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뱅트손 공작령에서 해야 할 일
스케티 공작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을 지나면 바로 뱅트손 공작의 영역이다.
스케티 쪽에 비해 뱅트손 쪽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이쪽 역시 병력 손실이 컸고, 뱅트손 공작이 신망을 잃어서 그렇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뱅트손 공작에 한해서 살펴 본다면, 스케티 공작 못지 않게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스케티 공작은 죽었고, 뱅트손 공작은 살아있다는 정도?
뱅트손 공작이 입은 피해를 헤아려보면 과연 복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른 무엇보다 거인 기사를 모두 잃은 것은 정말 큰 피해였다.
휘하의 귀족들을 직접적으로 억누를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가짜 몸에게 일방적으로 털린 것도 뱅트손 공작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휘하의 귀족들이 다른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아무리 불만이 많은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뱅트손 공작의 밑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연합자치령이 등장한 이후로는 그들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셈이다.
몇몇 귀족들은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데면데면하게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 귀족들은 훨씬 많았다.
본격적인 영지전을 벌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결투를 빙자한 신경전이 벌써 몇 차례나 벌어졌다고 한다.
반기를 든 귀족들의 명분은 베르탁의 제거였다.
지금 내 앞에서 흥분하고 있는 자도 같은 명분을 내걸고 뱅트손을 멀리하고 있었다.
“베르탁 그자는 미친놈입니다. 영지민들을 납치하다니! 영지민의 보호는 영주의 의무입니다. 저는 절대로 이 일을 용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베르탁은 거인 기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혼자서 한 일은 아니다.
그가 속한 학맥인 엔멜시스와 뱅트손의 후원으로 이루어낸 일이다.
그가 속한 학맥인 엔멜시스는 인간의 피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탐구해서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거인 기사를 만들어냄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인 기사는 지금 없다.
가짜 몸에게 몰살당했으니까.
뱅트손의 기대와 달리 베르탁이 만들어 낸 것은 거인족의 조악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나리트가 노예로 부렸던 거인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설사 목표를 이뤘다고 하더라도 가짜 몸에게 몰살당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나리트가 직접 만들어냈을 거인 노예들조차 내게 몰살당했으니까.
내게 흡수당하기는 했지만 가짜 몸 역시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나는 인간을 실험체로 사용하던 실험실을 기억한다.
내게 죽은 아르보그 공작이 거인족을 부려서 운영하던 실험실이었다.
무척이나 역겨운 짓거리였다.
아마 뱅트손과 베르탁 역시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숫자의 인간이 실험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뱅트손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의 생각도 내 추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은 뱅트손 공작령에서 자기들끼리 하는 실험이라면 모를까 자신들의 영지에서까지 영지민을 끌어가는 것은 절대 반대였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귀족일수록 반대는 더욱 격렬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뱅트손의 몰락은 확정적이었다.
칼마르에서 손을 잘 쓰면 영향력까지 거세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관심은 뱅트손 보다는 베르탁에게 향해 있었다.
뱅트손의 몰락과 상관없이 잘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이 거인족의 조악한 모조품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기사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고 공분이 가라앉으면 분명히 관심을 가지는 귀족이 나올 것이다.
어쩌면 제국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실험을 계속 이어갈지도 모른다.
타르바 왕국이나 쿠나 왕국 같은 곳에서 말이다.
나로서는 그런 위험을 방치할 수 없었다.
“베르탁이 미친놈이라는 것에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요. 남작. 그래서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요?”
“모릅니다. 저희들이 직접 베르탁을 향해 비난을 시작하자 공작성에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 이후로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그자의 학맥이라는 자들까지 숨은 것은 아니지 않소?”
“그것은 그렇습니다. 공작령에 바로 붙어있는 바코로이에 그들의 학당이 있습니다. 뱅트손이 그자들에게 아예 내려준 도시라고 합니다. 그곳이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위치가 정말 좋습니다. 남부에서 공작성으로 가려면 그곳을 안 거칠 수가 없습니다.”
바코로이가 그들의 거점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곳은 일종의 역참 도시였다.
오가는 뜨내기가 많으면 그중에서 몇 명이 행방불명이 되어도 눈치채기 어렵다.
만약 베르탁의 존재가 공론화되지 않았다면 쉬쉬하면서 실험이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경의 증언은 칼마르로 돌아가서 내가 직접 공론화할 거요. 어쩌면 용병 부대와 함께 올지도 모르니까 그때 보도록 합시다. 경의 도움이 필요할 거요.”
“기다리겠습니다. 백작 각하.”
물론 나는 그렇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베르탁과 그의 학맥인 엔멜시스에 속한 자들은 땅에 매여 있는 영지 귀족이 아니다.
후원자만 있다면 어디서든 다시 시작하면 그만인 자들이다.
시간을 끌다가는 모조리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뱅트손에게 속했던 귀족들을 믿는 것도 곤란했다.
지금 내게 열을 올리며 베르탁을 고발하는 남작이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엔멜시스에서 나를 떠보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믿음은 많은 시간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지 말 몇 마디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믿을 수 있는 자들이 필요했다.
다른 생각없이 손발 역할을 제대로 해줄 자들이 간절했다.
아쉬리프의 기사들, 칼마르의 기사들, 직속 용병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아쉬리프의 기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즉시 바코로이로 갈 것을 명령했다.
덕분에 남작을 만난 바로 다음 날 저녁에 바코로이로 진입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아쉬리프의 기사들은 근본이 암살자다.
황제의 검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음지에서 활동하는 것에도 익숙한 자들이다.
작은 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학술 단체를 쓸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 쉬운 일이었다.
비슷한 경험도 적지 않다.
그들은 내가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몇 명은 바코로이의 출입구를 막았고,
다른 몇 명은 엔멜시스에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출입구를 장악했다.
탈출하는 자들 잡기 위해 주변을 포위한 자들도 있었다.
마치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부에서 직접 손을 쓰기로 했다.
20명의 아쉬리프의 기사들이 나와 함께 엔멜시스의 학당으로 진입했다.
엔멜시스의 학당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2층과 3층은 숙소로 쓰고 있고, 1층은 사무실과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엔멜시스에 속한 자의 대부분은 숙소에 있었다.
그들이 용병이나 병사였다면 술집에 몰려가 있었겠지만, 태생이 학자들이라서 그런지 숙소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기꺼운 일이었다.
“엔멜시스는 지운다. 모두 죽여라.”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20명의 기사들은 짝을 이루어 흩어졌고, 내 뒤에는 4명의 기사만이 남았다.
조용하게 죽일 수 있었던 건물 입구의 문지기와 달리 숙소에 있던 자들은 금방 시끄러워졌다.
아무래도 숫자가 한둘이 아니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챈 자들이 소동을 피우는 것이다
울음과 비명, 문을 세게 닫거나 도망치는 소리.
어떤 이는 창밖으로 도주하려다 떨어져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전투 소음은 아니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학살의 소음이었다.
엔멜시스에 속한 자의 대부분은 학자였다.
싸울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기습에 대한 대처를 아예 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적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들이친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베르탁이 지하에 있다고 합니다.”
“지하에?”
“예. 강의실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베르탁 뿐 아니라 몇 명의 고위 간부가 그곳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장 가지. 그리고 증거인멸을 준비하라.”
나는 즉시 기사들을 거느리고 지하층으로 향했다.
증언대로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강의실에 있었다.
지하층에 있던 자들은 지상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들은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안에서 자물쇠를 채운 철문으로 막아 버렸다.
누구도 쉽게 내려오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철문을 고정하는 곳까지 철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한 힘으로 몇 번 흔들고 잡아당기는 것으로 벽에 고정된 돌쩌귀를 뗄 수 있었다.
경첩이 망가진 철문은 자물쇠를 채운 그대로 옆으로 치워 버렸다.
지하층은 내가 전에 아르보그 공작의 비밀 실험실에서 본 장면과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실험실의 규모가 좀 더 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가두어 놓은 감옥이 있다는 정도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은 예상대로 모두 뜨내기 행상인이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밖으로 끌어내서 일단 묶어두도록 해. 조사가 필요하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는 통로를 막았던 자들은 벌써 비밀통로로 도망친 후였다.
하지만 비밀통로를 따라 추격할 수는 없다.
비밀통로에 무슨 짓을 해놓았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중간에 비밀통로를 무너뜨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생매장이다.
나는 즉시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갔다.
비밀통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후, 미니맵을 의지하여 곧장 추격에 나섰다.
다행히 적들은 아직 비밀통로에서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능이 강화된 미니맵을 통해 비밀통로의 출구가 바로 옆에 있는 상점 건물 지하라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이후는 간단했다.
비밀통로로 도망친 엔멜시스의 간부들은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모두 목이 달아났다.
그것은 베르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기도 전에 그냥 목을 쳐버렸다.
상점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엔멜시스의 건물이 불에 타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증거인멸을 위해 아쉬리프의 기사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만약 엔멜시스에서 실험과 관련된 기록을 이곳에 남겼다고 해도 화재 속에서 모두 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뱅트손이 거인 기사들을 복구할 가능성까지 완전히 사라진다.
그의 파벌에 속했던 귀족들을 다시 장악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결 평안해진 기분이 되어서 지슬리 공작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