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41화 (241/248)

241. 나리트, 긍정적인 자

나와 거인들 주변을 맴돌며 쇠뇌살을 쏘기 시작한 백 명의 기병들은 한껏 기세를 올리며 괴성을 질러댔다.

걷기 전부터 말을 타고, 속사는 기본이라는 유목민답게 그들의 쇠뇌살은 위협적이었다.

푹! 푹! 푹!

죽은 거인도, 아직 살아있는 거인도 있었지만 기병의 쇠뇌살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

아직 살아있는 거인이라도 곧 죽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성급했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직도 죽지 않고 버티고 있던 거인들의 고통어린 신음은 쇠뇌살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쇠뇌살이 몇 개씩이나 몸에 박혀도 움찔도 하지 않을 자들이었다.

그러나 내 손 아래에서는 아니었다.

내가 흘리고 흡수하는 기운의 파동에 휩싸일 때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힘을 다하자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땅에 몸을 뉘이고 숨을 멈추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시체로 변한 거인들의 육체에 쇠뇌살이 박혀들어갔다.

아직 살아 있을 때와 달리 그들의 몸에 깊숙이 파고든 쇠뇌살은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팔을 관통해서 날카로운 살촉이 드러난 쇠뇌살까지 있었다.

이것은 기운을 내게 잃고 푸석해진 거인들의 육체가 두부처럼 변해버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숲의 현자는 스케티의 2살짜리 손자를 하룻밤 사이에 성인으로 자라게 했다고 한다.

나리트 역시 비슷한 능력이 있음이 틀림없다.

내가 그들에게서 기운을 빼앗아 가자 그들의 육체가 무너진 것이 그 증거였다.

철판 갑옷보다 더 질기고 튼튼했던 피부, 고무 뭉치 같았던 근육, 강철 같은 뼈가 골다공증 걸린 80대 노파의 그것보다도 더 연약해졌다.

쇠뇌살에 맞은 손가락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신의 파편에서 비롯되는 기운의 흐름이 없다면 거인의 육체는 연약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죽어버린 거인들 주변을 맴돌며 쇠뇌를 쏘던 기마병들은 한껏 기세를 올리고 괴성을 질러댔지만, 비명 소리같은 그들의 괴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조용해졌다.

그들의 목표는 거인이 아니라 나였다.

죽어버린 거인들이 땅바닥에 누웠을 때, 나는 그들의 쇠뇌에 그대로 온몸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숙련된 기병들에게는 너무 쉬운 목표였다.

바로 코앞에 있는 고정 과녁이나 다름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쇠뇌살은 나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

나는 내 주변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인식할 수 있다.

내 몸의 움직임 역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나는 날아오는 쇠뇌살 소나기의 사이를 춤추듯 걸으며 나리트를 향해 전진했다.

중간중간 피하기 애매한 쇠뇌살은 잡아서 앞을 막는 기마병을 향해 던져 버렸다.

내가 던진 쇠뇌살을 피한 기마병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얼굴에 쇠뇌살을 맞고 즉사하거나 아니면 중상을 입고 낙마했다.

아무리 종교에 미쳐서 정신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면 두려운 감정이 드는 것이 정상이다.

괴성을 지르던 기병들이 조용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싸울 의지까지는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료들의 숫자가 적지 않으니 서로가 서로를 믿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거인을 노예로 부리던 자도 아직 그들의 뒤에 버티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도망칠 생각이 들기에는 아직 일렀다.

활과 달리 쇠뇌는 일단 한 번 쏘면 말 위에서 다시 재기가 어려운 무기다.

단지 사용하기 편하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위력이 활보다 강력하기에 사용하는 것이다.

쇠뇌를 쏜 기병들은 쇠뇌를 버리고 나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장창, 각종 둔기, 기병용 칼.

모두 나를 향한 무기였다.

물론 아무리 저들이 날뛰어도 내 몸에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그러나 진짜 상대를 앞에 두고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 중에서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

쓸데없이 여유를 부려서 변수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리트를 향해 걸어가며 비도를 던지기 시작했다.

비도는 중간에 잡아채서 되던졌던 쇠뇌살과 달리 기마병들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맞으면 무조건 죽을 테니까.

내가 던지는 비도는 말 위에 있는 모든 전사들을 평등하게 죽이기 시작했다.

철판 갑옷을 입고 있는 자도,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자도.

철로 된 투구를 쓴 자도, 투구를 아예 쓰지 않은 자도.

눈치 빠르고 힘이 센 명마를 탄 자도, 부상입은 말을 탄 자도.

내가 던지는 비도 하나에 목숨을 잃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도가 하나 날아갈 때마다 갑옷 앞쪽에 구멍이 뚫리고, 뒤쪽에도 구멍이 뚫렸다.

사람 주먹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몸통에 나는 것이다 .

이 정도의 부상이라면 즉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기마병들은 내게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무더기로 죽어갔다.

심지어 비도 하나에 두 명이 동시에 죽기도 했다.

순식간에 오십 명에 달하는 기마병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한꺼번에 쓰러졌다.

그러나 진정한 내 목표는 기마병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죽어가는 기마병들에게 쏠렸을 때.

비도 하나를 나리트에게 던졌다.

특별히 강한 힘을 담아서.

이제는 수백 미터의 거리는 우습게 던지는 비도다.

백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사이에 둔 나리트는 칼을 내밀어서 닿는 거리에 있는 자나 다름없었다.

비도는 공기 찢는 소리를 뒤에 남기며 날아갔다.

비도는 공기를 찢는 것처럼 사람들도 찢었다.

비도가 날아가는 주변에 있는 기마병들 중 고막이 터지거나, 놀라서 날뛰는 말 때문에 낙마를 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깡!

어떻게 들으면 망치로 철판을 내리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다르게 들으면 거대한 폭탄이 터지는 소음과도 닮은 소리였다.

그리고 피해는 거대한 폭탄이 터진 것과 비슷했다.

나리트의 앞과 옆에는 기사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정예 기병 2백 명이 대기 중이었다.

이미 절반 넘게 몰살당한 동료 기병들을 보면서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돌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자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명령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의 고막이 동시에 터져나간 것이다.

충격파가 발생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자들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그들은 눈, 코, 귀에서 모두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두뇌까지 망가져서 낙마하는 자 역시 한둘이 아니었다.

좀 떨어져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막이 터진 것은 마찬가지였고, 균형감이나 공간감각이 망가진 자도 적지 않았다.

피해는 그들의 말에게도 공평하게 덮쳤다.

기절하듯 쓰러지는 말도 있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빙빙 돌다가 쓰러지는 말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충격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을 치거나 제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즉사한 자는 거의 없었지만, 전투가 가능한 자 역시 거의 없었다.

전투가 가능한 자에게는 다시 비도가 날아갔다.

내가 나리트를 향해 걸어갈 때 방해할 만한 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

나리트는 자신과 불과 한 뼘 거리에서 멈춘 채 허공에 떠 있는 비도를 노려보았다.

약간만 늦었어도 자신 역시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죽어 있는 자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교자 위에 쓰러졌을 것이다.

아직도 아찔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은 2백 년 전에 왕위를 두고 형제들과 싸울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리트는 아주 어린 시절에 신비에 접했었다.

그것은 번개를 다루는 것이었다.

신기한 능력이었지만, 처음에는 별 쓸모를 느끼지 못했다.

번개는 기껏해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위력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한 번 사용하면 오랫동안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계속해서 별 쓸모는 없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승권을 가진 왕족이었고, 번개를 다루는 능력의 쓸모를 찾아냈다.

자신의 주변에 불꽃을 튀게 하기도 하고, 실내에 빛나는 광구를 띄우기도 했다.

번개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꾸미는 것에 유용했다.

그가 국왕이 되는 것에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국왕이 된 이후로는 신비에 접한 자를 여럿 흡수할 수 있었다.

직접 손을 댈 것도 없었다.

국왕에게는 명령에 따르는 기사가 많으니까.

기사들은 그들의 국왕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있는 사람을 죽이거나 끌고 왔다.

그렇게 해서 중력도 다루고, 거인도 키워 내고, 멀리 있는 강자들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그가 가졌던 번개보다도 더 미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2백 년의 시간은 그에게 힘을 부여해 주었다.

중력으로 사람을 눌러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자신이 다른 자들과 비교해서 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별의 의지와 만났을 때 세상의 비밀에 대해 들었고,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행운과 불운이 동시에 그에게 닥쳤고, 행운을 누린 만큼 불운 역시 감당해야 했다.

물론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자를 죽일 수 있다면 이 대륙에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나리트는 죽어가는 자신의 노예들을 보며 싸워야 할지 도망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

그러나 결정이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이 자신을 향해 비도를 던지는 순간, 나리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무 빠르다.

피할 수 없다.

그냥 서서 맞아야 한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번개는 사람 하나 기절시킬 정도이고, 멀리 있는 강자를 구별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금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중력을 다루는 힘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중력을 다루는 힘을 모조리 때려 부어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를 막아야 했다.

그래서.

잡고, 잡고, 잡았다.

막고, 막고, 막았다.

그냥 본능적인 발악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리트 역시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바로 눈앞에서 터진 충격파에 정통으로 휩쓸렸지만, 중력을 겹겹이 쌓아서 막은 덕분에 피해는 거의 받지 않았다.

교자를 메고 있던 노예들이 눈과 귀가 터져서 피를 흘리며 반병신이 되서 쓰러지고 있을 때에도 그는 멀쩡했다.

주저앉은 교자 때문에 체면이 손상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적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정도였다.

나리트는 자신의 가슴께에 떠 있는 비도를 잡았다.

아직까지도 중력으로 잡아놓고 있던 비도였다.

그제서야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윌리엄의 나이는 20대였다.

그것도 초반과 중반의 어디쯤이었다.

반면에 자신은 2백 년이 넘는 기간을 살아왔다.

그는 20년과 2백 년의 차이가 쌓아온 기운의 양을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20년간 쌓은 기운의 양이 2백 년간 쌓아온 자신보다 더 많을 것 같지 않았다.

나리트는 비도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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