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40화 (240/248)

240. 거인들의 최후

신전으로 가는 도로는 산에다 길을 낸 것치고는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었다.

도로 건설뿐 아니라 도로 관리도 신경써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파손된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도로 위에 쌓이기 마련인 돌과 흙 역시 주기적으로 치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깔끔하게 관리했는지 일부 구간은 영지와 영지를 잇는 대로 못지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도로관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관리기구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도로 건설과 유지보수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지구에서조차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도로가 망가져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이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신전에 있다는 신이 타르바 왕국에 미치는 영향은 내가 예상했던 것 그 이상인 모양이었다.

길이 좋아서 그런지 산길을 간다는 느낌도 없었다.

우리는 하루 만에 타르바 왕국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붉은색의 돌로 지어진 신전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마치 신전 전체를 붉은색의 안료로 칠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말라버린 피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녹이 슬어버린 철 같기도 했다.

만약 신전이 부서져 있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신전은 원래 저렇게 부서져 있었나?”

“아닙니다. 저도 처음 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신전이 부서져 있을 정도의 사건이 있었다면 당연히 알려졌을 텐데, 전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것일까?”

신전의 기둥 몇 개가 넘어져서 쪼개져 있었고, 기둥이 지지하던 지붕도 무너져서 신전의 내부가 일부 보일 정도였다.

지진은 아니었다.

높은 탑이라든가 벽돌로 쌓아올린 벽같이 지진에 약한 구조물들이 멀쩡한 것을 보면 지진은 분명 아니었다.

무너진 곳이 신전의 입구 쪽임을 생각하면 외부에서의 공격을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신전 근처 어디에도 전투가 벌어진 흔적은 없었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거나 공성무기를 건설한 흔적도 없었고, 무너진 신전 건물의 어디에도 전투를 겪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공 중의 문제로 스스로 붕괴한 것인가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구도 부서진 신전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적이 공격한 것도 아닌데, 신전으로 가는 도로까지 깔끔하게 관리하는 타르바 사람들이 부서진 신전을 방치할 리가 없다.

일할 사람의 수가 부족하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저기 보이는 거인만 나서도 며칠 안에 대부분의 파편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러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모습조차 잘 보이지 않는 타르바 사람들의 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저자가 정리하려는 자들을 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진 신전 앞에는 지금까지 내가 추격했던 자들이 모여 있었다.

말을 탄 3백여 명의 기마병들.

4명의 거인 용병, 아니 이제는 거인 노예라고 해야 할 거인들.

그리고 신으로 섬김을 받는다는 몇 대전의 타르바 국왕 나리트.

어떻게 내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전 앞에 늘어서 있는 거인 노예들을 보자 내가 뱅트손의 성에서 죽였던 거인 용병이 떠올랐다.

거인 용병이 가지고 있었던 거대한 칼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거대한 칼을 저 앞에 있는 거인들도 가지고 있었다.

사용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거인 용병을 죽인 이후에 노획했던 거대한 방패와 똑같은 방패도 가지고 있었다.

프리시오 공작이 부렸던 거인 용병이 어디서 튀어나온 존재인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프리시오 공작이 가졌던 불확실성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는 프리시오 공작이 그렇게까지 위험한 자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프리시오 공작을 귀족연합자치령을 위한 메기로 써먹어도 내 발등을 찍는 자충수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프리시오 공작에 대해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은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지금은 나리트를 상대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내 호위기사들은 나와 다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한 내 말을 막고 다급하게 조언을 했다.

“백작 각하. 각하께서는 조사를 하기위해 이곳까지 오신 겁니다. 토벌이 아닙니다. 설사 저들이 위험한 자라고 해도 프리시오 공작이 감당하게 내버려두면 그만입니다. 둘 중 하나가 살아남으면 그때 토벌군을 일으키면 됩니다. 백작 각하께서 직접 토벌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본래 조사를 위해 온 것이 맞기는 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 토벌을 나선다고 해도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들을 보라고!”

나는 한 손을 뻗어서 신전 앞에 모여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

타르바 사람들은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먼 거리에서도 우리를 알아보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여기서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두려움이 깊게 배어 있었다.

“저들이 프리시오 공작을 추격하다가 따라잡기 바로 직전에 왜 갑자기 후퇴했을까? 저들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아예 도망을 쳤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최고 속력으로,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말을 툭 건드렸다.

말은 내 지시에 따라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를 막았던 두 명의 호위기사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나는 확신을 갖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를 피해서 도망친거야. 확실해.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르타라는 자칭 신은 내가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것을 안 거야. 그리고 무서워서 도망을 친 거지.”

나에게 미니맵이 있는 것처럼 나르타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나보다 멀리 살필 수 있고, 힘의 우열까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말이다.

별의 의지라는 자가 한 말 중의 하나가 기억이 났다.

[그러나 신의 파편을 모으는 자들은 네게 흥미를 가질 것이다. 당신은 이미 선택된 존재니까. 당신이 가만히 있어도 그들이 찾아올 것이다]

별의 의지가 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논리에 따르자면, 나리트 역시 나와 같은 입장일 수밖에 없다.

나리트에게는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그들이 바로 나인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자가 찾아오는데 얼마나 두렵겠나.

지면 모든 것을 잃고 흡수당하는 판인데.

어쩌면 나리트는 두려움 때문에 이 궁벽한 곳에서 숨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 해. 놓치면 저 겁쟁이 놈이 어디까지 도망칠지 몰라.”

두 명의 호위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내 뒤를 따라왔다.

용감한 자들이다.

내가 날뛰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아쉬리프의 기사들이라면 모를까 처음 나를 경호하는 자들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범상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보지 않은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법이니까.

신전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는 화살이 닿지 않을 정도까지 접근한 후 따라오던 호위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도망치는 자를 죽여라. 하지만 놓쳐도 따라갈 필요까지는 없다.”

“알겠습니다.”

나는 말에서 내려서 등에 지고 있던 칼을 꺼내서 오른손으로 잡았다.

거인의 목이라고 하더라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칼이었다.

물론 거인들이 들고 있는 칼보다는 작지만 말이다.

나를 본 타르바의 거인들은 한 손에는 대형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거대한 칼을 들고 천천히 접근해 왔다.

그들 뒤로는 100여 기에 달하는 기병이 쇠뇌를 들고 따라왔다.

모두 기사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다시 한걸음.

내가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걷다가 뛰다가 육식조가 땅을 향해 내리꽂히는 것 같은 속도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자기 빨라진 내 움직임에 낚인 쇠뇌살이 헛되게 내 뒤로 날아갔다.

수십 발의 쇠뇌날이 낭비되었지만, 모두가 낚인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일격필살의 기회를 엿보며 나를 겨누고 있는 쇠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쇠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도 없었다.

달려드는 나를 노린 거대한 칼이 바닥을 후려쳤다.

맞았으면 분명히 어딘가 박살이 났을 위력이었다.

그러나 이미 빗나가 버린 칼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날아가듯 무서운 속력으로 돌격해 들어간 나는 그 속도에 내 힘까지 보태어 사각방패를 칼로 내리쳤다.

내 키보다 더 큰 쇠방패였지만 쇠방패는 한순간에 쇠가 아니라 나무판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내 칼의 일격에 절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 사이로 거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거인의 눈에 서린 두려움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거인은 다급하게 거대한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그의 반응은 너무 느렸다.

나는 옆에 있던 거대한 칼을 왼손날로 후려쳤다.

칼은 의외로 약한 무기다.

한두번 부딪치는 것만으로 이가 나가고, 재수없으면 부러지기도 한다.

기사들이 여러 개의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장식이 아니라 전투 중에 너무 잘 부러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인이 휘두르고 있는 거대한 칼도 마찬가지였다.

거인의 거대한 칼은 내가 왼손날로 후려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나갔다.

그의 불운은 일단 거기까지였다.

한몸처럼 움직이던 4명의 거인 중 하나가 그를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와 함께 나란히 서서 다가오던 거인이 툭 튀어나와서 나를 방패로 밀어쳤다.

제대로 맞으면 어딘가 부러지기 딱 좋은 훌륭한 방패 타격술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별 타격없는 공격이었다.

이미 칼을 휘두른 나는 밀어치는 방패를 향해 오히려 몸을 던졌다.

방패를 사이에 두고 거인과 내가 몸으로 부딪친 것이다.

물론 충돌은 일방적인 내 승리로 돌아갔다.

거인은 방패와 함께 뒤로 넘어지며 땅으로 굴렀다.

모두가 보기에, 거인들이 보기에도 한가지 사실은 명백해졌다.

내가 거인들보다 몸집은 작지만 그들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들보다 무기를 다루는 실력이 뛰어났다.

일대일로는, 어쩌면 둘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둘이 아니라, 셋 아니 넷이 달려들면 된다.

거인들은 자신들의 열세를 인식하자마자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것 처럼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무기술조차 밀리니 칼로 찌르고 방패로 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여럿의 힘으로 나를 누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였다.

나는 거인들 역시 신비에 접한 자라는 것을 안다.

뱅트손의 성앞에서 죽은 거인 용병은 내게 맞아죽은 것이 아니라 흡수를 당해서 죽었다.

거인들이 나를 잡고 누르고 당기는 순간, 나와 그들은 하나의 회로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회로를 타고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순간 거인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서 손을 떼지 못했다.

맹렬하게 흐르는 기운이 그들의 조악한 회로를 부수고 그들의 영혼까지 찢어버리는 동안 그들은 고통을 드러내며 천천히 땅바닥으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향해 무수한 쇠뇌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한 자리에 있던 우리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