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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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트는 오랫동안 작은 왕국에서 은거하듯 살아왔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환경은 그에게 강한 족쇄로 작용했다.
나리트는 자신이 왕국민들부터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다고 해도 종종 우물 속의 절대자와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좁은 우물 안에서, 우물보다도 더 좁은 하늘을 보면서 산다면 마음까지 좁아지는 법이다.
나리트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평생을 부족하게 살아온 자는 자신의 족쇄가 풀리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폭주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에게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돈이 생기면 졸부 노릇을 하다가 선을 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너무 급하게 먹다가 체해서 죽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스스로 신을 자처하고, 왕국의 신민들로부터 절대자로 떠받듦을 받으며 살아온 나리트라고 하더라도 욕망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사고치는 어리석은 인간 말이다.
원래 나리트는 사람이 죽고 난 후에야 그들에게 있는 신의 파편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달에서 그는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거인 노예들이 날뛰며 병사들을 죽이고, 저항하는 자들의 의지를 꺾은 후였다.
죽은 자들 사이를 거닐며 인간의 작은 가능성마저 먹어치우고 있을 때 갑자기 자신의 능력이 확장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마치 장님이 눈을 뜬 것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소리로 듣고 손으로 만지면 상상하던 상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이미 죽은 자들, 아직 죽지 않은 자들,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병사들과 건물 안에 숨어서 재난이 지나가기를 기도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 모두를 한꺼번에 인식하게 되었다.
직경 100미터 정도 되는 좁은 지역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하나 구분해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의지만으로도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있는 작은 가능성까지 그대로 모두 흡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다달에서도, 카펠트에서도, 언포드에서도.
거인 노예들을 앞세워서 저항의지를 꺾은 후, 도시를 순회하며 살아있는 모든 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가능성을 흡수했다.
가끔은 죽지않고 저항하는 자도 있었다.
작게라도 신비에 접한 자들, 또는 강한 의지를 가진 자들.
대부분 기사였고, 간혹 관리나 일반 시민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가차없이 거인 노예가 쳐 죽였다.
그들이 가진 신의 파편은 평범한 자들이 가진 것과 달랐다.
좀 더 크고, 좀 더 맛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가능성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프리시오 공작이 도망을 친 후에는 저항을 하는 자도 거의 없었다.
거인 노예들은 실력행사를 할 필요도 없어서 나리트의 교자를 메고 다니는 일로 돌아갔을 정도였다.
만나는 자들마다 도망치기에 바빴지만, 도주에 성공한 자는 없었다.
나리트는 눈에 보이는 자들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자들조차도 자신의 인식 범위 내에만 들어오면 모두 죽일 수 있었다.
물론 죽은 자들은 모두 흡수의 대상이 되었다.
진짜로 신이 된 느낌이었다.
인간의 생사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신.
모든 것을 아는 전지를 향해 한 걸음 더 접근한 신.
그런 신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의 뒤를 따라가면서 신의 파편을, 사람들의 작은 가능성까지 모두 수확하느라고 미처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프리시오 공작이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고, 목책을 세운 후에야 추격을 멈추고 흥분을 가라앉혔을 정도였다.
너무나 인간적인 실수였다.
아직은 신이 아니라 신을 흉내 낸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실수이기도 했다.
“나의 주인이시여. 저 앞에 보이는 자들 사이에 프리시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자의 깃발이 보입니다.”
제국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타르바 왕국의 기사가 그에게 와서 고개를 숙이며 보고해왔다.
나리트는 제대로 한번 저항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적을 앞에 두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인망을 잃고 홀로 고립되었던 뱅트손과 달리 프리시오를 지원하러 온 귀족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나리트는 적어도 1만이 넘는 대군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훈련된 기사와 병사들로 1만이다.
그러나 그들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저들을 공격하고 죽여서 모조리 흡수하고 싶었다.
나리트는 신이 된 것 같은 흥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의 군대를 지금 공격하기에는 뒤가 불안했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따라서 맹렬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이 된 것 같은 감정에 취해서 프리시오를 추격하다보니 잊고 있었다.
제국 내에 자신을 위협할만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머리가 식은 나리트는 자신의 한계를 직시했다.
제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있었던 괴물들도 생각해 봤다.
황도에 웅크리고 있었던 조율자.
대륙 북부를 돌아다니던 숲의 현자.
그리고 그자들을 흡수한 것으로 생각되는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까지.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나리트는 자신이 왜 변방의 작은 왕국에 처박혀 있었는지를 상기했다.
두려워서였다.
황도의 조율자나 숲의 현자와 맞부딪치면 분명히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알아서 몸을 사린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신의 길에 올라선 자에게 흡수당하고 싶지 않다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몸을 피해야 했다.
손실한 거인 노예를 보충하려면 천 단위의 인간이 필요했지만, 지금 당장의 미련은 버리기로 했다.
프리시오 공작과의 협상은 나중에 하면 된다.
3개의 도시를 전멸시키고, 공작성에서까지 살아있는 자를 남기지 않았으니 협상의 우위가 누구에게 있을지는 자명했다.
혹시 공작의 권위가 문제라면 내가 알아서 포로를 잡아갈테니 당신은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면 그만이다.
나리트는 결단을 내렸다.
“돌아간다.”
나리트의 명령을 기다리던 자들은 예상외의 명령에 당황했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나리트의 안색을 살핀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리트의 거인 노예들은 감정없는 얼굴로 명령에 따랐다.
거인 노예들은 나리트의 교자를 어깨에 메고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리적거리는 자들은 걷어차거나 밟아버리기도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나리트의 명령 뿐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자들이 다급하게 나리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리트를 앞세운 일행은 이곳까지 온 속력보다 더 빠르게 달려갔다.
타르바의 기사들이 탄 말들 중에는 거인 노예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로 쳐지는 것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제국의 경계를 넘어서 타르바 왕국으로 돌아갔다.
*
유감스럽지만 나는 한발 늦었다.
내가 프리시오 공작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타르바 왕국의 일행이 모습을 감춘 후였다.
프리시오 공작군은 아직 경계 태세를 풀지 않은 상태였지만, 병사들의 분위기는 이제는 살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살짝 풀어진 병사들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정보를 얻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타르바 왕국군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내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갑자기 후퇴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낙오병을 내버려 두고 떠날 정도로 서둘러서 포로를 몇 명 잡기까지 했다고 한다.
좀 더 돌아다녔지만 특별히 들을만한 정보는 없었다.
단지 예상보다 타르바 왕국에 대한 공포가 심각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시오 공작군은 움츠려 들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프리시오 공작군이 목책을 세운 한쪽에서는 기사와 기마 용병으로 구성된 정찰대가 연달아 달려나갔고, 다른 쪽으로는 뒤늦게 합류하는 귀족의 병력이 몰려왔다.
프리시오 공작은 휘하의 귀족들로부터 여전히 충성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얼마 후 나는 정찰을 나가는 것처럼 해서 호위기사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다시 추격을 나설 준비를 마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프리시오 공작은 다른 선제후들과 달리 살아남을 것 같군.”
“칼마르와는 멀리 있어서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오히려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걸세.”
“......”
내 말이 조금 위험하게 들렸는지 호위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프리시오 공작을 이용해서 귀족연합자치령의 다른 귀족들을 견제하겠다는 뜻이 엿보이니 일단은 입조심을 하는 것이다.
칼마르의 호위기사는 지구에서의 경호원과는 다르다.
이들은 칼마르 백작령의 예비 관리이고, 소귀족이기도 하다.
내 속마음을 칼마르의 유력자들에게 은근히 퍼뜨려 줄만한 입이 되어줄 것이다.
이들도 그런 내 뜻을 알 것이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당장은 타르바 왕국에서 온 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급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
“타르바 왕국군을 뒤쫓겠다.”
“예. 백작 각하.”
얼마 전에 3백 명이 약간 넘는 기마부대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거기다 교자를 메고 다니는 거인 용병들이 넷이나 있다는 증언도 있다.
이런 일행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교자와 기마부대가 함께 이동하려면 제대로 된 길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길을 타고, 강을 따라 움직이고 하면서 흔적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새들을 불러서 그들을 추격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흔적이 너무 분명하니 금방 따라잡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나는 제국의 경계에 도달할 때까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추격에 실패한 것이다.
아무리 타르바 왕국군 전원이 말을 탔고 거인 용병이 달리는 속력도 말보다 빠르다고 하지만, 이것은 빨라도 너무 빠른 도주였다.
마치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을 알고 정신없이 도망친 것 같은 모양새다.
제국의 경계가 되는 작은 실개천을 앞에 둔 나는 살짝 망설였다.
제국 밖의 왕국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쫓는 자들은 프리시오 공작의 권위는 물론 군대까지 박살냈다.
제대로 확인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나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두 명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은 타르바 왕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자였다.
그는 추격한 지 하루가 지난 후 확신을 가지고 내게 보고해왔다.
“아무래도 타르바 왕국의 신전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신전? 여기 사람들은 신을 믿나?”
“그렇습니다. 제국에서야 신이 농담의 대상이지만, 일부 왕국은 신정국가 다름없습니다. 이곳 타르바 왕국 역시 신이 존재하고 신전에 산다고 믿는 모양이더군요.”
“신이 신전에 산다고? 세르케티처럼 추상적인 존재를 모시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신이 산다고?”
“타르바 사람들은 몇 대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있었던 국왕이 신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개념을 신격화한 세르케티와 달리 타르바 왕국은 과거의 국왕을 국가신 아니면 지역신으로 삼은 모양이다.
“신전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이대로라면 내일이면 도착합니다.”
내일이면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자를 만나게 될 모양이다.
이번에 만나게 될 자는 어떤 자일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