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죽음의 원인
나는 다급하게 리네아에게로 향했다.
리네아의 옆에는 사라 남작 부인과 마스터 요한까지 와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개의 문서를 앞에 두고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에게 문제가 생겼다니, 무슨 일입니까?”
“프리시오 공작이 공작령을 떠나서 헤필드 방면으로 도주했다는 첩보가 조금 전에 들어왔습니다. 지금도 전서구가 계속 도착하는 중입니다.”
사라 남작 부인은 내게 암호문을 풀어서 해독한 후 정리한 보고서를 건네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프리시오 공작에게 일어난 일은 너무 뜬금없는 일이었다.
이런 큰일에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무엇인가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헤필드라면 공작령의 가장 외곽 아닙니까? 전에 우리가 파괴한 이후로 아직 복구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곳으로 도주를 했다니. 설마 내전입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자식들 간의 갈등이 심각했거든요. 하지만 내전이 아니라 외침인 것 같습니다. 타르바 왕국이 침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합니다.”
“타르바 왕국이라고요?”
내 의문에 사라 남작 부인은 자신도 내 의문에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타르바 왕국은 일개 백작령만도 못한 체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르바 왕국의 침입으로 프리시오 공작이 도주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내민 보고서를 보니 다르게 해석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타르바 왕국이 이번 일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보고서에는 불과 3~4백 명으로 추산되는 타르바 왕국의 병력에 의해 3개의 도시가 전멸당했고, 공작성 역시 점령당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저런 내용 모두를 한 사람이 보낸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이 보낸,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정보를 짜집기해서 말이 되게 조합해놓은 것이 저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첩보를 보낸 현지인들을 믿을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들이 무엇인가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무리 약속된 표식이 포함된 첩보 문서라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은 정말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도시 3개가 전멸했는데 상대는 불과 수백에 불과하다는 것이 말이 되나.
······잠깐
전멸?
도시를 지키던 병력의 전멸이 아니라 도시가 전멸?
“도시가 전멸했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설마 도시 안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은 아닐 테고, 도시의 방어병력이 전멸했다는 말입니까?”
“그게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암호문을 해독한 문서를 주십시오. 정리해 놓은 보고서 말고.”
잠시 후 전서구가 날라온 암호문을 해독한 문서들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 내용을 보니 상황이 좀 더 명확해졌다.
‘다달이 전멸했다는 소문이 돈다. 카펠트의 시장이 시민병까지 소집했다.’
‘카펠트에서 오기로 한 상인이 오지 않는다. 병사들이 도망도 치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거인들이 타르바의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을 용병으로부터 들었다. 최소 3백 명. 용병은 언포드에서 공작령 밖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물은 후 해가 지는데도 불구하고 곧장 출발했다.’
‘공작성에서 헤필드로 가는 대로를 2백 명이 넘는 기마부대가 빠르게 이동했다. 그중에는 프리시오 공작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현지의 협력자들은 건조하게 자신이 들은 말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이나 헛소리로 보이지는 않았다.
협력자들이 실수했다는 가능성은 접어두었다.
나는 마지막 해독 문서를 손에 들었다.
‘거인들이 성 밖의 병사들을 패배시켰다. 거인들이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난입했다. 저항하는 자들이 없다.’
프리시오 공작은 비겁한 자가 아니다.
비겁한 자였으면 공작이 되지도 못했겠지.
그런데 자신의 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고?
성에 난입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문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나무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음이 내 신경을 달래주었다.
제국의 2/3는 귀족연합자치령이라는 틀 속에 묶어두었으니 당분간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1/3을 대표하는 프리시오 공작은 우리의 적이 되었다.
그는 발밑의 리딕슨 공작을 합병해 버리고, 옆에서 껄끄럽게 구는 변경백들은 토벌했다.
바닷길을 확보하려고, 섬나라들을 공격한 것은 전략적으로 옳은 수순이었다.
심지어 제국 밖에 있는 왕국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결혼 동맹을 맺기까지 했다.
프리시오 공작은 싸울 의지가 충만했다.
그와 우리 사이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한 귀족들 중 그것을 모르는 자는 없다.
나는 프리시오 공작과 귀족연합자치령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첫단계는 귀족연합자치령에 속한 귀족들을 지키거나 뺏는 전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프리시오 공작은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신의 강함을, 유리함을 우리쪽 귀족들에게 강조해야 할 상황이란 말이다.
그런데 공작성에서 도망을 쳐?
정말 죽음이 코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아니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쳐도 공작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판인데 도망을 친다?
공작성에 그대로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나는 뱅트손령에서 죽인 거인 용병을 생각했다.
그런 자들이 무리지어 온다면?
하지만 누가 거인 용병을 식물처럼 재배해서 키워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흔할 리가?
나는 첩보 문서를 다시 잡았다.
‘거인들이 타르바의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을 용병으로부터 들었다. 최소 3백 명.’
거인들, 기사들, 최소 3백 명.
미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수백에 달하는 거인과 기사들의 혼합 병력이라면?
그런데 그런 숫자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프리시오 공작조차 도망치게 만들 정도였다면 새롭게 등장한 위험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이제는 후방에 머물러야 한다고 거듭 주의를 들었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리네아가 먼저 내 마음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왔다.
“이곳은 마스터 요한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걱정이군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험할 정도로 내모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보며 자신있게 공언했다.
“나는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조사를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강하지. 스케티를 죽이고 뱅트손을 두려움에 떨게 한 거인 용병조차 내 손 아래에서는 어린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어린애가 몇 명 몰려다니는 모양인데 그래봐야 내게는 별것 아닙니다. 그래도 그대가 걱정하니 위험하지 않게 다니겠습니다. 혹시나 감당하지 못하겠다 싶으면 도망을 치지요.”
“명예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마세요. 나는 명예가 아니라 당신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돌아오십시오.”
“물론입니다. 이곳이 내 집입니다.”
지구에서의 일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
마스터 요한이 붙여준 두 명의 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곧장 프리시오의 영역으로 향했다.
육지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고,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전투가 끝난 지역을 돌아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리시오 공작을 지원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위험요소를 판단하려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는 다른 곳을 들르지도 않고 곧장 움직여서 과거 리딕슨 공작령에 속했던 항구도시인 포힐에 도착했다.
다행히 바람이 좋아서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포힐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일을 하기 보다는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심지어 접안하는 배를 검문하고 세금을 걷어야 할 관리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뒤늦게 병사 몇 명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용돈을 좀 받아 가자는 것뿐이었다.
상선을 몰지만 동시에 사라 남작 부인의 일도 종종 돕는다는 선장은 병사들에게 요령있게 달라붙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인사를 하며 주머니에 슬쩍 은화를 넣어주었다.
숙련된 솜씨가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금방 얼굴이 풀려서 선장이 내민 문서에 도장을 쾅쾅 찍어주었다.
“고생들 하십니다. 그런데 저번에 본 관리분은 다른 곳에 가셨나 보지요?”
“그 작자, 도망쳤수다.”
“예?”
“타르바의 괴물들이 포힐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모습을 감춘 것을 보면 도망친 거지. 뭐.”
“타르바의 괴물들이라고요?”
“타르바에서 온 거인들이 있수다. 그놈들이 지나간 곳은 사람들이 다 죽는다는 거야. 도망간 그 작자는 다달로 시체를 치우려고 지원을 갔다 왔는데 사람이 겁쟁이가 돼가지고 왔더라고. 다달이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고 하니까 무서워하는 것은 이해가 가.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까지 치다니! 도망친 관리가 한둘이 아니라서 시장이 지랄을 했다는 말이 있더라고. 괴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을 쳐버리겠다나.”
“하하. 진짜로 목을 자르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말씀일 겁니다.”
“아니여.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자네들도 일을 마치고 얼른 떠나는 것이 좋을거여.”
몇 개의 은화는 병사들의 입을 열기에 충분했다.
이곳저곳에 연줄이 있는 관리와 달리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는 병사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는 곧장 공작성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살핀 공작령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도시는 몇 개 되지 않았지만, 공작성이 전멸하고 프리시오 공작이 도주한 것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치안 상태가 엉망이었다.
포힐에서 공작성으로 가는 동안 마주친 도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조건 하루에 최소 세 번은 만난다고 봐야 했다.
종류도 이번 기회에 한몫 잡아보려고 나온 근처 마을 주민부터 탈영병까지 다양했다.
공작성도 엉망진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문은 박살이 났고, 사방에 널린 시체는 치우지도 못한 상태였다.
적어도 1만에 달했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죽은 것이다.
부패한 시체에서 풍기는 냄새는 사람을 죽일 정도였다.
나는 몇 명의 시체를 살펴본 후 공작성을 떠났다.
부패하지 않은 시체를 살펴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헤필드 방면으로 도주했다던 프리시오 공작은 헤필드에서도 물러난 상태였다.
나는 헤필드에 도착해서야 부패하지 않은 시체들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경들도 뭐가 문제인지 알겠지?”
“예. 백작 각하. 시체에 상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독은 아니야. 독에 중독되어서 죽을 정도면 겉으로 흔적이 나타날 수밖에 없네. 게다가 이건.”
나는 헤필드의 거리 한쪽에서 모여서 죽어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 주변에는 도망치다가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냥 쓰러져서 죽은 것 같네. 누군가를 막으려고 방진을 짜고 있다가 그대로 다 쓰러져서 죽고, 그 모습을 보고 뒤에 있던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죽고.”
내 말에 호위기사들 역시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칼마르에서 벌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나는 타르바 왕국에서 왔다는 자들을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