는 편이고 실적도 꽤 올렸지만, 그것은 눈치와 결단으로 하는 것이지 학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저 여자는 여리여리한 겉보기와 달리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의 흑막이었다.

호감을 쌓지는 못해도 적대감까지 키울 것은 없다.

그래서 부드럽지만 딱 잘라서 거절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리고 이런 내 태도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자들을 어떻게 이겼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그들보다 기운의 양이나 질이 좀 더 뛰어났기 때문에 이겼고, 그들의 모든 것을 흡수한 것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물론 그 전에 육체끼리 맞부딪치며 무기를 휘두르고 주먹으로 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애피타이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력과 운으로 승패가 갈리는 기사들의 싸움은 분명 아니었다.

“당신이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없는 모양이니 일단 그렇다고 해드리지요.”

말하는 투를 보니 이 여자는 지난번처럼 내 속마음을 읽고 있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왜 자꾸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겁니까? 이것은 싸우자는 도발입니다. 혹시 내가 당신의 적입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 속을 들여다볼 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지만 내게는 당신이 고함을 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만드는 파장은 멀리 퍼져가니까요.”

말문이 막힌 나는 머릿속에 벽을 쌓는다는 기분으로 생각을 통제했다.

명상으로 머릿속까지 완전히 비우기에는 상황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경이 곤두선 대화를 해야 할 때였다.

“그래요. 그렇게 하면 생각의 파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더라도 많이 약해지지요. 이제는 당신의 생각이 내가 있는 곳까지 닿지 않는군요.”

그녀의 말은 내 머리에서 나오는 뇌파를 볼 수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기싸움은 충분히 한 것 같았다.

혹시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원하는대로 호락호락 끌려가지 않겠다는 내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는 별의 의지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나를 만나러 온 의도를 물어보았다.

“내 부하들의 눈과 귀를 막으면서까지 나타난 것을 보면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해보시죠.”

“신이 되세요. 신의 여정에 나선 자들을 죽이고 신의 파편을 모으면 됩니다.”

역시 예상대로다.

그녀의 권유는 세르케티의 대사제가 들었던 말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기억 속의 대사제가 했던 말을 반복해야 했다.

“관심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관심이 없다고 해도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은 계속 나올 겁니다. 세상은 넓습니다. 5개의 대륙과 4개의 바다에 얼마나 많은 인간이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땅에서 몇 명을 흡수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유감이군요. 무덤자리를 찾으러 바다까지 건너서 오다니.”

“시간이 흐르면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완강한 내 태도에 별의 의지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말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보가 좀 더 필요했다.

내가 아니라 칼마르를 노리고 달려드는 놈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다.

공격의 방향은 나를 향하게 해야 했다.

나는 태도를 살짝 누그러뜨리며 별의 의지가 정보를 흘리도록 유혹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신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까?”

“당신뿐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권하고 있습니다. 신은 죽었고, 죽은 신의 파편이 세상에 흩어졌으니까요.”

도대체 이곳의 신은 무슨 짓을 하다가 죽은 걸까?

지구의 몇몇 신화에서도 죽은 신의 몸을 이용해서 땅과 하늘을 만들곤 했으니 비슷한 걸까?

설마 인간에게 잡혀서 죽었던 것은 아니겠지?

“아니, 내 질문의 의미는 왜 신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은 신이 없어도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종교라고 남은 것들은 그냥 사이비 아니면 일반 단체와 다를 것도 없던데.”

“신이 있어야 과거가 고정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릅니다. 멈췄던 우주의 순환이 반복됩니다.”

아! 다시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가 나왔다.

비슷한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다.

양자 역학이던가?

일반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학문 말이다.

“인간들은 신의 파편을 가진 자를 신비에 접한 사람이라고 부르더군요. 물론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도 신비에 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합당한 자격을 가진 인간만이 신의 파편을 모으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자의 숫자는 매우 적습니다.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먼 과거 또는 먼 미래의 기록에서 자격을 가진 인간을 복사해올 정도입니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말이지요.”

먼 과거 또는 먼 미래?

인간을 복사?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방금 이 세상에서 내가 깨어난 후 계속 가져왔던 의문에 대한 단서를 들은 것인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중세틱한 곳에서 두 번이나 다시 깨어났는지에 대한 단서 말이다.

“내가 여기서 깨어난 것이 당신이 한 짓입니까?”

“나는 이미 죽은 존재의 희미하게 남아있는 흔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신이 깨어나면 사라지겠지요. 내게는 그런 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별이 그리고 이성을 가진 생물의 종합적인 의지가 시간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새로운 신의 탄생을 위해.”

별의 의지는 더 이상 내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인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지만, 나는 별의 의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주변은 안개뿐이었다.

“백작 각하!”

“백작 각하의 말이 여기에 있다. 말에서 내리신 모양이다!”

“백작 각하! 어디 계십니까?”

10미터의 가시거리를 가졌던 안개는 나와 별의 의지가 대화하는 동안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별의 의지가 사라지자 안개도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놓치고 기겁을 한 아쉬리프의 기사들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우호지역에서 말타고 잘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끼고 내가 말만 남긴 채 사라진 꼴이니 심장이 철렁하기는 했을 것이다.

아쉬리프의 기사들 중 리더 역할을 하는 기사가 말에 올라 타는 내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백작 각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기억이 누락되었다고?”

“안개가 밀려오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습니다.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진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는 경호에 실패했습니다. 백작 각하를 놓쳤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과 조우했을 뿐이네. 경들의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너무 신경쓰지 말도록.”

내 위로에도 아쉬리프의 기사들은 눈에 핏발이 섰다.

누군가가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죽은 신의 잔영이 그들의 정신을 제압한 후 왔다가 간 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나는 일행을 재촉해서 칼마르 백작령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칼마르 백작령은 제국이 내전에 돌입하기 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영지 중의 하나였다.

강에는 배를 끌고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말들이 고생을 하고 있었고, 도로에는 심심할 만하면 지나가는 상단과 마주쳤다.

제국의 상황을 살피며 이동하는 동안 이렇게 평화스럽고 부유한 영지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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