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약탈 전쟁의 여파
지슬리 공작령은 내가 손을 댈 것이 없었다.
미래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새싹도 보이지 않고, 내 눈에 거슬리는 자도 없었다.
선대 아르보그 공작이 이미 한 번 쓸고 지나간 후라서 지슬리 공작령을 규합할 만한 인망과 명분이 있는 자는 모두 죽은 후였다.
남아 있는 자들은 고만고만한 지슬리의 방계들 뿐.
한때는 아르누트 지슬리가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에 대한 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죽은 모양이다.
물론 누가 죽인 지는 모른다.
아르누트는 지슬리 공작가의 마지막 후계자라고 자신을 포장한 덕분에 이런저런 뜨내기들과 야망가들이 그의 주변에 적지 않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칼마르에서 도망쳤던 고프리까지 보였다고 하니 얼마나 근본없는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덕분에 암살자를 집어넣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물론 아르누트를 죽이고 싶어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컷허드 같은 방계의 남자친척이라든가, 아니면 계속되는 징발에 반감을 품은 현지의 유력자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내가 보기에 아르누트는 쿠바의 카스트로와 비견되는 행운이 있지 않는 한 죽은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그 정도의 행운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친척들과 상잔하면서 어느 정도는 지슬리의 역량을 갉아먹어주기를 기대했는데 그것조차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지슬리 공작이 지배했던 영역에 대한 우려를 접었다.
원래부터 인구가 부족한 곳이라서 몇몇 유력자들을 갈라놓기만 하면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곳이 아니기는 했다.
게다가 아르보그 공작군의 약탈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아서,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도시가 적지 않았다.
광산을 유지하는 데에도 허덕이는데 도시의 복구에 드는 노동력까지 감당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광산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적어도 식량을 수입해올 만한 최소한의 교역은 유지할 수 있어서 굶어죽는 사람까지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컷허드를 비롯한 항구 도시 영주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면은 있지만, 해상교역망을 칼마르가 장악하고 있는 이상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지슬리 공작가의 영역에서 남쪽은 아르보그 공작의 영역이었다.
*
아르보그 공작령에서는 조사를 한다면서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지나가야 했다.
아르보그 공작 가문이 귀족연합자치령에 한발을 걸치기로 했다고 해서, 그것이 서로 간의 우호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들과 전쟁을 치른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전쟁을 지휘했던 나를 죽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검을 들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암행하는 중이고, 이런 상황은 기습 공격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어디서 눈먼 칼을 맞고 죽을 사람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아쉬리프가 비밀리에 황제가 부리던 검이었다고 해도 숫자에는 못 당하는 법이다.
기껏 능력있는 자들을 휘하에 끌어들였는데 어이없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주마간산으로 아르보그 공작령을 지나야 했다.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말을 타고 달리며 길가의 사람들과 촌락을 대충 살펴보며 지나쳤다.
그래도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공작들의 영역과 달리 아르보그 공작령의 상황이 썩 괜찮은 편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의 상황이 너무 엉망이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좋게 보이는 면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나은 것이 분명했다.
구태여 안좋은 부분을 지적하자면 물가가 너무 비싸고,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는 정도였다.
유랑민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대신 돈은 흔했다.
아무래도 지슬리 공작령을 약탈한 덕분에 유입된 재화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물품 부족이 한데 어우러져서 여러 문제가 증폭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아르보그 공작령을 떠나 그 휘하 귀족들의 영지로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엉망이었다.
영지를 떠나 떠도는 자들의 시체가 길에 버려져 있었고, 도적인지 아니면 굶주림에 몰린 유랑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도적떼와 하루걸러 한 번씩은 부딪쳐야 했다.
버려진 촌락과 황폐화된 농경지는 이곳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제서야 아르보그 공작령에서 보았던 유랑민과 이상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그곳까지 피난을 갔음이 틀림없다.
원인은 나였다.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벌였던 귀족연합자치령의 약탈 전쟁이 아르보그 공작 휘하 귀족들의 영지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박살내 놓은 것이다.
귀족연합자치령을 묶은 끈은 전보다 굵어졌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혈로 만든 결속이었다.
내게는 칼마르 백작령이 전쟁에 휩쓸렸던 기억이 있다.
칼마르 시는 괜찮았지만 그 주변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살았던 나는 전쟁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했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엉망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복구될 줄 알았지.
생각해보면 내 경험은 칼마르 인근으로 국한된다.
아무리 전쟁이니 난민이니 하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토로해도, 내가 도적질을 하며 돌아다니던 근처에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상업도시가 있었다.
칼마르에서 흘러나오는 약간의 물품만으로도 우리는 생존이 가능했다.
진정한 지옥을 경험하기에는 천국이 너무 가깝게 있었다고 할까?
게다가 아르보그 공작가의 내분 때문에 영지의 복구에 신경을 쓰지 못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가장 유력했던 후계자 두 명이 모두 탈락하고, 심지어 한 명은 숙청까지 당하는 판국에 영지의 복구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귀족이 얼마나 있었을까.
병력과 자금을 손에 쥔 채 만약을 대비하는 절박함으로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까지 뛰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내분이 끝났다.
아마 대부분의 영지 귀족들은 지금쯤이면 자신의 영지에 돌아왔을 것이다 .
그리고 자신의 영지가 어떤 꼴인지 실감했겠지.
황폐화 된 영지를 보며 그들이 어떤 기분으로 있었을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귀족연합자치령군의 군사지도자였던 나에 대한 원한 역시 만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르보그 공작에게 속한 자들과는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 내 앞에 잡혀 온 자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말을 탄 기사가 10명이나 움직이고 있는데, 습격을 하다니 자네들 제정신인가?”
“......”
“왜 말이 없나? 강도 기사가 되어서 영지에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그냥 죽여달라는 뜻인가?”
“패했으니 할 말 없소.”
내 질문에 대답하는 자는 기사였다.
어쩌면 영주일지도 모르겠다.
강도질을 하다가 잡혔음에도 그자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를 습격해온 자들은 어딘가의 영지군이었다.
그것도 전투 경험이 상당한 자들이었다.
만약 미니맵으로 그들의 습격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내 기사들 중 최소한 절반은 잃었을 것이다.
아무리 아쉬리프의 기사라고 하더라도 암살이나 야습 같은 특수 작전을 잘한다는 것이지, 이런 정규전에서는 그냥 평범한 기사와 다를 것이 없다.
다행히 습격을 미리 알아챈 덕분에 절반을 잃는 대신 절반의 부상자로 저자들의 습격을 격파했으니 망정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서 말이나 섞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춤을 추고 있었겠지.
원래 강도 기사를 잡으면 강도 기사는 죽이고 그가 속한 영지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이들은 30명에 달하는 영지병으로 우리를 습격했다.
30명이라니!
이 정도의 숫자라면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작정하고 나선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배상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몰려가서 영지를 공격해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자는 그래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연합자치령 기사잖아!”
많은 의미가 담긴 항변이었다.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했다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당해 마땅하다는 정서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영지병들도 소란스러워졌다.
무기를 빼앗고, 땅바닥에 엎어놓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혼잣말처럼 욕을 하는 자도 있었고, 심지어 몸을 일으키려는 병사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소요는 금방 진압당했다.
조금이라도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자들에게는 폭력이 가해졌다.
특히, 몸을 일으켰던 자는 즉시 죽여버렸다.
방금 전투에서 누가 왜 패배했는지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해 준 것이다.
영지병들은 자신들이 포로로 잡혔음을 상기해야 했다.
“증거있나?”
“내가 멍청이로 보이나? 갑옷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저런 양식은 남부 지방에서나 만드는 거라고!”
“그래. 우리가 귀족연합자치령의 기사라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인데? 너희도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한 편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 영지를 약탈해 간 것이 누구인데? 어떻게 우리가 한 편이라는 건가?”
“아르보그 공작 가문의 보증을 무시할 생각인가?”
내 질문에 지금까지 화를 내던 자는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휘하 귀족에 대한 아르보그 공작가의 장악력까지 무너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고, 자포자기 상태였다 .
그의 인내는 얼마가지 못했다.
“보증을 무시한 것은 너희들이다. 뭐든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고 있는데 어떻게 같은 편인가? 적군에게도 팔지 않을 가격이라고! 그러니 나도 돈을 벌러 나온 거다. 너희들의 갑옷이면 한 달 식량값은 되겠구나!”
상인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원한을 살 정도로 이익을 추구하다니!
절대로 칼마르의 상인은 아니다.
한탕하고 빠지는 것보다 꾸준한 거래가 이익이라는 것은 상인에게 상식이다.
그러나 영주의 어용 상단은 평범한 상인이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무리한 짓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접경 영지의 영주들 중 지나치게 욕심을 낸 자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가자.”
“입을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 이웃을 등쳐먹은 자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우리는 포로로 잡은 자들을 내버려두고 그곳을 떠났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욕심을 대신 덮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도 일부 지역에서 귀족연합자치령에 대한 악감정이 퍼지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식량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나는 말 위에서 칼마르의 상단을 이용할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날 우리는 아르보그 공작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