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서로의 이익이 충돌할 때
그중 하나는 공작까지 관련된 영지의 계승 문제였다.
“트리니 영지에 대한 권리는 영주이신 온굴손 남작의 장남인 제게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당연한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친척들은 물론 영지의 관리들까지 모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께서는 부디 정의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온굴손 남작의 장남인 로피손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답게 태도도 어조도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유감스럽지만 트리니의 영주였던 온굴손 남작은 돌아가신 막시밀리안 공작 전하의 명령에 따라 임시로 트리니를 관리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로피손 경 역시 선친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여기에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자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저는 막시밀리안 공작 전하의 가신들을 대표하여 트리니를 공작 가문으로 회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가신들이 연명해서 서명한 문서를 흔들며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자는 피그슨이라는 남작이었다.
비중은 별로 없는 자였지만, 아직도 막시밀리안 공작 가문을 둘러싸고 있는 귀족들 중 그나마 인망이 좀 있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트리니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로피손이나 피그슨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자들이 트리니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트리니 영지에 대한 권리는 저희 대검형제단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거 막시밀리안 전하께서 직접 서명하신 문서로 저희 대검행제단은 피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증거로 여기에 문서를 가져왔습니다.”
대검형제단은 제국에 숱하게 있는 각종 단체들 중 하나다.
검술을 익히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인 학술 단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본질은 용병대다.
그것도 기사급의 고급 용병이 잔뜩 모여있는 용병대 말이다.
지금 대검형제단의 대표로 와 있는 스로비타 역시 보통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이 부족했던 바르거가 영지를 미끼로 끌어들였던 자들이다.
“무슨 헛소리야! 바르거라니! 그자는 반역자였어!”
“그자는 막시밀리안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가계도에서 이름을 지웠다.”
로피손과 피그슨이 동시에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은 둘 다 글렌 공작에게 암살당한 막시밀리안 공작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행방불명된 바르거와는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대검형제단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내가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벌써 칼을 뽑아도 뽑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 뒤에 시립하고 있던 자들은 벌써부터 들썩들썩했다.
허리에 손이 가 있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열을 받고 있으니 아무래도 스팀을 좀 빼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서 뭐가 터져도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앞의 원목 테이블을 잡아뜯어서 그들 앞으로 툭하고 던졌다.
상판의 두께가 한뼘이 넘는 원목 테이블을 찰흙이라도 떼어내듯 한움큼씩 떼어내서 하나하나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 앞으로 던져 주었다.
툭. 툭. 툭.
손으로 잡아 뜯은 3개의 나무토막이 하나씩 그들의 눈앞에 떨어졌다.
쇠와 비견될 정도로 단단하다는 흑철목 상판이다.
도끼로 쳐도 흠집이나 조금 나고 만다는 나무를 손으로 잡아
뜯은 것이다.
내 앞에서까지 고함을 질러대던 3명의 대표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얼굴은 붉고, 호흡은 거칠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다들 가져온 문서를 제출하게.”
나를 돕는 서기관들이 피그슨과 스로비타가 내미는 문서를 내게 가져왔다.
내용은 그들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조사한 것과도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로피손 경은 내게 제출할 문서가 없나?”
“문서는 제게 없습니다만, 정의는 제게 있습니다.”
나는 원목테이블에서 나무를 한주먹 다시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로피손의 앞으로 집어던졌다.
꽝!
화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로피손의 앞에 있던 테이블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돌로 된 바닥에 부딪힌 나무토막은 박살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바닥돌을 부수며 박혀 버렸다.
흙철목이 철처럼 단단하다는 평판은 거짓이 아니었다.
“로피손 경. 정의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네. 자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로피손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로피손이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지는 얼굴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나무가 나무를 뚫고 돌로 된 바닥에 박혔다.
만약 저 나무가 자신에게 날아왔다면?
그런 생각일 것이다.
로피손은 손을 떨고 있었다..
“로피손 경의 선친이신 온굴손 남작이 트리니의 영주가 된 것이 언제인가?”
“5년 전입니다.”
“그 전의 영주는 로피손 경의 조부가 되시나?”
“......아닙니다.”
“아직도 로피손 경에게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선친께서 트리니의 영주이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지위가 세습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백작 각하께서는 귀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저는 백작 각하의 약속에 기대어 선친의 지위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백작 각하께서 저를 지지하신다면 저와 제 후손의 충성은 영원히 칼마르를 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로피손은 나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미숙하고 성급했다.
일의 순서도, 충성의 방향도 틀렸다.
만약 로피손이 선친의 동료들을 먼저 설득하고, 내가 아닌 막시밀리안 가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면 선친의 영지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그의 실낱같은 가능성도 사라졌다.
그러나 로피손은 자신이 한 실수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경고할 필요를 느꼈다.
“로피손 경. 기득권은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기득권인거요. 만약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것은 기득권이 아니오. 차라리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설사 내가 경의 손을 들어주어도 경은 영지를 유지하지 못해. 운이 좋으면 침대에서 조용히 죽을 거고, 운이 나쁘면 들판에서 죽겠지. 여기 두 분은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요.”
내 말에 로피손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분노인지 충격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피그슨 경.”
“예. 백작 각하.”
“트리니의 영주를 누구로 삼을지 결정해서 한 달 내로 다시 오도록 하시오. 만약 그 기간 내에 결정을 할 수 없다면 내 멋대로 할 거요. 글렌 공작 계열의 귀족에게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흘려듣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피그슨은 반색을 하며 일어서서 연이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피그슨이 기뻐하는 것은 여기까지일 것이다.
내 눈에는 누구를 영주로 삼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막시밀리안 가문의 역량이 깎여 나갈 것이 뻔히 보였다.
궁정 쿠데타와 바르거의 실종으로 막시밀리안 가문은 더이상 공작 가문다운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큰 이익을 앞에 두고 따르는 자들을 강제하기는커녕 중재하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 분명했다.
트리니의 영주가 된 자 이외에는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막시밀리안 가문에서 함부로 트리니에 간섭을 하려고 든다면 새롭게 트리니의 영주가 된 자조차 불만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불화를 던져 준 셈이다.
“그럼 로피손 경과 피그슨 경은 돌아가도록 하시오. 피그슨 경. 한 달, 잊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그리고 스로비타 경은 잠깐 나와 이야기를 좀 합시다.”
결과를 얻은 두 무리의 사람들은 금방 사라졌다.
남은 자들은 대검형제단의 대표들뿐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짝 풀려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로비타는 나와 독대를 하게 되자 당장이라도 전투에 뛰어들 것처럼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준비태세였다.
내가 던지는 첫마디의 충격을 버티려면 풀어져 있는 것보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 더 낫기는 할 거다.
“바르거는 잘 있나?”
스로비타는 주먹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았다.
“아, 아닙니다. 뭔가 잘못아신 것이.”
찔러보니 알겠다.
이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르거를 보호하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락은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르거를 장검형제단의 본부 근처에서 목격한 자가 있다는데 어디서 약을 파나.
“그래? 그러면 그렇다고 해 두지.”
이 말은 어떻게 들어도 내가 너희들 속을 다 안다는 말로 들린다.
스로비타 역시 나와 같은 의견인지 눈동자가 복잡하게 굴러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스로비타 경에게 분명히 말해 두겠네. 바르거가 무엇을 하든지 칼마르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다시 막시밀리안 공작이 되고 싶다면 그러라고 해. 나는 끼어들 생각까지는 없으니까.”
이 말이 너희들 멋대로 날뛰라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스로비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듣는다.
이 말은 협박이다.
칼마르 백작령은 귀족연합자치령 전체에 걸쳐 상행을 한다.
칼마르 백작령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상단의 숫자가 다른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상단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을 정도라서 어디를 가든 칼마르 백작령에 근거지를 둔 상단과 만날 수 있을 정도다.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상단은 있는 것이다.
이러면 귀족연합자치령에서 칼마르 백작령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한쪽 눈을 감고 모른 척 지나가 줄 수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책임을 물으러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
“그분과는 거래 관계였을 뿐입니다. 단지 후불조건이었던터라 억울한 마음에 백작님의 자비를 청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지의 주인이 정해졌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나 역시 관대한 마음을 품게 되지. 최근에 영지전을 계획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일할 생각이 있나?”
“용역을 제공했는데도 대금을 떼인 터라 파산을 면하려면 어떤 일이든지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연결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가서 기다리게. 사람을 보내지.”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스로비타는 밝은 얼굴로 떠났다.
이번 면담이 나름대로는 성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면담을 통해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인 여러 단체들에 대해 철저하게 억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
공개 단체든 비밀 단체든 가릴 것 없이 영지를 뛰어 넘어서 규모를 키우거나 연대를 맺는 것은 절대로 용납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일개 용병대나 다름 없는 단체조차 몰락한 공작을 등에 업고서 뭔가 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그런 단체가 규모까지 크다면?
사회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조직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동등하지 않은 세상이라고 해도 자칫하면 감당할 수 없는 조직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 되어 가는 나로서는 피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세상은 내게 그런 먼 미래에 대한 궁리를 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프리시오 공작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첩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