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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46화 (246/248)

246.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에서의 만남

아르보그 공작의 영역을 벗어나 남하하면 바로 막시밀리안 공작과 글렌 공작의 영역이다.

물론 막시밀리안과 글렌, 두 명의 공작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가문 역시 영향력을 잃고 몰락했다.

양쪽 다 직계라고 할 만한 남자는 모두 죽었고, 방계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들 가문의 이름이 여전히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 년간 내려온 언어적 약속은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두 공작에게 속했던 귀족들은 물론 공작 가문에서 살아남은 공작의 친척들까지 모두 귀족연합자치령으로 소속을 옮겼음에도 그들 가문의 이름은 여전히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베르그렌 같이 새롭게 부상한 귀족은 새로운 지명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쓰지 말고 내전 후의 복구에나 집중하자는 쪽이었다.

두 공작 가문의 힘이 아직 강력하다면 모를까 이제는 이름만 남았는데 새로운 분란거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일수록 새롭거나 낯선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감안해야 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던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보수적인 태도였지만, 그래서인지 귀족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중심이 되는 귀족 가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던 귀족들에게 큰 변화는 없으리라는 암시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리네아는 그런 상황을 잘 이용했다.

칼마르의 백작가의 자금은 물론이고, 상단의 자금까지 동원해서 현금에 목마른 귀족들을 저리의 대출로 얽어맨 것이다.

영지 복구를 위해 고리채라도 감수해야 했던 귀족들은 리네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우호를 다짐했다.

“우리가 빌려준 자금이 딴 곳으로 새지는 않은 모양이군. 엉망인 영지들만 보다가 우리쪽 영역에 들어오니까 한결 나아. 복구도 상당히 진척이 된 것이 내년에는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겠어.”

“아무래도 다른 곳보다는 내전을 일찍 끝냈으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일찍 시작했지.”

“그리고 다른 곳보다 심했었지요.”

“그래. 잔인했었지. 글렌이고 막시밀리안이고 다들 지나쳤었어.”

아쉬리프의 기사들 중 일부는 황궁 도서관의 사서를 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제국의 돌아가던 상황에 대한 지식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이 제국 남부에도 미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렌 공작도, 막시밀리안 공작도 지나치게 야심이 많았던 자들이었다.

제국 남부 지역에서 다른 지역보다 먼저 혼란이 시작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었다.

파벌의 귀족들을 내세운 대리전으로 제국 남부의 절반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으니 의도했든 안했든 그들의 책임은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다른 지역과 달리 제국 남부에서 벌어진 내전은 대리전의 특성상 귀족들 간의 이전투구가 너무 심했다.

영지전을 빙자한 기사대전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여러 영지가 연합해서 벌이는 대규모 회전까지 벌어졌다.

전투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귀족들의 부담도 커졌다.

보급을 위한 징발은 당연했고, 나중에는 약탈과 파괴까지 흔하게 벌어졌다.

아무리 상황에 쫓겼다지만 영지 자체는 파괴하지 않는다는 영지전의 불문율까지 무시한 것이다.

파벌은 달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경쟁의식이나 거리감 정도만 가지고 있던 귀족들 사이가 철천지원수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칼마르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다.

다행이 연전연승을 한 덕분에 영역을 넓히고,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지만, 조금만 삐끗했어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예상외로 길어지고 격렬했던 내전은 귀족들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 주었다.

특히, 황제가 존재하던 시절의 영지전을 생각하고 가볍게 전투에 나섰다가 파산으로 내몰린 귀족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글렌과 막시밀리안, 두 공작이 빠르게 몰락했던 이유도 휘하의 귀족들을 너무 전쟁으로 몰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측근이었던 베르그렌과 아돈슨이 반기를 들고, 작위도 없었던 그들의 반란이 파벌의 귀족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글렌 공작이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막시밀리안쪽도 비슷했다.

이쪽은 내전에 계승전까지 겹쳐서 아주 개판으로 돌아갔었다.

귀족들이 진절머리를 낼만도 했다.

나는 계속 말을 달려서 글렌 공작의 영향권이었던 지역을 지나 막시밀리안 공작의 영향권에 속했던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이쪽은 이제 칼마르의 영향권으로 완전히 포섭된 지역이다.

원래부터 칼마르가 영향을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었고, 리네아가 복구 자금을 퍼붓기도 해서 친칼마르적인 면이 강한 지역이기는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베르그렌의 급부상이었다.

귀족연합자치령 내에서 글렌 공작 계열이었던 베르그렌의 입지가 강해지자, 막시밀리안 계열의 귀족들이 칼마르 뒤에 숨은 것이다.

아무리 베르그렌과 아돈슨이 실력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하며 귀족연합자치령의 수뇌부로 올라섰다고 하지만, 그들은 원래 글렌 공작의 보좌관에 지나지 않았었다.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했던 자들이라면 모를까, 다른 계열에 속한 귀족들이 수뇌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것이 당연하다.

심지어, 약탈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로는 위협으로 느끼기까지 했다고 한다.

능력까지 뛰어난 자가 윗자리서 장난을 치면 아랫사람은 목숨까지 위험한 법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내전을 벌이면서 쌓아올린 적대감도 심각했다.

아무리 귀족연합자치령이라는 한울타리 안에 모여 있다고 해도 글렌 공작 계열의 귀족과 막시밀리안 계열의 귀족은 같은 편이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막시밀리안 계열의 귀족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귀족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칼마르의 백작은 그들의 필요성에 잘 어울리는 귀족이었다.

오랜 역사와 강력한 무력에 막대한 금전까지.

자존심과 실익, 어느 쪽을 보더라도 기꺼이 고개를 숙여 따를만한 귀족이었다.

귀족연합자치령이 평등한 귀족의 권리를 명분으로 내세웠다고 하지만 그런 명분을 믿는 순진한 귀족은 별로 없었다.

칼마르에 머무르거나 주변을 돌아다닐 때면, 리네아는 물론 내게도 다른 귀족보다 좀 더 평등한 귀족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의견과 제안이 몰려오곤 했다.

그중에서도 좀 더 열성적이었던 막시밀리안 계열의 귀족들은 칼마르의 백작을 평등한 귀족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평등한 귀족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 결과가 몇 배는 확장된 칼마르의 영역이었다.

과거 칼마르 시와 그 주변을 포괄하는 백작령, 그리고 강과 도로 주변에 미치던 칼마르의 영향력이 이제는 과거 막시밀리안 공작의 영역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 편입된 영역을 본래의 백작령과 구분하여 그냥 백작령의 외부 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백작령에 비해 몇 배나 큰 그 지역을 말이다.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힘이 없으면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는 법이다.

지금 칼마르에게는 실질적인 힘이 있다.

막시밀리안의 이름이 지명에 남은 것?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는 과거 막시밀리안의 영역이었던 지역을 그냥 외부지역이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외부지역에는 실제로 칼마르의 힘이 투사 중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몇 배는 되는 자금을 퍼부은 것이다.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것도 그 덕분이다.

나는 외부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원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안개가?”

“그러게 말입니다. 대낮에 안개라니.”

“안개가 점점 심해지는군. 그런데 경들은 칼마르에 돌아가게 되면 도서관으로 복귀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

“경들은 이번에 정말 잘해 주었어. 돌아가면 포상이 있을 걸세.”

대답이 없었다.

나는 순간 살짝 당황했다.

내부 규정 때문에 개인적인 포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침묵으로 질문을 묵살할 것까지는 없을 텐데?

그러나 내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나는 지금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나와 함께 이동하는 아쉬리프의 기사들은 10명이었다.

베르탁과 그의 학맥인 엔맬시스를 소멸시킬 때 추가로 동원했던 다른 인원들은 불필요한 주목을 피하기 위해 따로 보낸 참이었다.

나와 함께 이동하는 자들은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할 수 있다.

거인족과 싸우더라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으리라는 말을 할 정도다.

그들의 특기인 암살이라면 거인족이라도 당연히 죽일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눈이 풀려 있었다.

정신이 나간 모양인지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초점이 나간 눈을 하고 있었다.

말도 영향을 받았는지 속력이 느려지더니 걸음을 멈췄다.

내 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도로 중간에 멍청하게 서 있는 말과 사람들 사이에서 멈춰서야 했다.

멈춰버린 나는 내가 있는 공간조차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안개가 밀려오고 점점 심해진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아쉬리프의 기사들이 정신을 잃고 난 다음부터는 가시거리가 10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진짜 분리되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안개를 자세히 보면 미세한 물방울이 대기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 내 눈앞의 물방울은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장소 같았다.

나는 말에서 내려서 일행의 앞으로 걸어갔다.

움직이는 동안 발걸음 소리도 나고, 돌을 차니 앞으로 굴러갔다.

안개 역시 내가 움직이며 생긴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진짜로 시간이 멈춘 장소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안개로 인해 축축해지는 옷을 툭툭 털어냈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확인하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면 최상의 상태로 싸워야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풀면서 정면을 주시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안개가 걷히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흥미를 가진 자들이 찾아오리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곧 누군가가 올 것이다.

역시!

누군가가 멀리서 오고 있었다.

흰색의 장막 건너 멀리서 사람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접근하고 있었다.

안개로 인한 가시거리 10미터라는 제한이 무색하게 멀리서 접근하고 있는 실루엣은 흐릿하면서도 명백히 알아볼 수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여자임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안개를 헤치고 그녀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별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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