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36화 (236/248)
  • 236. 영지의 주인

    쓰러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알더스 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명예로운 돌격을 감행한 20명의 기사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아무리 타고난 강골에 많은 훈련을 해왔다고 해도, 자신의 몸무게가 10배로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면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다.

    10kg짜리 갑옷이 100kg으로 느껴질 것이고, 2kg짜리 장검이 20kg으로 느껴진다.

    100kg인 몸은 1톤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인족과 씨름을 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알더스는 교자 위의 젊은 남자가 이런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라고 확신했다.

    타르바에 속한 자들은 다들 멀쩡했기 때문이다.

    신비에 접한 자일까?

    알더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익힌 무술이 덧없음을 느꼈다.

    땀을 흘리며 노력한 시간이 허무하기만 했다.

    신비에 접한 자들은 광대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든 자 중에서도 기사가 있고, 농민병이 있는 것처럼 신비에 접한 자들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 앞에서 자신들을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자는 신비에 접한 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자임이 분명했다.

    저런 자 앞에서는 강제로 끌어다가 창을 들리고 내모는 노예병이나 오랜 시간 훈련을 거듭한 기사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타르바의 병사 하나가 쓰러져 있는 기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목에 칼을 찔러넣었다.

    기사들은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동료들을 보며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전혀 저항같지가 않았다.

    그들을 누르는 힘이 너무 강해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욕을 좀 하고, 울부짖고, 도망치려고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다.

    알더스는 자신의 주변에서 하나하나 죽어가는 기사들을 보며 절망해야 했다.

    기사들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병사의 칼은 신분도 지위도 가리지 않았다.

    *

    나리트를 공격하려고 성에서 말을 타고 나온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명령을 받은 병사 하나가 칼로 모조리 찔러 죽인 것이다.

    물론 나리트는 병사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다 눌러 죽일 수 있었다.

    인간의 육체는 강하면서도 약한 면이 있어서 적당한 부위를 좀 더 세게 누른다면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부의 장기가 망가져서 그냥 내버려 두어도 천천히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리트는 자신의 힘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효율의 문제였다.

    수많은 인간을 죽여가면서 끌어모은 기운보다 더 많은 기운을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만약 자신보다 강한 자가 가까이 온다면 아주 빠르게 도망가야 하기 때문이다.

    죽은 기사들에게서 취할 것을 취한 나리트의 관심은 다시 성으로 향했다.

    성안이 진짜였다.

    나리트의 기대대로 성 밖에서 벌어진 전투는 금방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기사들이 몰살을 당하자 성안에서 더 이상 병력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제는 성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너희들도 가라. 가서 성문을 부숴!”

    지금까지 교자를 짊어지고 있던 두 명의 거인 노예도 나리트의 명령에 따라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리트의 교자는 대기하고 있던 16명의 건장한 병사들이 대신 넘겨받았다.

    새로이 전장에 뛰어든 거인 노예들은 곧장 성문으로 달렸다.

    하나도 지치지 않은 생생한 전투마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벽 위에서는 계속 활을 쏘고 대형 쇠뇌살을 날렸지만, 거인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화살이든 대형 볼트든 모조리 철판 갑옷에 맞은 것처럼 튕져겨 나갔다.

    성벽 밖에 전개해둔 병력 역시 손을 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개의 천인대 중 절반은 이미 거인 노예들에게 맞아 죽었고, 나머지 절반 역시 도망치느라고 급급해서 새로이 전장에 뛰어든 거인 노예를 신경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사냥을 피해 도망치는 초식동물 같은 처지였다.

    거인 노예들이 노리는 성문은 이미 한참 전에 굳게 닫힌 후였다.

    알더스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내보낸 후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곧장 닫아 버린 것이다 .

    그러나 굳게 닫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였다.

    물론 거인족이나 숲오우거의 관점에서도 굳게 닫혀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인 노예들의 관점에서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성에 달린 성문은 얇은 나무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비정상적인 힘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들의 힘은 생명체의 근육에서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래서 충차의 공격에도 수십 번은 견뎌내고, 투석기의 돌덩어리가 타격을 해도 견디고, 거인족의 도끼와 숲오우거의 힘에서도 버틸 수 있는 성문이 단숨에 박살이 났다.

    거인 노예가 달려가서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첫 번째 타격이었다.

    그 타격은 단순히 무게와 속도로 이루어진 타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리트의 힘이 포함된 타격이었다.

    가장 바깥에 있던 성문이 박살나고 성문을 고정하기 위해 연결해 놓은 성벽까지 일부 무너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성문 역시 다음 거인 노예가 달라붙어서 순식간에 부숴버렸다.

    다른 도시들의 성문들처럼 공작성의 성문 역시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두 명의 거인 노예가 먼저 성안으로 뛰어들었고, 약간 늦게 도착한 두 명의 거인 노예는 사람들이 드나들기 편하게 성문 주변을 정리한 후 먼저 간 자들을 따라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나리트의 일행은 정리가 끝난 후에야 그 뒤를 따랐다.

    *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프리시오의 공작성은 원래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적대적인 공작들은 물론 남해의 섬나라에 이르기까지 주변 세력과 연달아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자가 프리시오였다.

    당연히 공작성에는 기습을 상정해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병력이 적지 않았다.

    특히, 프리시오 공작이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한 후로는 만약을 대비해서 믿을만한 기사 집단은 물론 대량의 물자까지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지금 당장 아무런 준비없이 공성전을 벌여도 1년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전투를 상정한 준비였다.

    거인족이 아르보그 공작군과 함께 연합해서 공격해 오는 것?

    그 정도가 상상력의 상한선이었다.

    혼자서 천인대를 몰살시키고, 맨몸으로 성문을 부수는 적이라니!

    애초에 그런 전투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누가 그런 전투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의 기사들은 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리시오는 섬나라들과 바다에서 싸우면서 기존의 선입견을 많이 버리게 되었다.

    바람을 조정해서 함대를 좌지우지하고 승패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지는데 병사의 숫자로만 전력을 평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거인 용병의 등장 이후였다.

    거인 용병이 활약한 전투보고서를 읽으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프리시오는 성밖에 준비해 놓은 2천에 달하는 병력이 일방적으로 죽어나갈 때 이미 후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인 용병이 4명이라니!

    이겨도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았다.

    게다가 전투를 꼭 해야 하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명예롭게 죽어야 할 때가 있고, 전력을 보존해서 후일을 도모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번은 프리시오가 보기에 명백하게 후자였다.

    호위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얼마 안되는 숫자의 병사.

    공격을 하는 자도 거인 용병 넷 뿐.

    후위에 추가로 따라오는 병사도 없었다.

    이런 구성이면 적어도 점령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아니면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이곳이 황도로 지정한 자신의 근거지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후퇴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알더스가 자살 공격을 자원했을 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투를 지속하든 후퇴를 하든 알더스의 희생을 명분으로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리시오의 희망은 그냥 희망으로 끝나버렸다.

    프리시오는 알더스가 죽어가는 것을 본 순간 명분 싸움이 아니라 시간 싸움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알더스는 교자를 호위하고 있던 타르바의 병사들 근처까지 접근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동료 기사들과 함께 죽었다.

    프리시오는 알더스가 왜 말과 함께 바닥에서 엎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죽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 일이 곧 자신들에게도 닥치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거인 용병을 앞세운 저 이상한 자가 들어오기 전에 공작성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즉시 반대편에 있는 쪽문을 향해 도주했다.

    그렇다.

    후퇴가 아니라 도주였다.

    주변에 있던 자들만 데리고 즉시 공작성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가족은 물론 가신들조차 챙기지 않았다.

    챙긴 사람은 죽은 둘째가 부탁한 손자 한명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도주하는 길에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무시하고 떠났을 것이다.

    물론 손자와 같이 있던 타르바의 왕녀와 왕제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일행이 쪽문을 나설 때 거대한 폭음이 들렸다.

    성문이 박살나는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프리시오는 채찍으로 말을 후려쳤다.

    더 빠르게 달려야 했다.

    *

    나리트는 죽은 자들 사이를 거닐었다.

    그의 거인 노예들이 죽인 자들이었다.

    밟아 죽이고, 던져 죽이고, 거인 노예의 무기에 맞아서 박살난 시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제대로 형체를 갖추고 있지도 못한 시체였지만, 나리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는 상관없었다.

    나리트는 먼지처럼 미세한 신의 파편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흡수해도 부족하기만 했다.

    밀가루 몇 개를 모아야 빵 하나를 만들 수 있을까?

    나리트는 좀 더 많은 인간을 필요로 했다.

    “주인이시여. 프리시오는 도주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족과 기사, 영지민까지 내버려두고 도망을 쳤다고?”

    “도주하는 그를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한 자 답군.”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고 외부 세력과 동맹까지 맺은 자였다.

    그런 자라면 아무리 이익으로 설득한다고 해도 몇천 명이나 되는 자신의 백성을 쉽게 내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거인 노예를 또 내어주기는 싫었다.

    그래서 대화를 쉽게 하려고 협박을 좀 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프리시오란 자의 대가 좀 약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리트는 걸음을 멈췄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것.

    협상으로 데려가는 것이나 납치를 하는 것이나 데려가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이 정도로 대가 약한 자라면 보복은 없을 것 같은데?

    나리트는 협박으로 도시를 하나 정도 더 쓸어버리는 것은 어떨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

    나는 귀족연합자치령의 오래된 기득권 세력 중 하나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