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43화 (243/248)
  • 243. 귀족연합자치령, 지금

    “백작 각하. 바닷길을 통해 가시겠습니까?”

    “그쪽이 빠르기는 하겠지?”

    “그렇습니다. 육지로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그냥 칼마르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가 왔던 길로 되돌아 가면 그만이다.

    육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귀족연합자치령의 군사지도자이자 칼마르의 백작인 나로서는 바닷길을 통한 귀환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앞으로 몇 년간은 칼마르를 떠나서 이렇게까지 멀리 나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프리시오 공작령에 대해 추가적인 경험을 쌓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프리시오 공작령에 대해서는 경험이랄 것도 없었다.

    나리트를 추격하면서 스치듯 구경한 것이 다였으니까.

    이곳의 사람들도, 물산도, 지형도 여전히 낯설다.

    그런데 이제는 프리시오 공작령이 귀족연합자치령의 유일한 적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나는 귀족연합자치령의 군사지도자이고.

    이러면 어디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책상에 앉아서 첩보 문서만을 들여다보면서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해봐야 예상하지 못한 실수나 하기 십상이다.

    역시 기회가 생겼을 때 현지를 돌아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나를 계속 잡아끌었다.

    결국 나는 육지를 통해 칼마르로 복귀하기로 했다.

    프리시오 공작의 영역과 제국 중부를 거쳐 남하하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프리시오 공작령뿐 아니라 다른 지역을 살피기에도 적절한 선택이다.

    프리시오 공작령은 아직도 엉망인 상태 그대로였다.

    오히려 혼란이 더 심해진 부분도 있을 정도였다.

    거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습격해서 몰살시켰다는 헛소문이 돌고, 헛소문에 쫓겨서 이웃 도시의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도 했다.

    막연한 공포에 떠밀려 도시를 떠나 시골로 피난을 가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약탈하는 자들 역시 곳곳에서 날뛰었다.

    약탈을 위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려서 혼란을 유발하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내전으로 피폐해졌던 제국 중부와 남부의 상황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러나 프리시오는 도망쳐서 목책을 세우고 병력을 주둔시켰던 곳에 아직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몰려온 귀족들 덕분에 병력은 전보다 늘었지만, 정찰 기병만 주변으로 계속 파견을 할 뿐, 치안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찰 기병에는 많은 신경을 써서 헤필드를 넘어서 공작성 가까이까지 접근하는 무리조차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들 중 한 무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10명으로 구성된 정찰 기병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거기 너희들 손을 들어라! 무기에서 손을 떼!”

    “말에서 내려! 내리지 않으면 죽인다!”

    가까이 접근한 그들은 칼을 뽑아서 우리에게 겨누며 위협해왔다.

    용병처럼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말을 타고 몰려다니고 있으니 검문하는 것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치안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자들이 이러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3명이라는 만만한 숫자가 그들의 관심을 약탈 쪽에 기울어지게 만든 것이다.

    말은 물론이고 갑옷과 무기까지.

    10명이 나누어도 한 몫 단단히 챙길만한 액수이기는 했다.

    그들의 눈은 탐욕에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약탈에 이미 경험이 있는 놈들 같았다.

    나는 협박을 듣자마자 그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내 뒤에 있던 호위 기사들은 나를 엄호하듯 적을 향해 속사로 화살을 쏘아댔다.

    한순간에 쏟아지듯 퍼부어진 30여 발의 화살비는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기마병의 절반을 무력화시켰다.

    나머지 절반은 내 몫이었다.

    적들 사이에 뛰어든 나는 혼란에 빠진 적들을 칼로 내리치고, 잡아서 그들의 동료에게 던졌다.

    그 와중에 가까이 다가와서 건방지게 나를 물려고 하던 말은 한주먹으로 후려져서 죽여버렸다.

    건방진 말의 주인 역시 똑같이 해주었다.

    여기까지 적들을 쓸어버리자 아직도 말 위에 있는 자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의 뒤통수에 비도를 박아주는 것으로 정찰 기병들의 정리를 끝냈다.

    전투가 아니라 약탈을 하려던 정찰 기병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정말 운이 좋은 자들이었다.

    신문을 할 자들은 3명이었다.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입도 혀도 멀쩡했다.

    “이것들이 감히 귀족을 털려고 해!”

    “살,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저희는 도적이 아닙니다. 프리시오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정찰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꼼짝도 안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슬쩍 프리시오 공작을 들먹이며 구명을 간청하는 모습을 보니 멍청한 자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을 가진 기병이라면 마을 유지의 자식 정도는 될 테니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일반 병사보다는 얻어듣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대충이라도 조사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고문까지는 필요없었다.

    부상을 입은 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입을 열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설마 했지만 프리시오 공작은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리트와 그자의 일행이 모두 내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공작령에 그들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정찰 기병들을 계속 파견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빨랐던 모양이다.

    너무 빨리 추격하고, 너무 빨리 죽이고,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이다.

    막상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자는 이제서야 주변을 더듬거리면서 살피고 있는데 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박자가 있다.

    어쩌면 삶의 속도라고 하는 것이 더 직관적일지도 모르겠다.

    도시에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이 다르고,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과 공무원이 또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마다 타고나기를 다르게 타고난다.

    문명의 수준에 따라 삶의 속도가 다른 것도 당연하다.

    나는 빠른 편이었다.

    덕분에 지구에서 시차를 넘나들며 영업을 뛸 때도 남들보다 잘 할 수 있었다.

    그런 기질상의 특징은 이곳에서 깨어난 이후로도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힐링한답시고 시간을 보내다가 고생만 죽도록 하고, 실제로 목까지 잘린 경험을 한 후로는 더욱 그랬다.

    내가 일선에 서서 빨리빨리 적들을 정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리시오 공작은 나와 다르다.

    그는 농업이 중심이 되는 문명에서 살아온 사람이었고, 나처럼 느긋하게 지내다가 목을 잘려본 경험도 없다.

    그의 상식으로는 아직 적이 근방에 있어야 맞는 것이다 .

    나는 들을 만한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그들을 풀어주었다.

    물론 기마병들의 말 중 부상을 입은 말들은 다 죽였고, 멀쩡한 놈들은 우리가 챙겨가기로 했다.

    그들 역시 내 결정에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원하신다면 탈영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대신이라면서 복귀를 최대한 늦추겠다고 자진해서 맹세를 했다.

    그것으로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헤필드를 향해 이동했다.

    “아무래도 프리시오는 한참을 이러고 있을 것 같은데?”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호위 기사 중 하나는 내가 하는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장차 내 밑에서 관리로 일할 사람다운 이해력이었다.

    “백작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습니다. 프리시오 공작이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리고 휘하 귀족들에 대한 장악력도 많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어. 공작성을 잃은 것은 치명적이지. 영지민들이 고향을 떠나서 떠돌고 있는 것도 큰 문제고. 이러면 공작령이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세금은 제대로 걷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다행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몇 년간은 큰 전쟁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되도록이면 계속 큰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어. 자잘한 전투야 상관없지만 큰 전쟁은 너무 낭비가 심해.”

    “그렇다면 공작 휘하의 귀족들을 부추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자네의 제안을 문서로 정리해서 제출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어떤 제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리네아는 이미 그와 관련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리딕슨 공작가의 살아 남은 남자들에게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고 들었는데 결과가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헤필드를 마지막으로 하는 프리시오 공작령의 도시들과 그의 휘하에 있는 귀족들의 영지를 살피며 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내린 결론은 고무적이었다.

    나리트가 프리시오 공작에게 입힌 피해는 직할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작령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귀족들의 영지는 물론이고 리딕슨에게 속했던 지역조차 피해가 거의 없었다.

    물론 공작령이 입은 피해 때문에 간접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있겠지만, 적어도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프리시오 공작을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리네아와 사라 남작 부인 쪽이 될 모양이다.

    프리시오 공작의 세력권을 벗어나면 바로 스케티 공작의 세력권에 들어간다.

    물론 지금은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했다고 해야 더 정확하기는 하다.

    하지만 스케티 공작 가문이 멸문하다시피 한 지금도 관습적인 표현은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다.

    나는 스케티 쪽으로 넘어오자 프리시오 공작 쪽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 호위기사들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이쪽도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프리시오 공작쪽처럼 치안까지 엉망은 아니었다.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엉망이 될 치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 소작료가 절반으로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날품팔이의 일당이 두 배로 뛰었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

    귀족들조차 너무 많이 죽어서 가문의 재산이 살아남은 소수의 귀족에게 집중되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평화와 풍요를 누리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는 심각했다.

    기사든 병사든 젊은 남자가 너무 많이 죽었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였다.

    당장 다음 해의 농사 결과가 좋지 않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했다.

    노인과 여자와 아이만으로는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어디에서든지 제대로 된 노동력을 끌어와야 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농사를 지을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젊은 사람이 줄었으니 군대를 조직할 만한 병력을 모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자체 방위를 할 수 없는 영지라니 이것은 고깃덩어리를 맹수들 사이에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리시오 공작령이 저 모양이 되어서 시간을 좀 벌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귀족들의 영지는 멀쩡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시간을 벌긴 벌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을 번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에는 즉시 대응이 가능한 용병 부대를 주둔시켜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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