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35화 (235/248)
  • 235. 위험에 처한 프리시오

    나리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진짜 신이 아니다.

    자급자족조차 안 되는 작은 왕국에서 신이라고 떠받들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숭배에 취해서 자신이 진짜 신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지도 않았다.

    물론 미래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미친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낮지도 않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손자의 손자인 타르바 국왕에게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의 고민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한때는 자신 역시 이곳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거인 노예를 하나 보내준 것도 그래서였다.

    제국의 분열을 틈타 영역을 확장하려는 국왕의 노력에 한 손 거든 것이다.

    제국의 땅은 양이나 키우는 이런 척박한 땅과는 다른 곳이었으니까.

    제국의 백작만 되어도 타르바 왕국 정도는 눈 아래로 내려다본다.

    제국의 공작이 나서면 철제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목민의 왕국 따위는 단숨에 쓸려나갈 것이다.

    제국이 서쪽 경계 너머의 왕국들을 지금까지 내버려 둔 것은 그럴 만한 이익이 없기 때문이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열성적인 신앙으로 눈과 귀를 가려놓은 타르바 왕국의 신민이라면 모를까 타르바의 귀족만 되어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 프리시오 공작측에서 거인 노예를 추가로 요청했을 때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제국에도 자신과 같은 자들이 여럿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들 중 하나에게 죽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랜 시간과 많은 생명을 들인 수고 때문에 분노하기는 했지만, 지난 일에 매여서 화를 내고만 있는 것은 그답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갈 계획이었다.

    노예를 잃은 대가를 프리시오 공작에게 받아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쓸만한 기사 10명과 튼튼한 남녀 2천 명 정도면 대가로는 적당했다.

    프리시오 공작을 찔러보고 더 받아낼 수 있으면 더 받아내는 것도 괜찮았다.

    *

    타르바 왕국과 제국 사이의 경계는 실개천 같은 작은 강이었다.

    그냥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고 수량도 보잘것없었다.

    건기가 되면 말라서 바닥이 드러날 정도였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곳에는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군대는 대도시 근방이나 방어를 위해 유용한 장소에 주둔하는 것이지 국가 간의 경계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와 민간인을 합쳐서 수백 명이나 되는 숫자가 국경을 지나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야생 동물이나 멀리서 몸을 숨기고 무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지켜볼 뿐이었다.

    타르바 왕국의 사절단은 3백 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대부분 유목민 특유의 경기병이었고, 일부는 기사 계급이었다.

    행렬의 중심에는 4명의 거인이 어깨에 메고 있는 거대한 교자가 위치했다.

    그리고 교자 위에는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자 하나가 교자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대단해 보이는 행렬이었다.

    젊은 남자가 손뼉을 쳤다.

    순간 행렬이 멈췄다.

    별로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멀리까지도 명확하게 들리는 손뼉소리였다.

    행렬의 가장 앞과 가장 뒤에 있는 사람조차 바로 귀옆에서 손뼉을 친 것처럼 들을 수 있었다.

    젊은 남자, 나리트는 교자에서 일어섰다.

    잠시 사방을 이리저리 노려보니 믿을 수 없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느껴지지 않는다. 황도의 조율자도 숲의 현자도 느껴지지 않아.”

    나리트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던 자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리트가 제국의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척박한 타르바 왕국에 처박혀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신이 되는 여정에 오른 자들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영역을 선포하고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자들을 피하는 것은 간단했다.

    신이 되는 여정에 오른 자가 타르바 왕국의 경계선 안에 들어오면 단숨에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자신 역시 다른 자의 영역에 들어가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덕분에 다른 자들을 피해서 도망치려고 하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내 노예를 죽인 자가 그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어?”

    나리트는 당혹감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제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은 채 신의 파편을 모으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제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을 리는 없다.

    제국에는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고 흡수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리트는 즉시 자리에 앉아서 조금씩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숨기 위해 억제했던 그의 존재감이 프리시오 공작령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까지 자신이 피해다닌 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제국의 남쪽 끝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잘것없는 놈들 몇이 제국의 중부와 북부에도 웅크리고 있지만 그들은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제국 남쪽 끝에 있는 자가 핵심이었다 .

    내 노예를 죽인 자가 윌리엄이라고 했던가?

    제국 남쪽에 있는 칼마르의 백작?

    아마 그자가 맞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멀리 있는 자였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출발해도 많은 시간이 걸릴 정도로 먼 거리였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럴 때 포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자.”

    “국경도시인 다달이 가장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프리시오에게 충성하는 병력이 주둔 중입니다. 숫자는 대략 2천 명 정도입니다.”

    나리트는 행렬을 지휘하던 기사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주둔한 병사가 2천이니, 거주하는 자들까지 합치면 만 명은 넘길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다.

    “그래. 그곳으로 가자.”

    프리시오 공작령의 중심으로 향하던 행렬의 방향이 바뀌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다달이었다.

    *

    과거에 프리시오 공작령이라고 불리던 곳은 현재 프리시오 황제령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프리시오 공작령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심지어 기사나 귀족들조차도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입에 익은대로 공작령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급해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타르바의 병력이 공작령의 경계를 넘자마자 공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달, 카펠트, 언포드가 모두 파괴당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도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천인대 셋이 전멸했습니다!”

    “지원을 위해 출동한 기사단이 몰살당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전령입니다!”

    전령이 연이어 뛰어들어오고, 다급하게 자신이 본 것을 보고해 왔다.

    그러나 프리시오는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타르바 왕국군의 공격이 너무 갑작스럽고 철저해서 공격을 알아챈 것이 불과 세시간 전이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누가 공격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지금 공격을 하고 있는 자들이 타르바 왕국군이 맞나? 확실해?”

    프리시오의 첫째인 레빌은 파랗게 질려있는 둘째 알더스를 노려보며 전령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렇습니다. 레빌 경. 타르바의 거인 용병도 4명이나 날뛰고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이런 미친놈들이! 지원을 요청했더니 뒤통수를 쳐!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레빌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려 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프리시오는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알더스의 사저로 가서 타르바의 왕녀와 왕제를 끌고 와라. 나머지는 감옥에 쳐넣어!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아버님!”

    “정신차려! 타르바가 배신했다.”

    알더스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파랗게 질려 있는 표정이었지만, 이제는 체념하는 모습이었다.

    “외성문은 닫았지?”

    “예. 공작 전하.”

    “성 밖에는?”

    “이미 천인대 두개가 진을 쳤습니다.”

    성의 수비대장은 프리시오의 질문에 지체없이 대답했다.

    전령이 성문을 통과했을 때부터 수비 준비는 시작한 참이었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부족한 것이 전쟁 준비라지만, 어이없게 성을 내줄 정도로 미흡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프리시오의 군대는 현재 제국 내에 존재하는 여러 군사 집단 중에서도 상위급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실전 경험도 쌓았고,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서 숙련병을 대량으로 잃은 적도 없었다.

    어떤 전투에 내보내도 기본은 한다고 자신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대장의 호언으로부터 한시간도 지나기 전에 성벽 앞에서 벌어진 전투는 지금까지 프리시오가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전투였다.

    아니, 이것은 전투라기 보다는 학살에 더 가까웠다..

    병사들이 방진을 짜서 서로 대치하며 밀고 밀리는 사이에 기사들이 빈틈을 찔러서 돌격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그런 전투가 아니었다.

    저곳에서 날뛰는 타르바군은 불과 둘이었다.

    용병으로 위장해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거인과 같은 자들이었다.

    그 둘 이외에는 모두해야 불과 300명 정도에 지나지않는 기병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지고 있는 쪽은 프리시오 측이었다.

    이천에 달하는 병력이 모닥불에 던져넣은 눈뭉치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겁을 먹은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밟혀 죽었고, 어떻게든 칼질이라도 한 번 해보겠다고 접근하는 기사는 맞아 죽었다.

    단 두 명의 거인 용병이 날뛰고 있음에도 제대로 맞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프리시오는 성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며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거인 용병에 대해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프리시오는 거인 용병이 스케티와 뱅트손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읽을 당시에는 과장이 섞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보고서의 절반만 믿어도 당장 도망쳐야 할 판이었다.

    알더스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투구를 뒤집어 썼다.

    그 모습을 본 프리시오는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냐?”

    “뭐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기사들과 함께 돌격할 겁니다.”

    프리시오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한편으로는 적들의 시선도 끌겠다는 의도가 너무 명백해서였다.

    “제 아이들을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알았다.”

    성문이 열리는 순간 20기의 기마가 튀어나갔다.

    모두 알더스를 따르는 기사들이었다.

    타르바 왕국이 배신한 이상 알더스의 미래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충성심을 증명해야 다음 세대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기의 기마는 거인 용병이 아니라 교자 위에 앉아있는 자를 목표로 했다.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거인 용병의 절반과 기병 전체가 보호하기 위해 달라붙어 있는 자였다.

    죽이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시선을 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알더스는 교자를 향해 접근할수록 몸전체가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몸이 무거워졌다.

    마치 모래주머니라도 몸 곳곳에 매달아놓은 것같은 느낌이었다.

    말의 호흡도 가빠지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결국, 교자 위의 젊은 남자로부터 불과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말이 주저앉고 말았다.

    말은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조금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 앉았다.

    알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더스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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